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를 위한 욕망의 실천 보고서
- 『코뮨주의 선언』과 『동무론』, 우정과 기쁨의 실천 윤리를 위하여


연구공간 수유+너머 곽소현


무엇이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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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잘나가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개'가 되기도 하는 우리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

밤마다 걸으며 보게 되는 서울의 밤풍경은 한마디로 ‘술취한 자들의 천국’이다. 낮에는 폼나는 옷차림에, 상쾌한 미소를 얹어 유능한 셀러리맨, 잘나가는 인간임을 과시하던 우리들. 그러나 밤만 되면 술 취한 개처럼 길거리를 헤매고, 인도를 침대삼아 쓰러져 자는 또 다른 우리의 이면. 술주정에 묻어나는 한탄과 원망, 그 공허한 절망의 외침은 도대체 누구를 향해 있는가? 첨단 기술 문명의 정교한 장치들이 일상을 더욱 매끄럽게 진행시키는 동안, 그 흐름의 시공간을 사는 우리는 천사의 미소로 보낸 낮의 이면에 악마적 광기를 예비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 근대인에게 가정은 더 이상 우리가 그리던 따뜻한 고향, 편안한 쉼터라는 환상적 표상에 부응하지 못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견딜 수 없게 하는 지점. 가족이 더 이상 쉼터가 될 수 없으며, 이성적 사랑으로 개인의 고독감을 해소하기 힘들고, 학교와 직장이 더 이상 자기 욕망의 이상적 실현태가 되지 못하는 지점. 이러한 심리적 한계들이 근대인의 삶을 불안으로 내몰고, 심리적 벼랑 끝에서 추락의 악몽을 경험하게 한다. 탈주에의 욕망, 전복적 사유의 출발점은 근대적 삶이 야기하는 불안한 개인들의 절망에 기초한다. 어떻게 우리는 이 불안과 절망의 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근대적 주체 죽이기

근대인의 심리적 불안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다시 말해 근대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특정한 ‘동일자적 자아’를 가진 개인적 주체로 규정함으로써 그에게 근대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부여하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가 지도록 한다. 이데올로기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실체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동일자적 개인’에 있다. 태어나자마자 동사무소로 달려가 기입하는 출생신고, 성년이 되면 내 존재를 숫자로 국가 장부에 기록하는 주민등록증, 입영통지서, 결혼신고, 건강보험, 사망신고까지. 근대인의 삶은 철저히 코드화되어 있으며 국가의 호출에 언제든 응답할 수 있도록, 일련번호와 날짜를 단 번호표를 가지고 있다. 근대 국가가 원활히 기능할 수 있는 힘은 이처럼 인간을 근대적 주체로 코드화하고 책임을 묻는 작동방식의 정착화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와 그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들은 이미 코드화된 자극들을 욕망하도록 우리를 길러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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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욕망' 대부분은 사실 코드화된, 어떤 의미에서는 주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회가 원하는 것을
원하도록 '길러'지기까지 한다. 그런 점에서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뭐야?"라는 질문은 늘 당혹스럽다.

근대적 사회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욕망의 외부를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리고 그런 것들을 생각할 여유를 갖고 있는가? 근대 사회의 체제들은 우리에게 그러한 사유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신문, 잡지, TV, 라디오, 광고 등의 현대적 미디어는 기존 사회가 요구하는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도록 교육하는 이데올로기적 매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어진 욕망과 자극들에 이끌려가도록 코드화되지 않고, 새로운 자유, 새로운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여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코뮨주의 선언』과 『동무론』은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주체로 살아가기를 명받은 개인과 그러한 개인이라는 동일자적 주체를 근거로 펼쳐지는 근대인의 생활양식에서 탈주하려는 시도다. 단순하게 말해서, 이들이 지향하는 공통적인 삶의 목표는 행복이다. 그리고 행복을 향한 첫 출발점은 고립되고 원자화된 근대적 주체 죽이기다. 근대적 주체로 호명된 개인이 근대적 사회의 코드화된 질서 위에서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면, 그러한 주체라는 환상을 죽여야 한다는 것. 주체성의 환상에 사로잡혀 코드화된 삶의 허울을 벗기는 것. 그리하여 다른 삶을 꿈꾸고,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는 가능적 자신을 스스로의 삶을 통해 창출해야 한다는 것. 이들의 대안적 삶의 행로는 이 같은 문제의식과 지향점을 그 실천의 공통적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탈주의 가능성: 우정의 정치학과 동무-되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안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그려가기. 『동무론』은 그것의 방법론을 ‘새로운 관계의 양식 만들기’, 새로운 ‘동무’의 관계 만들기로 일구어 낸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서 새롭게 변해가는 낯선 자신을 경험하며 살아가기를 요구한다. 김영민에 따르면, 동무란 같은 것(同) 이 없는(無), 따라서 서늘한 관계다.

