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고병권의 촛불정국 분석 - 추방된 자들의 귀환」(바로가기)포스팅 후 많은 방문과 추천이 이어졌습니다. 그 후 '촛불'은 다른 이슈들에 가려졌습니다. 그리고 성급한 사람들은 섣부른 '패배'를 말하고, 섣부른 '승리'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러한 섣부른 '패배'와 '승리'를 선언하는 대신, 승패의 선언에 가려진 '전망'을 이야기 합니다. 지난 6월의 포스트와 함께 읽으면서 도래할 삶에 관해 고민해 볼 수 있길 바랍니다.


촛불 시위, 그 승패에 대한 관심

― 전망이 없는 전쟁, 전쟁이 낳은 전망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1. 불임의 전쟁에 대한 공포

4월 말에 시작된 촛불 집회는 7월 29일 현재, 격렬한 국지적 전투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상당한 침체에 빠져들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을 ‘만물의 어버이’라 불렀지만, 이번 전쟁의 ‘불임성’에 대한 걱정이 어느 대중들의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연인원 수백만이 참여한 이 엄청난 투쟁이 혹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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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집회 참가자_이미지 출처 "NEWSIS">

현재 이 운동의 외면적 성과로 우리에게 던져져 있는 것은 대통령의 입발림 사과(6.19)와 청와대의 비서진 개편(6. 20), 세 명의 장관 교체(7. 7) 정도이다. 연 인원 수백만 명이 80일 넘게 싸워 얻은 것 치고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이 성과들조차 성과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이다. 대통령의 사과 이후 정부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은 그 사과가 대중의 요구에 대한 진지한 수용과는 무관함을 보여준다. 사실 악행의 장본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 갖는 느낌은 아주 다를 수 있다. 범죄자 중에는 “그런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런 걸 고려하지 못했다니.”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전자가 반성하는 것이 행동 자체라면, 후자가 반성하는 것은 행동의 ‘주의부족’이다. 마치 절도범이 도둑질 자체를 반성하기보다 그것을 ‘주의 깊게’ 수행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는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정부는 정책 기조에 대한 반성보다는 그것에 반발하는 여론 관리에 소홀했던 점을 반성하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과 방송을 장악하지 못했던 점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통령의 사과, 청와대 비서진과 일부 각료의 경질을 촛불의 성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진정한 반성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반성의 진정성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집권자들의 역습(촛불 시위에 대한 공격적 진압,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 네티즌과 PD수첩에 대한 검찰 수사, 사이버 모욕죄 신설 검토를 비롯한 포털 사이트 규제 움직임 등)은 반성의 배반이라기보다는 반성의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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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패배를 말하는 사람은 현재 많지 않다.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촛불이 이겼다’ 내지 ‘국민이 승리했다’는 말이 더 많아졌다. 실제로 지난 7월 5일에는 ‘국민승리 선언을 위한 촛불 문화제’가 열리기도 했다. ‘결국에 촛불이 승리할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진 이들도 있을 것이고, ‘결과에 상관없이 수백만의 대중이 직접민주주의의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미 승리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승리 선언에서 왜 승리한 자의 유쾌함이 아니라 승리해야만 하는 자의 비장함이 묻어날까.

사실 어떤 경우에도 선언해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승리란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아마 루쉰 소설의 주인공 ‘아Q’가 곧잘 보여주던 ‘정신 승리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패배했는가? 분명 어떤 이들은 ‘현실적 패배’보다도 빨리 ‘정신적 패배’를 겪는다. 한편으로는 ‘아직’ 싸우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패배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은 아직 시작되지 않는 전쟁에서도 패배한다. “지금 수백만이 모였는데도 이렇다면 앞으로 우리에게는 사실상 아무런 전망도 없다. 앞으로 이 수가 다시 모이기도 힘들 뿐 아니라 다시 모인들 무슨 가능성이 있는가?” 어쩌면 싸움에서보다 그 해석에서 더 크게 패배하는 허무주의자들이 이번에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2. 어떻게 승패를 다룰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정신적 도금주의’―사태의 표면에 승리를 바르든, 패배를 바르든―에서 벗어나면서도 ‘전망 없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촛불 시위의 승패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그 대답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다루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겼는가, 졌는가’라는 물음 이전에 그 물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함께 논의해보았으면 좋겠다.

