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위기의 주부들>을 비웃는가?
-동즐로, 『사회보장의 발명』

연구공간 수유+너머 만세


<위기의 주부들> - 가족과 사회의 진짜 모습

처음 <위기의 주부들>을 봤을 때, 나도 모르게 주인공들을 비웃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정원사와 놀아나는 부잣집 부인인 가브리엘. 딸이 오히려 엄마 같은 덜렁대는 수잔. 아들이 대마초 핀다고 경찰에 직접 신고해버리는 결벽증 브리. 게다가 여기저기서 사람은 퍽퍽 죽어대고, 이웃 간에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 아예 마을이 통째로 콩가루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 또한 나와 다르지 않았는지, 이 드라마는 미국 중산층 가정의 이면을 드러내니 어쩌니 하면서 현대의 어두움을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으며, “아직 우리는 저 정도는 아니잖아” 하고 자위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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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ABC 방송에서 제작, 한국에서는 KBS2에서 일요일 11:25분부터 방송 중인 <위기의 주부들>
"미국 중산층 가정의 위선에 가득 찬 이면을 날카롭게 파헤친 블랙코미디"

하지만 사람들이 한 번 비웃고 마는 게 아니라 시즌 4까지 계속 보는 이유는, 아마 주인공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 역시 가끔은 저런 콩가루를 꿈꾸기 때문일 테다. 마음에 안 드는 인간 삽으로 찍어 묻어버리고도 싶고, 멋진 사람이랑 바람도 피우고 싶다. 동시에 그런 탈선이 거부감 없이 갈무리 되는 이유는, 주인공들이 자신의 행동에 당당하기보다 스스로 이상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탈선하면서도 계속 꺼림칙한 느낌을 가진다. 자신은 아름다운 가족이며 이웃임을 치장하려 끊임없이 시도함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 안에서 꺼림칙한 느낌은 반드시 실질적 불행으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사람들은 탈선의 위험을 목격하고, 나는 그러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화목한 가족을 만들어야 하고 그럴 수 있다는 믿음. 이웃과 우애를 다해 관계를 맺고 어려울 때 연대(solidarite)해야 한다는 생각. 아름다운 사회란 바로 그런 것이라는 다짐. ‘사회’ 라든가 ‘연대’ 라든가 ‘가족’ 같은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임과 동시에 행위의 기준으로 견고하게 존재한다. <위기의 주부들>이 그 기준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 불편함과 동시에 짜릿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벗어남이 불행이라는 결과를 낳을 때, 우리의 처지에 안도한다. 그래서 <위기의 주부들>은 매우 교훈적이다. 애들이 봐도 된다. 콩가루를 보여주지만, 콩가루의 불행함을 동시에 역설한다. TV에서(혹은 컴퓨터에서) 돌아앉은 우리는, 탈선의 욕망을 대리만족으로 해소한 채 다시 사회와 연대와 가족을 향해 달린다.

자크 동즐로(Jaques Donzelot)라면 거꾸로 <위기의 주부들> 이야말로 현대 가족/사회/연대의 진짜 모습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푸코는 한 강의에서 자신의 작업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없다고 가정한 후, 그렇다면 어떤 실행들과 장치들이 그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는지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Ch.1) 예컨대 절대적인 광기나 병이 없다면, 어떤 실천들을 통해 그런 담론이 생산되었는지 보여주는 식이었다. 푸코와 가깝기도 했던 동즐로는 이런 작업을 ‘사회’와 ‘연대’와 ‘가족’을 대상으로 진행한다. <위기의 주부들>을 보며 행복을 낳을 수 있는 진짜 사회/연대/가족을 떠올리는 대신, 동즐로를 따라 차라리 그런 것은 애초에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나타났는지 살펴보자. 그때 위기의 주부들은 콩가루나 쉽게 비웃을 수 있는 반면교사가 아니라, 맥락을 가진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19세기와 함께 태어난 '사회' - 근대적 문제해결의 수단

우선 ‘사회’는 없다. 적어도 없었다. ‘사회’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정도로 넓게 본다면 이게 뭔 시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지만, 동즐로에 따르면 사회란 19세기에 특정한 통치 목적을 위해 도입된 범주였다. 사실 하나의 지역이나 국가에서 사람들의 관계를 단일한 ‘사회’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군주제 사회에서 군주와 귀족과 평민이 같은 ‘사회’에 속하는 구성원이라고 여겨졌을까? 그래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기를 요구받았을까? 턱도 없는 일이다. 결코 동질적이지 않은 구성원들이, 그 이질성을 확인/재생산하며 존재했던 전근대에서 ‘사회’라는 범주가 기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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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케르 프랑스 루이16세 당시의 재무총감.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삼부회'를 소집함.(위키피디아 바로가기)

