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체계의 외부는 없다!  "오래 사는 병자들의 사회"


- 연구공간 '수유+너머' 권은영

“너는 어떤 소일거리의 한복판에서 질병과 죽음이 우리를 사로잡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단 말인가? 질병과 죽음은 노동 속에서 노동자를 사로잡으며 항해 속에서 선원을 엄습한다. 너는 어떤 일을 하는 와중에 질병과 죽음에 의해 사로잡히기를 원하느냐? 왜냐하면 어떤 일을 하는 와중에 죽음이 너를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이지. 네가 그렇게 할 수 있고(죽음에 의해 사로잡힐 수 있다면), 또 현재의 자신의 일보다 더 나은 자신의 일을 실천중이라면 그렇게 해라.”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중에서)

건강하기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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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건강을 만들어 내는 대한민국 건강 프로그램의 자존심, <비타민>
'위대한 밥상' 코너에 등장한 식품은 다음 날이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간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왠지 나에게 찾아올 것만 같은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1억짜리 보험에 가입하고, 매주 의학토크쇼를 시청하고, 매일 비타민, 철분, 오메가3를 먹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더 이상 우리는 ‘질병’을 고치는 목적으로만 약을 먹지 않으며, 아프지 않아도 병원에 간다. 병원과 의학적 지식은 지금보다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 삶의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우리는 ‘건강’이라는 정상(正常)에 더 다가가기 위해 의학 지식에 귀 기울이고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소비한다. 정상적인 범위의 체중을, 정상적인 범위의 간 수치를, 정상적인 범위의 혈압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건강식품을 소비하고, 운동기구를 구입하고, 정기검진을 받는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 계속해서 약이 개발되고 병원이 생겨나는 것에 비해, 질병의 수는 전혀 줄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에는 질병이 아니었던 것들이 질병으로 변환되는 경우도 있다. 비만이 어느새 질병이 되어 버린 것처럼. ‘건강’의 지대는 점점 좁아져, 우리는 질병을 밟지 않고는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건강을, 정상범위를 설정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우리는 이렇듯 나약하게 혹은 당연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

의료의 외부는 없다.

위 질문에 대한 답은 때로는 명확하게,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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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영화 <괴물>에서 강두(송강호)
의학과 국가의 거대한 권력 체계에 안에 갇힌 '야생적 신체'. 의료 체계 외부로 나오는 순간 포획되는 신체. (관련 포스트 바로가기)

현재 ‘건강’을 설정하는 중심적인 주체는 당연히 의학 권력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의학 권력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와 국가 권력 역시 ‘건강’을 적극적으로 필요로 한 당사자였다. 그들은 의학 권력과 함께 ‘건강’을 과학적이고 필수적인 담론으로 탄생시켰다. 국가는 국민의 체력, 노동력 및 생산 능력, 군사력 보존을 위해서, 자본은 튼튼한 노동력과 시장에서 ‘건강’을 구입하는 소비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건강을 떠들어 댈 필요가 있었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집단은 제약회사들이다. 개인들이 자기 건강을 보장받기 위해 시장에 그리고 국가에 지불한 돈은 대부분 거대 제약회사들에게 흘러들어간다. 사람들이 건강을 욕망하며 의료 서비스와 약에 돈을 지불하면 할수록 건강해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제약회사들이고 그를 둘러싼 자본주의 논리이다. 그리고 국가와 의사 집단들은, 개인의 질병에 대한 불안과 건강에 대한 욕망을 제약회사와 연결해 주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 확장해 간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건강’은 국가, 자본, 의학의 합작품 ― 영향력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 임이 명확한 듯하다.

이 명확함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 현실에서 국가, 자본, 의학이라는 거대한 권력체계가 합작으로 만들어 낸 건강 담론이 너무나 당연하게 일상에 녹아 있어 저항할 수나 있을까라는 답답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의료의 특징이 탄생한 18세기 이래로, 의료의 영역은 사회 구석구석 외부를 남기지 않고 확장되었다. ‘건강’이라는 명목 하에 질병, 위생, 다이어트, 생활양식, 일, 주거 조건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의료화는 말 그대로 의료 바깥은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다. 병원에 가고 약을 복용할 때는 물론 음식을 먹고 화장실에 가고 공부를 하고 잠을 자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건강’에 얽매인다. 어떤 행위를 하던 우리는 ‘이거 건강에 안 좋다더라 혹은 좋다더라’를 고려한다. 글로 쓰고 책으로 읽으면 우리를 ‘건강’에 매달리게 하는 것은 국가, 자본, 의학 권력임이 명확하게 보이고 이것들을 공격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현실에서 ‘건강’을 보여 주고 설득하고 파는 주체는 그렇게 명확하지도 구분되지도 않는다. 어디까지가 국가, 어디까지가 자본 권력인지 또 어디까지가 나의 의지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 두번째 이유가 있다. 제한 없이 퍼져 나가는 의료 영역에 비해 저항의 주체는 한없이 나약해지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의료 서비스를 구매하는 개별화되고 파편화 된 개인들은 이 ‘영구적이고 부단한 지배’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질병에 대한 불안이며, ‘건강’에 대한 욕망이다. 당연히 불안과 건강을 만들어지는 곳도 의료 영역이며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곳도 의료 영역이다. 보험을 가입하고, 건강식품을 구입하고, 의학 프로그램에 귀 기울이는 개인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합리적으로 건강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김없이 자신보다는 제약회사, 의사 집단들을 더 건강하게 만든다. 개인은 의료 영역에서 궁극적으로 건강에 도달할 수 없다. 의료 영역은 건강에 대한 환상을 제공할 뿐 진짜 건강을 제공하지 않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공할 수가 없다. 그것은 자신을 병들게 할 것이므로.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몸, 자신의 욕망,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능력을 점점 상실한 채, 오래 사는 병자가 되어 가고 있다.   
 
