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
불안이 빚어낸 선제공격의 메커니즘―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

연구공간 '수유+너머' 오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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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군 특수부대_"폭력에 대한 국가의 독점 상태">

중국 베이징올림픽에서 수영 선수 박태환이 금메달을 땄다. 훤칠한 청년이 수영은 또 어찌나 잘하는지. 하지만 물속 화면에서 나오면 곧 엄청난 경계 태세를 실감해야 한다.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는 테러 위협을 빌미로 나토의 군사 활동이 개시됐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10만의 대(對)테러 부대와 50만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공안과 군 업무를 지원해 가며, 올림픽 주경기장 인근에 지대공 미사일을 배치했다. 전쟁기념관에 가서나 가까스로 볼 수 있을 미사일이 동대문 운동장 옆에 배치됐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의 적들이 올림픽 파괴 행동을 막기 위해 첨단 전투기는 물론, 헬기와 해군 함정(?!), 지대공 미사일, 생화학 병기(!!??)도 동원할 것” 톈이샹(田義祥) 베이징올림픽 보안협조팀 군대공작부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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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또는 홈리스_"타자와의 만남이 불허된 사람들">

에피소드 또 하나. 오랜만에 고등학교 적 친구를 만났다. 성남으로 이사했다는 그녀는 서울까지 올라오는 버스행도 머뭇거렸고 음식이며 거동을 하나같이 삼갔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의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다. 더 이상 홑몸이 아닌 그녀는 입덧 때문에 탈것이며 음식에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해가 질 무렵 우리는 조금 일찍 헤어지기로 하고 함께 서울역 광장 건너편에 있는 정류장을 향해 지하보도를 건넜다. 낮고 편안한 굽을 신은 친구의 발이 조용조용 걸음을 옮겼고 나는 신기한 듯 그 옆을 따르는데 별안간 친구의 발이 멈춘다. 저 멀리서 풍겨 오는 냄새. 어떤 이들과의 조우.

노숙인은 위험하다(?), 고로 테러리스트다(!?)

라면 박스 혹은 오래된 이불로 저마다 가까스로 누울 자리를 표시해 두고, 어떤 이는 앉아서, 어떤 이들은 두셋씩 종이컵에 소주를 기울인다. 계절을 알 수 없는 옷차림으로 가끔 이 편(혹은 허공)을 향해 훈계와 자조 섞인 조롱을 외쳐 대는 이들, 혹은 말없이 구겨진 신문처럼 찬바닥에 몸을 웅크린 이들. 노숙인이었다. 당시 그들은 모두 쥐죽은 듯 잠을 자고 있었지만 친구는 잔뜩 긴장했고, 2분이면 지나갈 지하보도를 무척이나 긴장된 마음으로 건너야 했다. 그들이 갖음직한 불만의 불똥이 언제 나에게 튈지 모르는 일. 이들은 언제 나에게 닥칠지 모르는 폭력의 상황을 조성한다는 점에서 중국이 색출해 내려 무던히 애쓰는 테러리스트와 닮아 있다.
“이런 이미지로 인해 ‘일반 시민’에 의한 폭력이나, 행정의 공정성 유무를 떠나 종종 폭력까지 동원한 국가의 노숙자 배제 행위가 정당화되기도 한다. (…) 폭력을 당하는 측에 힘의 우월과 폭력의 가해를 귀속시켜 버리는 ‘전도’…이 전도야말로 사람들을 쉽게 폭력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장치이다.(『폭력의 철학』, pp.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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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소한 "불안유발자"와 거대한 "안전장치"_어떤 것이 '폭력'인가?>

친구가 긴장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불안유발자들’이 모인 공간은 언제나 불안의 지대로 돌변했고, 어느덧 이들이 휘두를 (잠재적) 공격에 ‘선제공격’으로 응수하는 것이 용인된다.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상상적 전도. 불안유발자들은 이윽고 구타유발자들이 되었다. 헌데, 노숙인은 결코 폭력이 아닌데도 폭력적 위협으로 다가오지만, 베이징올림픽의 보안을 위해 등장한 미사일은 분명 거대한 폭력임에도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다. 조그만 주먹질이나 충돌도 폭력으로 비난받지만 보안 경비를 앞세운 위협은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카이 다카시는 『폭력의 철학』을 통해 국가가 점유하고 국가가 사용하는 폭력은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를 국가에 의해 폭력의 정의가 독점된 점에서 찾는다.

국가에 의해 독점된 폭력의 정의

“아예 상대를 정당하지 않은 존재로 매도하고 싶거나 범죄처럼 보이게 하고 싶은 정치적 활동에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바야흐로 폭력을 분석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용어이다”(같은 책, p.142)

그는 『폭력의 철학』을 통해 사람들이 오늘날 어떻게 공포를 공유하고 폭력을 정당화시키는지에 대해 말한다. 마틴 루터 킹과 마하트마 간디 등 흔히 비폭력 직접 행동의 상징인 인물과 함께 한나 아렌트나 니체, 푸코 등이 말했던 폭력의 입론들을 정리해 새로운 폭력의 지평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거대한 폭력수단을 독점한 자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실질적 운영자들이다. 폭력에 대한 정의 또한 국가가 독점한 상태. 냉전 체제가 종지부를 찍은 이후 이들의 절대악은 테러리스트와 바이러스로 옮겨가, 불안을 확산시켜 안전 사업의 막대한 수익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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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 상태_"목소리를 빼앗는 폭력, 불안을 내재화하는 폭력">