19세기에 ‘사회’가 등장한 것은 시민혁명과 근대 자유주의 국가의 성립 덕분이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시민 혁명은 각 국가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다. 이는 계몽주의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막 시작된 근대 국가 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었다. 근대 국가의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돈과 군대다. 세금을 잘 걷어야 하고, 징병을 원활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는 사람들을 여러 층의 위계로 나누지 않고, 모두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존재, 즉 ‘인구’로 바라볼 필요가 생겨났다. 귀족이나 성직자라고 세금을 안내거나 군대를 안가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네케르라는 프랑스 개혁가(『베르사이유의 장미』에도 나온다^^;;)의 궁극적 목표는 제 3신분의 해방이나 평등이 아니라, 국가의 효율적인 운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을 모두 동질적 지위를 가진 하나의 집단 구성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인구’ 라는 단위로 포착되고,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고 선포된다. 당시 최초로 인구센서스를 시도하고, 온갖 통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는 이런 새로운 체제가 낳는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다. 모든 이에게 주권이 있다고 선포된 이후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것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에게도 주권이 있는데,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하고 힘든가?”와 같은 의문이 나타났으며, 이는 이념대립과 혁명적 사태로 이어졌다. 근대 국가가 보장한 자유와 평등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시작이었으며, 홉스봄이 지적하듯 19세기는 ‘혁명의 시대’였다. 이는 통치세력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사회’가 다시 한 번 작동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회에 따르면 우리는 개인이기 전에 사회적 존재다. 단순히 평등한 주권을 나누어가진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 기대어 있는 존재들이며, 평등한 개인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회에 속하고 서로 연대해 있는 존재들이다. 이런 연대성과 사회는 개인이 없애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은 항상 사회 위에 존재하는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 대립을 통해 근본적인 사회구조를 의심하기보다, 지금 존재하는 부담이나 문제를 어떻게 우애 넘치는 방식으로 해결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서로 싸우기 전에 상대와의 근본적 연대를 깨달아야 한다. 당시 연대의 관점에서 보장보험 등이 도입되어 극단적 노사 대립을 막은 것이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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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클루아 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그림 속의 이 순간이 '사회'가 확인되는 시점이 아닐까?

요컨대 ‘사회’는 사람들을 단일한 집단으로 파악하여 활용함과 동시에, 그들 간의 연대와 우애를 강조함으로써 이념 대립과 같은 문제를 미봉하는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확인되는 시점은 일상이 아니라, 국가가 사람들을 특정한 형태로 통치하고,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미봉하려 시도할 때이다. 평소에는 서로 욕을 하건 협박을 하건 상관없다. 하지만 국가가 이들을 단체로 활용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혹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것을 근본적인 체제의 문제로 돌리지 않고 해결하고 싶을 때 사회가 동원된다. <위기의 주부들>에서 유일하게 ‘지역사회’ 라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때는 사람이 죽거나 문제가 생겨 경찰의 입회하에 마을 사람들이 모일 때다. 평소에 공갈을 주고받던 이들이 국가의 지휘 아래 잠시 하나가 된다. 그리고 사회가 확인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다. 사회를 통한 해결은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기보다, 현 질서를 지나치게 깨는 ‘또라이’의 색출과 치료를 향한다. 그 또라이는 연대성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연대란 구성원들이 모두 동일한 정상성을 가졌음을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요컨대 사회란 ‘원래’ 있는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도입된 거다.


인구 통제의 매커니즘으로서의 '가족'

가족 역시 이런 통치적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국가가 사람들을 단일 범주로 설정해놓고 활용하려면, 대립을 봉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라고 호명되는 인구 집단을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어야, 즉 늘이거나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특정한 도덕이나 규율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거처럼 무언가를 마구 강제할 수는 없다. 좀 더 효율적인 활용을 위해 위계가 없어지고 ‘자유’와 ‘평등’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권력이 사회에 개입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 것이 ‘가족’이었다.

사실 19세기 사람들은, 특히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다지 가족적이지 못했다. 남편들은 일이 끝나면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아이들은 거리에서 뛰어놀았다. 아내들도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교외의 직업 유모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이는 쉽게 아동 유기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유모들 역시 성의껏 아이들을 키우려 하지 않았다. 아동 사망률이 높았음은 당연하다. 인구를 증가시켜 국력을 키워야 하는 권력의 입장에서 이는 매우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권력은 가족의 소중함과 성별 역할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경제생활도 좋지만 그것은 남편의 몫으로 한정하고,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을 직접 키우면서 가족을 돌봐야 한다. 그래야 민족의 앞날이 밝다. 이를 거부하고 피임을 하거나 아이들을 방기하는 여성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가족의 이름으로 개인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를 시도한 셈이다. 가족이라는 이념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임대 주택 사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도 바로 이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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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포스터들을 통해 각인된 '인구 통제'의 기억은 우리에게도 남아있다. 규모를 적절히 조절하는 개인들의 자제력.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사회와 가족이 보편적이라는 관념을 내면화 한 것이 아닐까?

