사용자 삽입 이미지
작년 12월 5일 포스트로 막을 내린 <유재현 온더로드_미국편>에 이어, 매주 주말마다 8회에 걸쳐 <유재현 온더로드_"아시아의 오늘">을 연재합니다. 책으로 만나려면 긴긴 시간이 남아있는 글과 사진들을, 블로그를 통해 연재할 수 있도록 보내주신 작가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포스트 보러가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7년 전 중부 칼리만탄을 피로 적셨던 인종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다약족들이 세운 토템 양식의 위령탑

인도네시아의 중부 칼리만탄(보르네오)의 주도인 팔랑카라야에서 삼핏으로 가는 길은 밀림을 가로질러 5시간을 넘게 달려야 한다. 광활한 밀림과 오랑우탄의 서식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변은 동남아시아의 여느 밀림과 다를 것이 없는 익숙한 풍경이 연속이었다. 동남아의 밀림을 관통하는 도로변에 흔히 보이게 마련인 화전 대신 목재소들이 빈번하게 눈에 띠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7년 전 중부 칼리만탄을 피로 적셨던 인종분쟁의 흔적은 그 길의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2001년 2월 보르네오의 원주민격인 다약족은 이주민인 마두라족을 상대로 인종전쟁을 벌였다. 500-1000명으로 추산되는 마두라족이 살해당했고 그들 대부분은 다약의 전통에 따라 목이 잘렸다. 당시 외신을 떠들썩하게 장식했던 학살극은 5만 이상으로 추산되는 마두라족이 칼리만탄을 탈출(추방)한 후 일단락 지어졌다. 이 사건은 수하르토 독재정권이 남긴 유산으로 평가되었다. 칼리만탄의 밀림을 개발하기 위한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마두라섬에서 대거 이주시킨 마두라족들은 임업과 광업 노동력으로 활용되었고 원주민인 다약족들의 밀림에 근거한 전통적 생활을 파괴하는 데에 앞장선 격이 되었다. 다약족들은 개발의 광풍에 밀림의 터전을 빼앗겼고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그런데 이건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중부 칼리만탄에서 벌어진 다약의 마두라에 대한 학살을 선동하고 조직한 것은 다약 출신의 엘리트그룹이었다. 1998년 수하르토의 퇴진 이후의 정치적 과도기에 칼리만탄에서의 기득권 유지와 확대를 꾀했던 다약의 상류계급들은 수하르토 정권에게도 전적으로 협조했던 세력이었다. 2001년의 인종분쟁으로 중앙정부에 자신들의 힘을 과시한 이들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마두라족의 잘린 목들의 무덤 위에 발을 딛고 최대의 승리자가 되었다. 최대의 피해자는 부모와 형제 자식들의 목이 잘리는 참담함을 뒤로 하고 칼리만탄을 떠났던 마두라족이었지만 빈곤에 허덕이던 다수의 다약족들 역시 처지 또한 바뀌지 않았다. 나치에서 삼핏에 이르기까지 인종주의 본질은 인종과는 무관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삼핏 가는길"에서 만난 청년>
“함께 살아야지요."

학살의 중심무대였던 삼핏시에 도착해 처음 만난 다약 청년은 그렇게 말했다. 삶의 근거를 삼핏에 두고 떠난 마두라족들은 5년 전부터 돌아오기 시작해 이제 3천여 명을 헤아린다고 했다. 마두라족이 다수를 이룬 이주민들의 도시였던 삼핏은 이제 다약족이 다수이지만 그들은 다시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시 외곽에는 2003년 다약족들이 세운 토템 양식의 위령탑이 서 있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삼핏을 둘러싼 밀림에는 음습한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밀림 너머로 해가 솟아오르면서 안개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2008/07/05 02:22 2008/07/05 02:22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29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