그런데 이들이 유통시킨 불안은 비단 그 엄청난 환전성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을 집합적 공허감과 나약함의 감정으로 조장한다. 푸코의 말처럼 감옥은 최종적으로 수감자를 줄이지 못했지만 범죄자 단속을 용이하게 만들었다(“감옥은 실패함으로써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유포된 도덕적 공황 속에서 강화된 반테러리즘은 결코 테러리스트를 근절하지 못한 대신, 국가나 권력에 저항하는 목소리의 단속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불안을 부추기는 이들은 모두가 테러리스트가 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도덕적 근본주의이다. 도덕적 근본주의는 타협이 없다. 절대악은 오로지 뿌리를 뽑아 없애야 한다. 그런데 이 절대악의 기준은 도덕이라는 잣대로 판가름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의적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노숙인은 사라져야 한다. 태만한 그들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니까’. 이는 비단 노숙인에 그치지 않는다. 미혼모와 알콜중독자, 혹은 불법이민, 학교중퇴자처럼 한없이 이질적이고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은 모두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존재 자체가 사회에 무익한 자들. 산업예비군도 될 수 없고, 그래서 착취도 당할 수 없는 이들은 상상적 전도로 인해 사회에서 매장된다. 바야흐로 ‘빈곤자의 범죄화’가 진행되는 것이다.(『자유론』, pp.285~286)

“적대성 자체, 즉 ‘정치적인 것’ 자체가 테러리즘으로 불리는 추세가 되어 버렸다”

이 도덕적 잣대의 자리는 ‘민중의 지팡이’, 곧 경찰이 차지한다. 경찰은 ‘시민’의 ‘안전’이 위협되는 곳 어디에나 개입할 수 있게 된다. 폭력의 정의가 국가에 의해 독점되었다는 저자의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저자는 이 과정을 미국의 정치학자 셸든 월린의 말을 빌리면서 오늘날을 ‘역전체주의’의 시대로 규정한다. “역전체주의는 정치적인 동원 해제와 투표의 기권을 요구한다”(p.131) 이 과정에서 억압적 권력에 맞선 갈등이나 마찰이라는 적대성 자체, 즉 ‘정치적인 것’ 자체가 테러리즘으로 불리는 추세가 되고만다(p.164). 사람들은 무력함 속에서 국가와 경찰에 종속되기를 스스로 원하며 ‘정치적인 것’을 기권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기업과 국가 권력의 결탁으로 불안과 안전을 받아들이며 나날이 쇠약해지고 있다.

저자가 볼 때 이러한 상황은 냉소주의로 밑도 끝도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순환을 끊어낼 해결의 단서는 국가가 독점한 폭력에 대한 정의를 되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다.”

메를로 퐁티의 말을 인용하며 사카이 다카시는 저들의 기준에 의한 폭력과 비폭력이 아니라 적대성, 정치적인 것의 표출로서의 반폭력을 주장한다. 반폭력은 불안과 안전의 소비자로 전락한 사람들이 냉소주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한 실천의 첫걸음이다. 노숙인을 위협적 존재라 느낄 때 우리는 주변의 경찰부터 찾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경찰에 의존함으로써 우리는 더 큰 폭력을 허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많이 돌아왔다. 말도 너무나 거창하게 번진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 점 하나만은 친구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뱃속 아이에게나 오늘을 사는 친구 자신에게나.

사카이 다카시에 대하여
사카이 다카시酒井隆史는 현재 오사카여대에서 사회학 관련 강의를 하고 있고, 일본어로 『부정적인 것과의 체류』(슬라보예 지젝)와 『제국』(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을 번역했다. 폭력·다중·안보·공포·생명정치 등의 키워드로 현대 사회를 분석한 글들과 새로운 운동의 전망을 제시한다. 책으로는 『폭력의 철학』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으며 그에 앞서 지은『자유론』은 현재 그린비에서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폭력의 철학』이 다양한 인물의 폭력에 대한 입론을 그 나름의 하나의 맥락 안에 읽기 쉽게 정의했다면,『자유론』에서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국가적 폭력, 시장의 폭력 등 비가시적이지만 우리 생활과 너무나 밀접해진 폭력에 대해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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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3 12:16 2008/08/13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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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잉이 2008/08/13 17:08

    폭력, 더 큰 폭력, ㅋㅋ 이 글 읽고 이 개념들이 더욱 선명해졌군~~ㅋㅋㅋ 중국 올림픽 예는...ㅋㅋㅋ 중국인으로서 ㅋㅋㅋㅋ 적절한 예가 될수 있을까?ㅋㅋ함 생각해봅시당~

    • 그린비 2008/08/13 17:43

      잉이님 안녕하세요. 생각해보겠습니다!! ^^*

  2. ykilhyun 2008/08/14 12:06

    여전히 우리는 19세기 언저리를 헤매고 있는 셈이지요... 여전히...

    • 그린비 2008/08/14 14:33

      ykilhyun님 안녕하세요. ^^
      어떤 의미에서 '19세기 언저리'인지 궁금합니다.
      글의 내용으로 보면,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 체제와 '폭력성'에 관한 문제인데, 이는 21세기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말입니다.

    • 수욘 2008/08/16 12:11

      19세기..
      공황이라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어서
      국민국가가 제국으로 변모함으로써 자본의 위기를 넘기려했던
      그 극단적 폭력성이
      21세기에도 신자유주의와 국가체제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ykilhyun 님이 그런 댓글을 단 것으로 생각합니다.

    • 그린비 2008/08/18 09:52

      수욘님 안녕하세요.
      답변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사건의 키는 ykilhyun님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