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재현 온더로드 <"아시아의 오늘"-필리핀 편>을 포스팅합니다. 책으로 만나려면 긴긴 시간이 남아있는 글과 사진들을, 블로그를 통해 연재할 수 있도록 보내주신 작가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지난 글들은 블로그 우측 배너를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팜팡가의 한 안전가옥에서 만난 중부루손 신인민군(NPA) 최고정치위원인 지니 또는 토니는 60대의 여성이었다.
“지니라고 불러요. 난 그게 좋아. 토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마침 팜팡가에 사업차 침투(?)해 있던 그녀를 소개한 중간책은 ‘중부루손 신인민군 사령관’으로 소개했지만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신인민군에는 중앙이건 지역이건 사령관이란 직책은 없어요. 정치장교(Political Officer)와 군사장교(Command Officer)가 있을 뿐이지요.”

그녀는 마치 어염집 아낙처럼 여겨져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공산게릴라의 존재감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던 초기 누군가가 안가를 방문하면서 분위기가 일신했다. 그녀는 배낭에서 45구경 권총과 탄창을 꺼내 그에게 건넸는데 안경집에서 여벌의 탄알을 꺼내 탄창에 장전하는 손놀림이 능숙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인터뷰, 그녀가 토론이라고 지칭한 대화는 필리핀공산당의 이념인 마오주의로부터 시작했다.
“우린 MLM(맑스-레닌-마오주의)을 이념으로 해요.”

그녀는 필리핀공산당을 마오주의 정당으로만 부르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거부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지만 일반에 널리 알려진 마오주의와 별로 다른 것은 없었다. 말하자면 반봉건반식민지 국가에서 농민을 주력으로 하는 혁명노선과 무장투쟁, 토지개혁 등등.
“그게 마오주의 아닙니까?”
“어느 나라이건 자신의 조건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지요. 우린 필리핀에 맞는 혁명노선을 관철시키고 있어요.”

뭐,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하튼 내가 인터뷰를 요청한 이유는 새삼스럽게 교과서적인 사안들을 들추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 뒤에도 그녀는 1980년대 필리핀공산당 내의 1차정풍운동과 1991년에 시작된 2차 정풍운동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했고 당내의 좌우편향, 당과 군의 관계, 그리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당의 입장 등을 피력했다. 아마도 그녀가 말한 토론이었을 것이다. 옮기기에는 지면도 부족하지만 그보단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자금은 어떻게 마련합니까? 해방구의 농민들에게 혁명세를 징수하나요?”
“원칙은 그렇지만 쉽지 않아요. 모두들 가난하니까.”
“그럼 어떻게?”
“토지사업을 하기도 하지요.”
“사업이요?”
“미개간 토지를 개간해요. 무토지 농민에게 땅을 알선하지요. 토지개간을 알선하고 종자와 비료를 공급합니다. 대신 소출의 5-10%를 나누지요.”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커튼이 드리워진 창밖의 동향에 대해서 주위를 기울였고 때때로 커튼 사이로 밖의 동정을 살피기도 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사업가나 기업들에게도 도움을 청하지요.”
“사업가나 기업이요? 자본가들에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협조합니까?”
“이해할 때까지 설득하지요.”
“끝까지 거부하면요?”
“끝까지 설득합니다.”

물론 설득해서 될 만한 상대를 물색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안가의 집주인도 사업가 중의 하나라는 사실로 보아서는 자발적인 협조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디선가 점심으로 먹을 음식이 전달되어 왔고 그쯤에서 우리는 함께 끼니를 때웠다.
“캠프 생활은 할 만 합니까?”
“나이에 비하면 건강하게 보이죠? 채식과 운동 때문이랍니다.”
캠프에서는 고기 먹을 일이 별로 없다며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입을 가리고 호호 웃어 보였다.
“지치지 않았습니까?”

올해 40주년을 맞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산당 중의 하나에 몸을 담고 평생을 바친 60대의 여성에게 나는 조금 안쓰러운 심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간단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치지 않아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내가 할 일이니까.”

담배 한 개비를 빼문 그녀는 불을 붙이곤 말했다.
“우리 세대가 아니더라도 다음 세대가 있잖아요. 필리핀은 말이에요 풍요로운 땅입니다. 기름진 흙과 풍부한 물이 있지요. 모두가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어요.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은 단순한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가족들이 몸을 누일 집이 있는 그런 세상이지요. 뭐 대단한가요. 꿈이랄 것도 없지요. 필리핀의 다음 세대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겁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녀에게 뒷모습이나 그도 아니면 그림자라도 사진을 찍을 것을 청했지만 당의 방침이라는 이유로 간단하게 거절당했다.
“1997년 이후로 당원들에게 음주가 금지되었죠. 그 뒤론 모두들 술을 먹지 않아요. 그래도 흡연은 금지되지 않았답니다.”

담배연기를 내뿜던 그녀는 이번에는 입을 가리고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안가를 나서자 팜팡가의 태양이 뜨겁게 달군 한낮의 메마른 공기가 일순간에 숨을 막았다. 지독하게 더운 날이었다.


2008/08/02 01:27 2008/08/02 01:27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320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비밀방문자 2008/08/02 20:36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 비밀방문자 2008/08/02 20:37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