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의 일치, 2008 촛불 시위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 ~ 2004)로 읽는 2008년 한국사회


- 연구공간 '수유+너머' 권은영


삶과 운동의 간격

나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이유를 항상 외부에서 찾았다. 대학시절, 나는 노동자 집회에 나가는 이유를 ‘나도 언젠가 노동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농민 집회를 나가는 이유를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농민이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거기에 현재의 ‘나’는 없었다. 언제나 나보다 중요한 우리, 그리고 더 나은 사회만 있을 뿐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가?, 나는 현재 즐거운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는 한뜻으로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괴리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현실감각을 찾고 하나 둘씩 떠나갔다. ‘어쩔 수 없잖아’ 라는 말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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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말레비치(Kazimir Malewitch) <검은 사각형>
현실의 온갖 색들을 빼고 남은 공허한 이상의 검은 심연

하지만 이것은 떠난 사람들만의 말이 아니었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집회를 마치고 술 한 잔 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취한 사람 순서대로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토로했다. ‘거대한 기업을 대상으로, 국가를 대상으로 어떻게 이기나. 사실 어쩔 수 없지 않나. 난 무엇을 하고 있나.’ 입으로 고귀한 단어들을 말하고, 자신은 일반 대중들과 다르게 고귀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했지만 결국 국가와 자본에 ‘불만을 토로하는 노예’일 따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내가 경험한 운동은 이러한 과정의 반복이었다. ‘떠나거나 혹은 남아서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괴로워하거나’의 연속이었다. 패배감의 연속.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패배를 먼저 배운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내가 속한 집단에게 져야 하며, 부모에게 져야 하고, 국가가 정한 모든 법에 져야 한다. 만약 이기려 든다면, 사회는 호환마마보다도 더 무서운 미래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고 겁을 준다. 이것이 개개인을 약자로 만들어 버리는 교육이며 그 너머를 상상하기 힘들게 만드는 현실이다. 그러니 현재 사회를 이겨보겠다고 모이는 집단들 역시 현재 사회, 국가의 모습을 닮아 있을 수밖에.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를 경험한 우리는 승리를 꿈꾸기가 어렵고, 집단이나 국가를 넘어선 개인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는 대의 앞에 자신의 삶을 하찮게 여긴다.


2008 촛불 시위, 정의의 순간

그런데 오늘날, 그 간의 내 고민을 무색하게 만드는 전혀 다른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2008년 5월, 미국 소고기 수입 협상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의심하며, ‘광우병 쇠고기 반대’를 외치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것은 불의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정의 요구는 정의상 참을성 없고 비타협적이며 무조건적이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p.77)

정부의 결정이 자신의 삶을 황폐하게 할 것이라는 직감에서, 눈앞에서 일어난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서, 정당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왔다. 거리로 뛰어 나온 사람들에게 대의란 바로 ‘자신의 삶’에 다름 아니었다. 삶과 운동의 괴리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정의’의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자신을 정당화해 줄 어떤 지식이나 규칙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을 둘러싼 기존의 지평에 대한 고려 없이 펼쳐지는 순간 말이다. 자신의 삶과 행위에 한 치의 간격이 없어 자신을 합리화시킬 필요성이 없어지는 순간!
정의는 기다림의 지평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아마도 하나의 장래, 정확하게 말하면, 미래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하나의 도래-하기를 갖게 될 것이다.
(『법의 힘』,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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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장의 시민악단
"자유와 정의는 얻어질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로울 때,
우리가 정의로울 때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

데리다는 정의를 도래함이며 도래할 것으로 규정한다. 정의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언젠가 찾아올 미래가 아니다. 수요일 다음에 목요일이 오듯이 오는 것이 아니다. 다르게 표현해 그것은 기다릴 필요가 없는 순간이다. 오는 것이 아니라 ‘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내 삶에 필요한 바로 그것을 ‘도래하게’하는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촛불을 든 회사원, 유모차 부대, 청소년, 예비군 등으로 가득 한 거리와 인터넷에서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계속 펼쳐지고 있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이,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나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에 저항할 수 있게 되었다. 목 놓아 ‘대의’를 외치고 나 자신을 합리화시킬 필요가 없다. 모두들 누구보다 자신의 피부로 ‘대의’를 느끼고 있으므로.


패배감, 두려움 비웃어 주리라!

따라서 나는 요즘 들어 자주 등장하는 촛불 시위가 ‘불법 폭력’ 시위로 변질되었다느니, 초창기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느니, 이제 곧 정당성을 잃고 사라질 것이니 하는 말들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예전 같으면 금방 패배감에 젖었겠지만, 요즘엔 코웃음이 난다.

