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차례에 걸쳐 올라왔던 「고병권의 촛불정국 분석」1, 2(바로가기)에 이어, 이진경의 「촛불시위 평가와 전망」을 포스팅합니다. 우리 모두 쉽게 패배를 단정하거나, 선언에만 그치는 승리를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촛불시위가 남긴 것

연구공간 '수유+너머' 이진경

촛불시위가 시작되고 100일이 되었다. 5천 명에서 50만 명 사이의 사람들이 일주일의 반 이상 모여 집회를 한 것이 어느새 100일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전에 대중시위를 조직하거나 참가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이 100일이라는 기간의 의미를. 그것은 50만 명, 아니 100만 명이라는 숫자보다 훨씬 더 지대한 의미를 갖는다. 아무런 중심조직 없이 대중의 자발적 참가만으로 100일간의 투쟁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사실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싸워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쇠고기도 대강 타협해서 수입하고, 경쟁적 교육체제나 노골적이고 치졸한 인사도 계속 되고 있으며, 일부에서 기대했던 교육감 선거도 ‘실패’로 끝났으니까. ‘무능력의 승리’라고 해야 할까? 정치적 감각이 없고, 대중의 힘에 대해 무지하며,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 또한 없다는 점 때문에, 대중의 항의와 투쟁 앞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그저 손 놓고 바라만 보며 100일을 버틴 것이니까. 그러나 무능력이 거대한 능력에 대해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 것일까? 정말 그들이 승리하고 대중은 패배한 것일까?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가시적인 성과’만으로 승패를 가리는 나쁜 습관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 가시적인 것만을 본다면 얻은 것도, 얻지 못한 것도 보지 못한다. 더욱이 대중의 힘, 대중의 능력이란 본래 잠재적인 것이기에, 눈앞에 드러나 있는 경우에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하이데거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거대한 성공을 실패로 오인하고, 결정적 패배를 승리로 착각한다. 아마도 그들은 이겼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승리한 것, 자신이 얻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패배마저 알지 못하는 자는 결국 크게 패배할 것이고, 승리를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이겨도 이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얻었던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쉽게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고 또 어떤 사안도 모여서 문제화할 수 있었다는 경험일 것이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혁명적 상황도 아닌데 이렇게 쉽게,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대대적으로 대중이 모여 투쟁한 경우는 없었다. 이는 아마도 2002년부터 모이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이번의 경험은 더욱 그러한 대중적 모임을 쉽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이미 실효를 잃어버린 게 분명한 대의제를 대신해 새로운 대중정치의 장을 활짝 열어젖힐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대대적으로, 그토록 긴 기간을 이질적인 사람들이 하나의 명시적 통일성 없이 그때마다 서로에게 맞추어 가며 어떤 행동을 함께 구성해갔던 경험은 무언가를 공동으로 함께 구성해 가는 능력으로 잠재화된다. 어떤 중심도 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진 것도 별로 없으면서도 함께 모여 공동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 이런 능력을 ‘공동성’(the common)이라고 명명하자. 이는 드러나지 않는 때에도 잠재성으로 상존하며, 언제든지 조건이 갖추어지면 솟아오르며 현행화되는 능력이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연대와 공동행동으로 다시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도래할 사건, 도래할 시간이 현재의 시제로 잠재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성은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이 만나서 함께 하는 능력이다. 이번의 촛불시위에서 두드러진 것 가운데 또 하나는 이해관계나 계급적 동질성과는 거리가 먼, 극히 이질적인 집단의 사람들이 서로 결합하여 함께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에 대해 열린 대중, 이질적인 타자와 더불어 서로를 조율해가며 함께 공동의 행동을 만들어가는 대중적 능력이 거리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질적인 것이기에 만나고 결합할 때마다 뜻밖의 사건을 만드는 능력. 들뢰즈라면 이를 ‘특이성’(singularity)이라고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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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이응노 作 「군상」1989.
경직성을 벗어나 유연하게 움직이는 대중의 '지각 불가능한 운동'.

여기에 집합적 지성, 혹은 대중지성이라고 불리는 능력이 유례없이 증장(增長)되었다는 점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대중은 인터넷을 비롯한 흐름의 공간에 더욱 더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그 공간에서 만나고 토론하는 능력, 그 공간을 이용하는 능력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시켰다. 최고의 전문적 지식과 최고의 발랄한 아이디어를 네트워크를 통해 종합하여 공동의 삶, 공동행동의 자원으로 삼는 능력의 비약적 증가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휴대폰과 카메라, 노트북 컴퓨터와 결합된 ‘사이보그적’ 집합체가 대대적으로 생성되었다. 이는 아마도 이후 사소해 보이는 것조차 예민하게 감지하여 신속하게 대응하여 거대한 폭풍으로 만드는 거대한 증폭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이 모든 요소들이 ‘의식적 요소’, 조직적 요소와 결합하여 이용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대중은 흐름이기에 심지어 명시적 승리를 구가한 뒤에도 어떤 안정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넘들에게’ 그 활동의 성과를 찬탈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폭력투쟁에 대한 강박적 오해 또한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비폭력투쟁이란 폭력을 피하여 합법성의 성으로 도망치는 게 아니라 폭력에 맞으면서도 버티며 부당한 법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는 투쟁이란 점에서, ‘반폭력 투쟁’보다 더 가열찬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되지 않을까?


2008/08/07 14:03 2008/08/0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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