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 잃은 세계에선 캐릭터만이 소비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아즈마 히로키 지음·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오늘 인사시켜 드릴 책은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라는 부제를 단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입니다. 오타쿠 문화를 소재로 20세기 후반 일본 사회의 정신구조를 분석하려 시도하면서, 그것을 A. 코제브(Kojève)의 ‘동물화’ 개념, 그리고 ‘서사의 상실’이라는 서사(역사) 속에 포스트모던 현상으로 설명하는 책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좀 어렵다고요? 물론, 저한테도 그랬답니다. 그래서 소개시켜 드리자니, 거, 참, 흠흠, 너무 진지하고 딱딱한 책으로 보일까 봐 걱정입니다(사실 그 정도는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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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상실'을 포스트모던적인 현상으로 설명하는 책.

그러니 책의 세부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서 어떻게 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잠시 배경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시작은 이랬습니다. 술자리 수다 중이었습니다. 아마 제가 작년 여름 「노다메 칸타빌레」의 케이블 채널 방영 이후 몇 편 집중해서 본 일본 드라마는 모두 “자기 일을 정면으로 대하는 일”을 다루더란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치아키 센빠이’가 노다메에게 악보 속 음표 하나하나에도 다 뜻이 있다며, 겉인상으로만 보지 말고 작곡가와 제대로 사귀어 보라고 권했을 때처럼 말입니다. 6년차 편집자로서 매너리즘과 싸우는 일이 일상인 저에게는 꽤 중요한 화두였거든요. 그런데 친구는 일본 사회의 그런 면모가 사회 변동을 억제하는 요소가 아닌가 하는 의견으로 대화의 성격을 전환했습니다. “왜 일본 사회는 그리 변하지 않는가?”라는 아주 진지한 고민이었지요. 전 별 생각 없이 작년 여름 5박6일짜리 간사이 관광에서 받은 단순한 인상대로 대답했습니다. “전통의 뿌리라 할 천황제가 폐지되지 않은 나라가 어떻게 바뀔 수 있겠어? 일본에서 전통이란 분명 한국 사회에서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닐까(게다가 장사가 되기도 하고)? 한국처럼 왕조가 폐지되고, 전국적인 전쟁으로 인한 단절은 없잖아. 그러니 다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 안에서 어떻게 그 소명을 잘 받아들일까를 고민하지 않는가 하고. (……) 한국 사회에는 자기 일에 관해 그만큼 진지한 의식이 부족한 듯도 싶어”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 자체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자기 일을 꾸준히 해나가기가 어려운 건데… 갑작스런 대화라 그때는 그런 생각까진 못했군요.) 어떤 사회가 내적으로 변동 자체를 가로막는 기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안정되어 있다는 것과 좀 다른 의미일 텐데… 여하튼 그 순간 제 대답은 친구가 찾던 대답에는 지나치게 단순무지(?)한 것이었고… 대화는 곧 딴 데로 흘러갔습니다만, 확실한 대답을 못 줬다는 생각에 역쉬~ 공부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요. 그러다가 서점 인문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제법 말랑말랑한 주제로 비슷한 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냅다 사들였습니다(알고 보니 친구는 이미 읽었더라고요. 그러니 친구에겐 더 해줄 말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지요? 배우면 남 주라고. 그리하여!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게 되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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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시대 '영웅 서사'의 주인공인 '전쟁 동물'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를 채운 '데이터베이스적 동물'