이와 관련해서 인류학자 데이빗 그레이버(D. Graeber)의 글, 「승리의 충격」(the shock of victory)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는 “직접행동 운동이 직면한 최대 문제는 승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70년대 이후 서구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들을 예로 들면서, 그는 ‘이겼다’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다. 어떤 점에서 몇몇 운동들은 초기에 대단히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어떤 운동가도 그런 폭발적 전개를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참여자들은 크게 줄어들고, 정부나 기업은 더 이상 요구를 수용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나면 활동가들은 큰 실패감에 빠져 자신들이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회의하게 된다. 그레이버는 이런 패턴이 여러 운동들에서 반복되고 있다고 말한다.

대규모로 시작되었지만 결국에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된 운동들, 가령 반핵운동이나 지구적 정의 운동(Global Justice Movement) 등은 정말로 실패한 운동이었는가. 아마도 운동의 성패를 따지는 쉬운 방법은 그 운동의 목표와 성과를 비교해보는 일일 것이다. 그레이버는 목표를 단기, 중기, 장기 등 셋으로 나누어 비교해보았다.

가령 반핵운동의 경우. 단기목표는 해당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기목표는 원자력 발전소의 신설을 막고 녹색에너지를 향한 새로운 움직임을 만드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장기목표는 (급진 분파들이 상정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기준들을 놓고 보면 단기 목표는 전혀 달성되지 못했다. 해당 원전이 결국에 가동되었으니. 하지만 놀랍게도 중기 목표는 쉽게 달성되었다. 70년대의 시위 이후 25년간 미국에서 원전 신설계획은 제안되지 않았고, 환경보호담론은 하나의 상식처럼 공론화되고 번성하게 되었다. 물론 장기적 목표는 아직도 요원하다(사실 이 목표는 그것을 주장하는 이들에게조차 그 구체적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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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에 의해 '지구정의운동'의 결집체로 규정된 세계사회포럼(WSF) 폐막식 장면>

그렇다면 이 반핵 운동은 승리한 것인가, 패배한 것인가. 어떤 점에서 그것은 패배한 운동이었다. 초기 2-3년은 들불처럼 타올랐지만 결국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했고, 대중은 썰물처럼 빠져나갔으며 활동가들은 좌절했으니. 하지만 다른 점에서 그 운동은 승리했다. 실제로 향후 몇 십 년을 좌우하는 성취를 이루었으니.

물론 시간적으로 뒤에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과거 운동에 대해 함부로 말할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 다만 당시의 수행자에게는 절망적이고 아무런 소득없이 끝나버린 것 같은 운동이 실제로는 엄청난 성취를 이룬 경우가 많다는 걸 말하고 싶다. 운동의 승패 문제를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활동가들의 진로는 크게 바뀐다. 똑같은 시점에 어떤 이들은 투쟁이 끝나감에 좌절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투쟁이 열어놓은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도달한 곳을 한계라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그곳을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은 항상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어디로 진행할 것인지는 언제나 정해져 있지 않다.


3. 촛불의 성취

이제 촛불시위에 대해 한 번 물어보자. 우리는 승리했는가, 패배했는가. 일단 단기목표인 ‘전면 재협상’은 아주 예외적인 사건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현재로서는 그 달성이 어려워 보인다. 정권 자체의 안위가 위협받는 수준까지 가지 않는 한, 정부가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으며, 현재(7월 말) 대중들에게 그것을 강제할 힘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중기목표는 어떤가. 사람들마다 중기목표가 무엇인지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렇다. 대중들의 삶을 불안에 빠뜨리고 양극화를 심화시켜온 신자유주의 정책을 저지하는 것, 그리고 대중들을 배제하는 정치적 의사 결정 체제, 즉 ‘데모스 없는 데모크라시’를 저지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발명하고 소통시키는 것.

