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나오는 판은 동일하며 같은 판에서 동시에 나온 책들도 동일하지만, 한 종의 대표자들은 공간의 다양한 점들 위에서든 시간의 다양한 순간들 위에서든 결코 완벽하게 유사하지는 않다. 그것은 형질들을 변형시키는 약동도 역시 전달하며 이 약동이야말로 생명성 자체이다."
(앙리 베르그손,『창조적 진화』p.346)

가만히 있어도 더위 때문에 기운이 좍좍 빠지는 이 여름에 '무려' 베르그손까지 인용해가면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내 손에 들려있는 바로 그 책"의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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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동영강 강의 2강을 인코딩 중인 컴퓨터. 그 앞에 놓여있는 『창조적 진화』. 역시 『열하일기』는 이런 식의 온갖 '마주침'들을 만들어 내는 텍스트인가 봅니다. ^^
(저 때 작업한 동영상 강의는 오늘 오후에 업로드될 계획입니다.)

어제 오후, 동영상 관련 작업 중에 잠시 짬이 나『창조적 진화』를 읽다가(동영상 작업을 하다 보면, 렌더링이다, 인코딩이다 하면서 대기시간이 무지하게 깁니다), 눈에 번쩍하고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으니, 바로 위에 인용한 저 구절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출판사'에 다니다 보니 '책'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눈을 깜빡, 귀를 쫑긋하게 되는데요. 17-18세기 독일로 넘어간 철학의 주도권을 프랑스로 되돌려놨다는 그 유명한 철학자님의 책에 '책' 이야기, 그것도 그린비 블로그의 '출판 편집 이야기'에나 실릴 법한 문구가 있으니 어찌 관심을 곧추세우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한 권의 책은 적게는 1000권, 많게는 수만 권 정도 되는 형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쇄에서 그 많은 책들을 찍어내는 것이죠. 하지만 그 책들은 "결코 완벽하게 유사하지는" 않습니다. 완벽하게 똑같다면 우린 그것들을 구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식별불가능자 동일성의 원리'에 의거해서 말입니다. -_-;). 그렇게 같은 인쇄판으로 찍은 책들이 서로 다른 이유는 책으로 전해진 '형질'들이 제각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세상에 완전하게 같은 것은 없습니다. 베르그손은 그런 '다름'이 바로 생명의 본질이고, 그것을 '생명의 약동'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각각의 다름이 여러분 각자의 손에 들려진 그 책의 '특별함'을 말해 줍니다. 내용은 같더라도, 그 책은 유일한 책인 것이죠.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형태나 아주 미세한 차이를 두고 다르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저 구절에서 멈춰서 형광펜을 빡빡 그어 놓은 이유는, 저기서 말하는 '약동'이 단지 형태나 모양의 차이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기서 한발 더 나아가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한 권의 책, 어떤 생명체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약동'이 야기하는 타자들과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책 속에 인쇄된 글자들은 다른 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표지나 책등 역시 그 책을 다른 종이뭉치들과 구분함으로써 그 책을 바로 그 책이게끔 합니다. 이렇게 어떤 존재자에게는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짓는 차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들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본래 자신의 '정의'와는 다른 '의미'를 창출해 내는 것이죠.

책이 맺는 가장 중요한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그건 다름 아니라 여러분, 그러니까 독자와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글자들끼리 맺는 관계 속에서 떠오르는 '의미'가 '의미'일 수 있으려면 그것을 읽어 내는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그때의 의미는 독자의 사유를 펄떡거리게 만드는 '생명의 약동' 그 자체가 되는 것이구요. 이런 점에서 각각의 책은 '관계' 속에서 특별해집니다. 나와 내 친구가 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서로 받아들인 의미는 완전히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 책과의 관계맺기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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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펜에 연필, 포스트 잍까지. 이 작위적으로 보이는 자료사진은 실제 저의 책입니다.
정말 저는 많은 줄을 치면서 책을 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린비'에서 나온 책들이 막 다뤄지면서도, 세심하게 다뤄지길 원합니다. 모순되어 보이는 이 말은 사실 같은 말입니다. '막 다뤄진다'는 것의 의미는 밑줄을 긋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페이지의 모서리를 접어 놓는다거나 하는 것입니다. 책을 저렇게 '막 다루는 것'이 책을 가장 세심하게 다루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책 속에서 '의미'를 채취하고, 그 의미들을 친구와 함께 나누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 약동의 기운이 막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그리고 그 기운이 이곳, 저곳으로 전해지는 것이 바로 책의 '생명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저도 지금 베르그손의 한 구절에 의미를 부여하고, 여러분께 전함으로써 그 책의 생명력을 더 키워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고전'이 그러지 않겠냐만서도, 『창조적 진화』는 정말 생활에 바로 적용해볼 수 있는 요소들이 참 많습니다. 위에 인용한 저 구절도 그렇고, 우리 삶이 매순간 창조의 순간이라고 말하는 부분도 그렇고, 삶의 '긍정성'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책읽기를 통해 새 의미를 창조하는 것처럼, 매 순간의 삶을 창조하는 이 약동, 이 약동 속에는 조금의 슬픔이나, 불안도 없습니다. 그저 생동하는 기운을 느끼고 바로 그 시점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 웹기획팀 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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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4 11:04 2008/08/1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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