저자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는 우선 전후 일본 문화에서 오타쿠 문화 그리고 오타쿠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꼼꼼히 설명합니다(낯선 오타쿠 문화 관련 용어도 뒤쪽에 꼼꼼히 미주로 달려 있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리오타르(Liotard)의 포스트모던 이론을 약술합니다. 근대(모던)는 민족국가라는 공동체의 환상 속에 스스로를 영웅시하는 주체의 서사에 의해 그 힘을 얻었지만, 세계대전 이후 거대 서사는 힘을 잃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세계의 공통점이란 (거대 서사 밑에 자리한 존재 자체가 아니라) 시뮬라크르, 즉 투영된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것이라 할 텐데요, 저자는 이것을 오타쿠 문화를 통해 예증합니다. 오타쿠들은 (특정한 정신/역사를 구현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잘게 나뉜 ‘데이터베이스’에서 매력 있는 요소들만이 조합된 ‘캐릭터’를 소비합니다. 즉각적인 욕구 충족이지요. 오타쿠들이 온라인이나 동호회 등에서 보이는 적극적인 사회성도 사실 알고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작품/캐릭터에 관한 정보 교환만을 목적으로 하는 매개적 사회성이라는 것이지요. 저자는 이들을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이라는 새로운 인간상이라 칭합니다. 이 같은 분석을 위해 지은이는 벤야민의 탈아우라론, 코제브의 동물화와 스노비즘 이론, 지젝의 욕망과 소통 등에 관한 철학적 문제의식을 나름대로 소화해서 인용합니다(사람 마음이 참 이상한 것이, 그리 쉽지 않은 논의들인데도 만화나 아니메를 소재로 한다 하니까 웬지 좀더 이해하기 쉬운 것처럼 느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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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베이스화된 케릭터를 연기하는 '리얼' 버라이어티쇼.
현실 세계의 우리 역시 '캐릭터'를 연기하는 삶을 산다는 점에서, '리얼'이라는 말은 매우 합당합니다.

오타쿠 문화나 만화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책을 읽다 보니 주말에 종종 보곤 하는 예능 프로그램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방송계에선 ‘예능이 대세’라고 합니다. M본부의 <무****>은 멤버 한 사람의 입대 후 전체 프로그램의 균형이 깨졌다는 둥, S본부의 <패*** 간*>는 남녀 혼성MT의 아기자기함을 잘 살렸고, K본부의 <1*2*>은 남학생만 있는 시끌벅적한 MT 같다는 둥의 비평도 나오지요. 프로그램의 성격만 비교하는 게 아닙니다. 각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캐릭터(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프로그램들은 사실 리얼하지 않습니다. 인물 각각이 미리 정해진 성격을 상황에 맞추어 반응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간의 비교도 등장합니다. 한동안 버럭 소리를 지르고, 상대방이 상처를 받던 말던 막말하는 인물이 인기를 얻었다면 요즘에는 완벽한 외모를 갖추고도 남에게 질 줄 아는 착한 인물들이 호감을 끈다 합니다. 이른바 TV 평론가(혹은 미디어 비평가)라는 이름을 새로 얻은 TV 마니아들이 써 내려가는 프로그램 평가의 기준입니다. 내용이 얼마나 참신한지, 진정성이 있는지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요소를 갖춘 캐릭터가 더 매력 있는지, 어떤 캐릭터와 캐릭터가 조합되고 충돌하면서 예능 프로그램의 진화를 이끌고 있는지, 예능 프로그램에 첨가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데이터베이스가 되어 프로그램 안에 버무려집니다. 5초 안에 웃기지 못하면 채널이 돌아간다는 예능 프로그램의 특성은 ‘복잡한 세상사 잊고, 무조건 웃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을 당장 채워 줘야 하는 데 있습니다. 소비되기(시청률 상승) 위해서 혹은 소비를 부추기기(CF 계약) 위해서 매력 있는 캐릭터들이 나와서 전후맥락 없이 뭐든지 할 수 있는 키치의 세계, 바로 예능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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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이산』과 일본 KOEI사의 게임 『삼국지』
화면상에서 인물들의 배치와 구도가 비슷한 만큼이나 드라마도 게임의 구조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예능 프로그램만이 이러한 소비적 생산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대장금」과 「이산」 같은 드라마는 롤플레잉 게임처럼 매회 정해진 세팅 위에서 적당한 미션과 해결이라는 자극과 해방감을 선사합니다. 등장인물의 행위에 정당성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보는 사람의 취향만 중요합니다. 네이버 메인에 잡히는 블로그들을 보십시오. 내용과 상관 없이 본인 취향대로 골라진 목록만이 존재합니다. ‘연상연하 커플’, ‘꽃미남’, ‘추리소설’, ‘배우 **가 나오는 영화’ 목록. 바로-거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판타지를 채워 주는 목록입니다. 외관의 가면 아래 판타지를 키워 가는 동안, 취향의 탐닉은 탈결험적인-일탈의 세계를 경험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입니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가상 결혼 프로그램이 서로 다른 개성의 부부를 등장시켜, “결혼이란 이런 거야”가 아니라 ♩♪이 사람이랑 결혼하면 이렇게 살면 되고, 저 사람이랑 결혼하면 저렇게 살면 되고♫♬처럼 내 마음에 드는 대로 선택해서 좋아할 수 있게 하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충족되는데, 우리의 결혼 문화 뭐 바꿀 거 있겠습니까?