만약 중기목표가 이런 것이라면 이번 촛불시위는 꽤 큰 승리를 거두었다. 신자유주의 핵심 정책의 하나인 ‘민영화’가 부분적으로 저지되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전기, 가스, 수도, 건강보험의 민영화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물론 그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아마 그들은 여론이 역전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십여 년 간 한국 사회에서 ‘민영화’라는 말이 가졌던 긍정적 뉘앙스(‘관치’라는 말의 부정적 뉘앙스와 대비되어 ‘자유롭고’ ‘효율적인’ 운영 방식)는 완전히 뒤집혔다. 민영화는 본래 그 말의 적합한 번역어라고 할 수 있는 ‘사유화’의 부정적 뉘앙스(삶의 ‘공공성’을 파괴하는 ‘사적 독점’)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그 외에도 ‘대운하’나 ‘미친 교육’으로 대표되는 공공성 파괴 정책이 저지되거나 공론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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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촛불대중,
오른쪽 하나의 형상으로 표상되지 않는 잭슨 폴록의 작품 <넘버5, 1948>

민주주의 모델의 혁신과 소통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성취는 더 커 보인다. 운동조직의 대의를 통하지 않는 운동, 정치인의 대의를 통하지 않는 정치, 미디어의 대의를 통하지 않는 여론이, ‘매개 없이’ 직접 생산되고 소통되었다. 무엇보다 대중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공통된 신체로 생산했다. 그것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서로 융합한 일종의 ‘질적 다양체’였다. 아주 다른 커뮤니티들이 자신들의 색깔을 살린 채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국가와 개인의 이분법이 아니라, 비국가적이지만 공통적인 ‘공공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 수십 년 간 한국 사회의 방향을 크게 좌우할 성취라고 할 수 있다.


4. 과정 중의 존재

반복해서 말하건대, 지금 내가 어떤 쓰라린 가슴을 위무하기 위해 ‘승리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운동의 승패를 다루는 태도 자체가 운동의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단절점, 어떤 명확한 척도로서 운동의 승패를 확정지으려는 태도는 지극히 위험하다는 점이다. 그레이버의 말처럼 “우리가 약간은 이겼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 덧붙이자면 우리는 여전히 “과정 중에 있다”는 점, 그것도 우리가 “약간 이겼기 때문에” 새롭게 열린 어떤 과정, 어떤 면에서 ‘레벨 업’이 되어 조금 어려운 국면이기는 하지만 어떻든 새롭게 열린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어떤 단절점을 제시하고 거기를 넘지 못하면 우리는 패배한 것이라는 근본주의자들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의 단호함, 즉 현재로서 성취가 불가능한 기준을 제시하고 거기에 미달하는 어떤 성과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태도는 어떤 점에서 비관주의와 절망감을 예비하는 일이다. 사실 근본주의자들의 반대편에는 전쟁의 불임성을 걱정하는 소심한 이들이 서 있다. 이들 역시 승리의 가시적 기준을 제시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은 승리의 기준을 대폭 낮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교육감 선거에서 승리만 한다면’. ‘경찰청장을 물러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런 태도는 근본주의만큼이나 위험하다. 그것은 대중 운동의 방향과 폭을 선험적으로 제한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배후에 절망감을 둔 단호함도, 배후에 소심함을 둔 소박함도,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승패를 확정하려는 열망은, 우리가 지금 ‘과정’ 중에 있으며, 앞으로도 ‘과정 중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태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은’ 피로감의 산물이다.


5. 저강도 전쟁사회의 전망

확실히 말하건대, 촛불은 결코 ‘전망 없는 전쟁’이 아니다. 오히려 촛불시위 덕분에 전쟁의 새로운 전망이 열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언가처럼 말해본다면, 아마도 한국 사회는 앞으로 힘든 ‘저강도 전쟁 사회’를 경험할 것이다. 부와 권력, 여론의 영역에서 대중들의 추방은 계속될 것이고, 이에 맞선 대중들의 난입도 계속될 것이다. 촛불시위가 없었다면 이 ‘저강도 전쟁’은 매우 추악하고 잔인하며, 비극적인 것이 될 뻔 했다.

삶의 불안정에 시달리던 노동자가 길거리에서 이유 없이 십여 명을 살해한 일본의 ‘아키하바라’ 사건, 인종적·계급적 차별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이 이유 없이 길거리의 자동차들을 불 질러 버린 프랑스의 ‘방리유’ 사태. 이것이 모두 ‘불안사회’, ‘전쟁사회’의 한 단면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부 때문에 대중은 불안에 시달리고, 그런 대중의 존재가 두려워 정부는 치안을 강화하는 것. 이 기괴한 구도가 우리에게 닥치고 있다.