‘건강’을 넘어 ‘자기배려’로

문제 설정을 좀 다르게 해보자. 여러 권력의 마주침에 의해서 완성된 ‘건강’은 시작부터 끝까지, 살아 숨 쉬는 신체의 외부에서 설정되었다. 따라서 건강을 향한 욕망 역시도 결핍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건강은 외부에서 지식을 얻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구입하지 않으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결핍감으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건강이 무엇인가,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건강을 욕망한 적이 있었는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신체를 통해 발현되는, 신체와 떨어질 수 없는 건강을 신체의 외부로부터 얻는 다는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것은 마치 푸코가 언급한 근대의 주체화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와 흡사하다. 고대인들에게 주체화는 자기 내에서 행동과 사유 간의 곧은 관계, 즉 행동을 통해 자기 철학의 곧음을 이해시키려는 과정이었다면, 근대인들이 주체로서 자기를 구축하는 과정은 실제의 나와 생각 속의 나 사이의 간극을 줄이려는 데에만 골몰하는 한없는 자기 인식의 시도였다. ‘자기 배려’로 표현할 수 있는 고대인들의 삶의 방식은 스스로 자신의 육체에 적절하고 필요 충분한 배려를 하는, 즉 일상생활을 총괄하는 배려이다. ‘삶의 일상적인 대다수 활동들을 건강과 도덕의 관건으로 삼으려는 배려, 육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요소들 사이에 상황적 전략을 규정하는 배려, 종국적으로 개인 자신을 합리적 행동으로 무장시키기고자 하는 배려’이다. 자기 배려의 주체는 근본적으로 참된 인식의 주체라기보다는 곧은 행동의 주체이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완성해야 하는 주체는 신체와 떨어져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신의 모습을 빌려, 국가의 모습을 빌려, 자본의 모습을 빌려 완벽하고 강하며 매력적인 모습으로 표상된다. 당연히 개인은 이상적인 주체와 자신과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골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신의 현재와 삶을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그런 삶에 익숙해져 ‘어쩔 수 없지 않냐’를 외치게 만드는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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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자 밴덤이 설계한 '판옵티콘'
중앙의 감시탑에서 보면 사방을 다 감시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감시망이 작동하는 순간,
주체의 의식이 자기 자신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자본, 국가, 의학 권력의 판옵티콘에 갇힌 우리.
이미 스스로를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율적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을 정립시키는 데 무엇이 더 이상 필요치 않느냐를 밝히는 작업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건강’이다. 그들이 말하는 ‘건강’을 얻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이 불필요한 것들을 우리 삶에 올려 놓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주체의 해석학』에서 에픽테토스의 목소리를 빌려 푸코가 우리에게 말한다. ‘죽음의 순간에 하고 있을 수 있는 일보다 더 훌륭하고 도덕적으로 더 가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선택해야 하며, 그래서 결국 매 순간 죽기 위해 최상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가. 미래를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매 순간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가. 제한 없는 의료 영역에서 국가, 자본, 의학 권력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삶을 갉아먹는 불필요한 ‘건강’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말이다.

자기와 최상의 관계를 맺자.

삶을 살아가고 세계를 바라보는 데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난 후에, 고대인들 마냥 우리는 더 신중하고 치열하게 우리의 신체, 행동, 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기후와 계절, 지역의 고유한 특성 등의 상황에 자신의 행동을 맞추고, 적절한 자기 배려를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하고 설득을 당하기도 하며 그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세심한 주의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명상(훈련)을 통해 현재의 가치를 파악하고 절단적 시선(결정적인 선택)을 자기 삶에 던져야 한다. 이 과정은 질병을 피하거나 예방하는 것이 아니다. 더 잘살기 위해서 또는 적절히 타인들을 지배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와 최상의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 다른 어떤 것의 지배나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신체, 정신, 나를 둘러싼 환경과의 최상의 관계를 위한 맺기 위한 배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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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3 10:42 2008/09/0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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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훈호 2008/09/03 13:10

    좋은 글입니다. 네..

    • 그린비 2008/09/03 13:16

      안녕하세요, 이훈호님.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