인구를 늘이는 것뿐만 아니라 줄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 19세기에는 인구 과잉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멜서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인구를 제한하는 방법은 부부의 금욕이었다. 이번에는 좋은 가족 혹은 성실한 가족이라면 가족 규모를 적절히 제한할 수 있는 자제력을 가져야 한다. 이런 논의에서는 심지어 빈곤도 단정치 못한 가정의 탓으로 여겨졌다. 즉 부부가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가족 구성원 수를 너무 늘였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논리다. 요컨대 현대의 가족 역시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사회’ 혹은 ‘인구’ 라는 단일 집단으로 범주화되고, 그들을 조절하고 활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그 조절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가족’ 이다.

가족이 가지는 성격인 ‘내밀함’ 이나 ‘친밀함’은 단순한 인구 조절을 넘어 사회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기 위한 방편이다. 어머니는 가족의 포근함을 강조함으로써 남편을 술집에서, 아이들을 거리에서 불러들이는 한편, 아이들의 자위행위를 감시하고 행동을 통제했다. 동즐로가 『가족의 통치』(The Policy of Families)에서 어머니와 신부와 의사의 동맹이 형성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위기의 주부들>에서 브리가 아들이 대마초를 피는 것을 보고 직접 경찰에 신고하고, 그가 동성애자임을 밝혔을 때 신부를 불러와 상담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어머니 상의 전형이다. 여성은 좋은 어머니가 됨으로써 인구를 조절하는 한편 도덕적 주체를 길러내는 감시자가 되고, 남성은 경제적 자유의 주체가 되어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주어졌다. 원칙적으로 자유를 얻은 인구를 맘대로 통제하기 위해 ‘가족’이라는 범주를 도입된 셈이다.  


보편성의 역설, 너무나도 안전한 세계의 이면

이런 사회와 가족에는 보편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인민들이 이를 당연하게 여기며 내면화해야 비로소 이런 장치가 작동하기 마련이다. 속내를 다 까발려놓은 채 권력 장치가 작동할수 없다. 사회의 선천성과 객관성을 주장하는 뒤르켐을 비롯한 사회학자들이 19세기에 갑자기 각광받고, 가족에 대한 미담이 퍼진 것은 이런 보편성을 구성하기 위함이다. 무엇보다 보편성은 어딘가에는 정말 아름다운 가족이나 사회가 존재하기에, 많은 문제를 가족이나 사회가 완성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로 여기게 만든다. 그런 이상향이 실제로 성취되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나 사회의 집착에 수반되는 통제 효과다.

<위기의 주부들>이 보여주는 것은 차라리 이런 보편성의 허울이 지닌 한계다. 위기의 주부들이 위기를 겪는 것은 그들이 이상적 가정이나 사회로부터 동떨어져서, 즉 콩가루 집안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이 너무나 가정이나 사회를 지키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앞서 말했듯 가족이나 사회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범주이자 전략이기에, 인간이 완전히 거기에 적합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가족이 특별해도 어떻게 어머니의 뜻대로만 살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20-30년을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평생 체제에 불만을 품지 않은 채 항상 그것을 용인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지만 가정이나 사회는 보편적이며 이상형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할 경우, 즉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려고 시도할 경우 문제가 생긴다. <위기의 주부들>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의 생활을 감시하고 자기 뜻대로 길러내려 하기에 아이들과 갈등에 봉착한다. 마음은 이미 딴 데 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나마 훌륭한 부부를 연출하려니 온갖 무리수를 두게 된다.(가족) 이웃에게 관심을 갖지만, 이웃이 겪는 고통의 근본적 원인을 고민하기보다, 혹시 이웃이 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나 또라이가 아닐까만 의심하기 때문에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사회) 위기의 주부들과 그들의 공동체는 결코 콩가루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와 가정의 핵심적 원리를 잘 체현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위기의 주부들>을 보고 그들을 쉽게 비웃는다면, 우리가 여전히 가족이나 사회라는 보편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으며, 열심히 하면 위기의 주부들처럼 위기를 겪지 않고 ‘스위트 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부들이 우스워 보인다. 하지만 그 주부들 역시 정확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바로 그 생각이 수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들을 비웃는 우리는 그들과 동일한 심적 상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정확히 동일한 문제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가족이나 사회라는 형태로 밖에 타인과 관계 맺지 못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에 수반하는 문제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사회나 가족이 없으면 상황이 나아진다거나, 현대적 의미의 사회나 가족이 없었던 시절이 훨씬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연대나 애정이 가지는 의미를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전에는 나름의 권력의 전략과 그에 따른 고충이 있었으며, 오늘날 연대나 친밀함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자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통치의 도구로 도입된 가족의 내밀함과 사회의 연대를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내밀함이 대상에 대한 간섭과 감시의 눈길에 지나지 않는다면, 혹은 우리의 연대가 사회적 정상성으로 동료를 포섭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닐까? 동즐로는 사회과 가정의 보편성이 가진 허울을 벗겨버린다. 이제 그것과는 다른 관계를, 타인보다 멀지만 가족보다 더 가까운 또다른 관계를 실험해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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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oid 2008/09/28 19:39

    <위기의 주부들> 좋아하는데... '가족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보니까 재미있네요~ ^^

    • 그린비 2008/09/29 09:57

      void님, 안녕하세요~
      재밌게 봐주셨다니, 동즐로의 저작도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