처음부터 촛불 시위에 초창기 ‘순수성’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설마 아이나 소녀를 표현할 때 쓰는 정체 모를 순수성을 언급하는 것은 아닐 테고.) 촛불 시위는 특정한 형식도 없고, 단일한 목적도 없고, 지도부도 없이 시작되었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인터넷에서 거리에서 터져 나왔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동의하는 대로 움직였다. 어떻게 보면 촛불 시위는 시작부터 오염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목적, 하나의 지도부 아래 똘똘 뭉친 조직에게도 들이대기 힘든 순수성을 잣대로 촛불 시위를 평가하는 것은 웃긴 일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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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하게 얽혀있는 이 '순수한' 행렬을 보라!
'법'은 행렬 밖에서 이들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걸음 속에서 자라나온다.

또 하나 촛불 시위에 ‘불법, 폭력’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그것의 ‘순수성’을 문제 삼는 것보다 더더욱 무의미하다. ‘법과 폭력’은 그 자체로 잣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고유 명사로 명명하고 규칙을 만듦으로써 그 외의 것들을 배제하는 폭력을 수행해왔다. 데리다는 법을 정초하고 정당화하는 수행적 힘, 곧 폭력의 두 가지 함의를 통해 법의 신비한 토대를 벗겨낸다. 법은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유효하며 그것이 실행되는 순간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수행성은 사태를 변화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법이 실행되는 순간 사태는 그 전과 전혀 다르게 재편된다. 가령 ‘쓰레기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법이 정립되어 발효되는 순간, 쓰레기를 아무렇지 않게 버리고 살던 사람들의 삶은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게 된다. 법은 오로지 그 수행성에 의존해 있을 뿐이다. 법 정립의 절대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데리다는 법이 언제나 해체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의’는 법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법의 해체가능성에, 그 수행성 속에 있다.

폭력 역시 수행적 힘의 차원에 놓여 있다. 사카이 다카시는 폭력은 갈등이고 마찰이며, ‘평화는 파란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라는 도식이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평화는 역동적인 항쟁 속에서 끊임없는 행동에 의해 유지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 가는 어떤 힘으로 충만한 상태이다. 따라서 법과 폭력은 모두 우리가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사고하고 수행해야 할 것이지, 절대적 기준에서 보존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촛불 시위에 참여하는 우리는 ‘부당하고 거대한 폭력의 힘을 분산시키거나 혹은 반대로 더욱 확장시키면서 자신의 힘을 적절하게 또는 최대한으로 발휘해 대항하는 전술’(폭력의 철학, 46)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불법, 폭력’이라는 말이 참으로 쓸모없어지는 순간이다. 그러고 보면 당시 영국 정부에게 ‘불법적이고 폭력적이었을’ 운동 즉, 소금법에 불복하고 스스로 소금을 만드는 ‘불법’ 행동을 전개한 운동(간디를 중심으로 한)이, 지금은 비폭력 평화 운동의 대명사로 촛불 시위를 비난하는 예가 되는 아이러니한 사실이 이해가 간다.

과거의 경험은 언제나 현재와 함께한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촛불 시위 역시 80년 6월 항쟁,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촛불 시위의 바탕 위에 놓여 있다. 독재정권의 경험이 현재의 우리에게 별 무리 없이 ‘백골단’을 선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2008년의 촛불 시위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형식의 경험을 펼치고 있다.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다양한 저항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물론, 거기에 유머까지 덧붙이고 있다. 현 정권을 분석하거나 비판하는 글과 문구들에는 언제나 유머와 재치가 넘친다. (‘어른들이 무슨 죄냐 청소년이 지켜줄께.’ - 광화문 길바닥에 쓰여진 글, ‘이명박은 전과 14범이다~~이명박의 모든 권력은 거짓으로부터 나온다~’ - 대한민국헌법 1조를 개사한 노래 등등) ‘시위대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시위대를 강경 진압 하겠다’는 말이 패배감으로 혹은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제 꼭 거리 위에서가 아니더라도 싸울 수 있으며, 정부의 강경 진압을 비웃으며 그들을 당황하게 할 다른 저항을 기획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운동은 언제나 내 삶과 고민이 펼쳐지는 바로 이곳에서 일어난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운동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좀 알 것도 같다. 삶=운동! 이제 나는 나를 주눅 들게 한 패배감과 두려움을 마음껏 비웃어 줄 수 있다. 살고 싶으니까, 살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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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5 21:25 2008/08/05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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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지아의 생각

    Tracked from jiah's me2DAY 2008/08/06 15:58  삭제

    우리는 이제 꼭 거리 위에서가 아니더라도 싸울 수 있으며, 정부의 강경 진압을 비웃으며 그들을 당황하게 할 다른 저항을 기획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저항을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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