내게 어느 일본인 학자는 일본의 일 년 자살자가 3만 명이 넘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삶의 불안에 시달리는 일본인은 스스로 죽거나, 아키하바라에서처럼 남을 죽임으로써 자신을 죽입니다.” 어떤 전쟁이 매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을까. 자살자들은 물론 모두 개인적 이유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르켐 이래 사회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자살자들의 개인적 죽음은 또한 사회적 죽음이다. 거기에는 개인적 사정만큼이나 사회적 사정이 있다. 그래서 자살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피살자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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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2008년 일본과 한국의 자살율 추이>

이제는 한국도 일본 못지않은 ‘자살 사회’에 접어들었다. 대중의 상당수는 안전이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는 삶의 불안정 지대에 내몰려 있고, 대중의 목소리를 대의할 조직이나 기구들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촛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촛불은 우리 전쟁의 양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두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해 우연히 제안되었던 그 촛불이 물리적 폭력―전경의 방패를 뚫을 수는 있지만 한 국면을 뚫기에는 한없이 보잘 것 없는―을 대신할 새로운 힘, 그 파괴력에서 물리적 폭력을 훨씬 능가하는 사회적 소통의 길을 제시해주었다. 그리고 그 촛불이 삶의 안전을 개인이 아닌 집단의 시각에서 풀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촛불이 우리에게 어떤 한계를 보인다면, 그것은 경찰이 설치한 장벽을 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 소통이 여전히 불충분하고 우리 신체가 만족스러울 만큼 다질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촛불은 추방된 자들의 형상, 그러면서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자들의 형상, 가령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형상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전쟁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쟁이 열어놓은 새로운 전망 앞에 서 있다. 집권자들과의 전쟁이 개별적 폭력도 집단적 난동도 아닌, 다른 형태로 수행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우리의 전쟁은 성을 쌓고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며 선동적 찌라시를 뿌리는 저들의 저차원적 전쟁과 다르다는 것. 우리는 삶을 함께 구성하고 새로운 지성과 새로운 신체를 생산하는 고차원적 전쟁을 알고 있다는 것. 포연이 자욱한 전쟁이 아니라, 아니 설령 그런 전쟁 속에 있을 때조차, 우리의 전쟁은 니체의 말처럼 ‘향기가 나는 전쟁’이 될 것이라는 것.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고 이것을 믿고 있다.


2008/07/31 02:19 2008/07/31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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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지아의 생각

    Tracked from jiah's me2DAY 2008/08/02 21:15  삭제

    “우리가 약간은 이겼다” 촛불 시위, 그 승패에 대한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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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anna 2008/07/31 11:54

    잘 읽었습니다. 감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이렇게 패배하는 건가 싶어 많이 우울했습니다. "승패를 확정하려는 열망은, 우리가 지금 ‘과정’ 중에 있으며, 앞으로도 ‘과정 중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태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은’ 피로감의 산물"이라는 대목 읽고 뜨끔합니다. 가야 할 방향, 목표물이 안보이는 과정이라는 게 얼마나 더디고 힘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빨리 끝내고 싶은 피로감'이 눈앞을 가려 주저앉진 말아야 하겠지요. 자기가 속해있는 곳이 어디든간에요...좋은 글 고맙습니다.

    • 그린비 2008/07/31 13:58

      sanna님 안녕하세요.
      저도 '패배감'은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더불어 자위적인 '승리선언' 역시 마찬가지구요.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 속에서 최선의 '긍정성'을 찾아 그것을 키워가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2. 다녀오다 2008/07/31 17:10

    고맙습니다.

    • 그린비 2008/08/01 12:04

      네, 고맙습니다. by gool ^^*

  3. 올레 2008/08/04 00:19

    고민하던 문제입니다.
    승리와 패배의 결정이전에 과정으로서 단계로서 지금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향기는 지금 풍기는 것이니까..

    • 그린비 2008/08/04 14:19

      올레님 안녕하세요.
      말씀하신대로 '향기는 지금 풍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겼는가, 졌는가를 판단하려고 하면 할수록 향기는 저 멀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승패의 결정 이전에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어떤 긍정성들을 획득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