‘동무를 사귀는 일은 그 위험한, 없는, 미래적인 존재양식에 나를 견주어 겹치는 일이며, 그래서 나를 재조정하고 재구성하는 계속적인 과정. 그 끝없는 고쳐 말하기, 고쳐 던지기, 그 섭동의 실존적 조형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같은 관습에 몸을 의탁하는 짓으로써 상식과 도덕의 알리바이를 내세우지 않는 관계, 이념과 진보를 빌미로 같은 언어와 사정(私情) 아래 결집하지 않는 관계를 뜻한다. 동무는 체계와의 창의적인 불화를 통해 ‘위험한 삶’을 일상화하고, 그 위험이 유혹하는 전염의 자장 속, 그 열린 동무의 지평 앞으로 나를 호출해서 내 삶의 양식을 그 근간에서 뒤흔들어 보는 재조합, 재구성의 실험이며, 해체와 갱생의 경험이다. 그래서 동무로서의 나는 끝없이 ‘넘어가는 존재’, ‘전염시키는 존재’,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표준화한 위성(衛星)들을, 그들의 백귀야행(百鬼夜行)하는 인정투쟁과 냉소와 가족주의를 섭동시키는 존재다.’(『동무론』, 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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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공통된 사건을 구성하는 능력"으로서 코뮨주의.
'공통된 사건'은 늘 그들의 실천적인 행동들 속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개체들이 있는 곳 어디에나 '사건'이 있듯이, 사건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코뮨주의는 가능하다.

한편, 코뮨주의는 ‘타자들의 공동체. 공동체의 단일 원리로 포섭시키지 않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그 다양성을 통해 서로 촉발될 수 있는 우정의 정치학을 꿈꾼다. 코뮨주의는 복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공통된 사건을 구성하는 능력이고, 나와 다른 개체들의 사고와 행동의 리듬을 맞춰 가며 하나의 공동행동을 구성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한 동일자적 논리로 모든 차이를 말소시키려는 행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차이들만이 소통할 수 있다’(『코뮨주의 선언』, 머리말)는 믿음이다. 코뮨은 각기 다른 개인들이 모여 서로 간의 특이성으로 상대를 촉발시키고, 그러한 촉발의 힘을 통해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던 가능성을 발견하고 키워가는 상생의 공동체, 타자들의 공동체다.

여기서 『코뮨주의 선언』과 『동무론』은 두 가지 공통적인 실천 윤리를 공유한다. 첫째는 자신의 말과 뜻은 실천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진실은 삶의 일관된 양식의 ‘충실성’으로써 증명될 수밖에 없다(『동무론』p. 448).”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코뮨주의 선언』, 머리말).” 둘째는 그것이 동무라는 말로 규정되든, 우정이란 말로 규정되든 간에 ‘뜻을 함께 할 동료를 만들라’는 것이다. 이러한 동무들, 혹은 우정들의 합심(合心)은 여러 대안적 실험들을 소통시키고 확산시키며,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코뮨주의 선언』, 머리말).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들의 책 자체가 실천 없는 이념의 공허한 선언이 아니라, 근대적 삶의 한계들을 넘어서려는 진지한 고민과 그 실천의 방법론을 십수년 간의 실제 경험을 통해, 실험한 결과를 반영한 ‘보고’이기 때문이다. 이들과의 대화에서 조금이나마 자기 삶의 한계와 벽들, 그 답답함을 깰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면, 당신 역시 이 우정과 동무라는 새로운 관계의 공동체적 실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자, 이제 새로운 삶으로의 탈주를 감행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들과 접속하고,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만나고, 또 다른 우리들과 소통의 지평을 넓혀가라. 그리하여 근대성의 한계를 넘는 새로운 삶을 발견하고 창조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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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7 10:31 2008/09/1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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