사는 데 꼭 거대한 서사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 거대한 서사 땜문에 인간들, 그동안 참 못할 짓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사 자체가 폐기되어야 할 것은 아닙니다. 요새 개봉한 영화 「월-E」에도 나오지만 모든 욕망이 발현되는 즉시 채워지는 사회란 인간을 참 인간답지 못하게 만듭니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상상은커녕 자그마한 변화에도 허둥대게 만들지요. 삶에는 이야기/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역사는 자기의 실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제'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지지난 주말 모처럼 집에서 쉬는데 올림픽 중계 때문에 즐겨보던 드라마가 결방되자 안절부절 못하더군요. 몇 시간을 그리 초조하게 보내다가 일단 TV 앞을 떠나야 할 것 같아 갑자기 춘천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 덕분에 오며 가며 기찻간에서 사놓고 읽지 못했던 이 책을 겨우 읽게 되었답니다.- -;; (TV/익숙함을) 떠난 덕분에, 이렇게 여행도 하고, 책도 읽고, 여러분께 해드릴 이야깃거리도 생긴 것이지요. 주절주절 수다가 참 길었습니다. 그 수다 속에… 이 책이 읽고 싶어지셨는지요?

- 편집부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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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6 16:51 2008/08/2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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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꽁폭풍 2008/08/27 09:23

    꼭 읽어봐야겠는걸요. 데이터베이스적 인간...이라는 개념이 요즘의 의문에 해답을 주었어요...

    • 그린비 2008/08/27 11:05

      안녕하세요, 까꽁폭풍님.
      어떤 의문을 품고 계셨을까요 궁금해지네요. 그래도, 해답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
      의문을 품고 그것을 풀고 또 의문을 품고 풀고 하는 과정이 반복되는게 공부고 삶이겠죠?

  2. 명승 2008/08/27 13:51

    오타쿠 문화에 대한 고찰이라...읽어봐야겠어요.

    • 그린비 2008/08/27 14:25

      명승님 안녕하세요! 오타쿠 문화에 관심이 많으시면「월관의 살인」이라는 만화도 함 보셔요. 재미있습니다.
      관련 포스트 http://greenbee.co.kr/blog/155

  3. 명승 2008/09/03 00:19

    월관의 살인 샀습니다. 이웃 블로거님이 리뷰를 했던 건데

    그분은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웃기다니 좀 그렇다고 하시더군요,

    근데 여기서 리뷰 보니까 읽어야 할 듯 해서 샀답니다.

    읽는 일만 남았군요.

    아, 재은님의 이 글 제 블로그로 담아갈게요^^

  4. 주먹쥐고일어서 2010/08/24 12:51

    흥미가 있는 책이군요..한국이라면 읽어보고싶습니다.( ̄▽ ̄)

    • 그린비 2010/08/24 14:07

      주먹쥐고일어서님 반갑습니다!
      예전에 본 <늑대와 춤을>의 여자 주인공이 떠오르네요. ^^;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

  5. 주먹쥐고일어서 2010/08/24 16:25

    네,저도 그 <늑대와 춤을> 즐겁게 봤던 기억이 떠올라서 닉네임으로 정했답니다^^
    10월에 한국가는데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린비 2010/08/24 17:16

      아하! 역시 영화 속 '주먹쥐고 일어서'와 관련이 있었군요!
      서울은 비로 더위가 조금 가셨는데, 일본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건강히 한국에 오시면 좋겠네요. ^^

  6. 주먹쥐고일어서 2010/08/24 17:34

    일본은 푹푹찌는 더위입니다( ̄Д ̄;;
    감사합니다.2년만에 가는거라 고국인데도 많이 설레어집니다.
    그럼 그린비님도 좋은 하루되세요(*^-゚)/~B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