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로의 초대 -『이진경의 필로시네마』

이미지의 형식으로 봉인된 운동, 이미지의 형식 안에 봉인된 시간, 그것은 철학을 새로운 극한으로 인도하는 또 하나의 친구다.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철학의 친구’임이 틀림없다.
 (『이진경의 필로시네마』 머리말 중에서)

1. “지지고 볶기”


자신의 삶을 두고 ‘지지고 볶기’라고 표현한다면, 그건 이미 탈주의 유혹을 느끼고 있다는 징후일 것이다. 허나 얼마 못가 그 마음은 맥없이 가라앉고 만다. 새삼 닥쳐오는 삶의 무게가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 “때려 치는 건 좋지만, 그 다음은?”, “가족들은 대체 어쩌라고?”. 탈주로의 욕망은 어느새 이처럼 ‘무책임한 도피’를 뜻하는 게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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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_BrownEyesJ 블로그 (바로가기) 죽음의 선을 타는 '탈주자', 히키코모리
 내면, 내부로의 몰입은 외부를 향해 확장되는 삶을 '향한' 탈주와 대비되어, 삶을 '뒤로하는' 탈주로 정의된다.

한편으로 탈주란 지지고 볶는 삶에 지쳐, 죽음의 선을 타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삶의 고통과 무게로부터의 해방. 최근 연예인의 잇단 죽음처럼, 탈주는 어두운 절망 속의 가능한 결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섬뜩한 결심으로 그들은 해방감을 느꼈을까? 삶 ‘속에서의’ 탈주가 아닌 삶‘으로부터의’ 탈주. 삶이라는 벽 앞에서 좌절하고 붕괴되는 탈주와, 그것을 돌파하는 탈주. 붕괴되는 탈주, 그건 차라리 삶의 무게로 탈주적인 삶을 포기하는 방식은 아닐까?


2. ‘카타르시스’가 넘쳐나도 사람들은 죽는다


무책임한 가벼움과 죽음의 무거움. 탈주의 이미지는 이 두 무게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리고 두 극단 사이에서조차 ‘탈주’의 꿈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탈주적인 영화를 본다. 탈주의 드라마. 대나무 숲을 누비는 리무바이(주윤발)와 용(장쯔이)을 보며《와호장룡》의 강호를 날아다니고, 《풀 몬티》의 오합지졸 스트립쇼를 보며 한바탕 웃음으로 삶의 금기를 깨고, 저 옛날의 《블레이드 러너》를 꺼내보며 자신을 죽이려 찾아온 자마저 탈주하게 만드는 복제인간의 눈물에 감동한다. 이들을 그저 한데 묶어 단지 픽션일 뿐이라고 말할 것인가? 현실이 아니기에 가능한 ‘카타르시스’일 뿐이라고, 욕망의 ‘배설(카타르시스)’일 뿐이라고... 나는 오히려 가벼움과 무거움의 양극에서 쉽게 포기되는 탈주의 꿈으로 읽고 싶다. 그것이 나의 신체에 스며들어 무언가를 조금씩 바꿀 때, 영화는 하나의 촉발이 된다. 하지만 이게 탈주의 욕망을 제어하기는 역부족이었던 것일까. 넘쳐나는 영화만큼 카타르시스 또한 무수했을진대, 이 또한 결국 ‘탈주’를 포획하지 못했다. 20~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 한다. ‘카타르시스’가 넘쳐나도 사람들은 죽는다. 다시 한 번, 자살과 대리만족은 탈주의 징후일 뿐임을 환기해보자. 우리는 대리만족을 위한 이미지의 연쇄만으로 영화를 보지는 않는가? 이로 인해 우리는 영화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는지도 모른다. 촉발이란 일방적 호의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신체가 변할 때 비로소 경험되는 현상이다. ‘기성품’이랄 수 있는 영화를 통해 나의 삶을 촉발받기 위해서는, 그래서 ‘영화의 친구’가 필요하다. 필로소피아(철학)와 시네마의 만남, ‘필로시네마’. 이것이 내가 이 책을 펼쳐든 ‘대외용’(!?) 명목이다.  


3. 탈주의 영화 혹은 영화의 탈주

정작 이 책을 펼쳐든 저의는 따로 있었다.『하룻밤에 읽는~』,『30분에 읽는~』시리즈를 펼쳐보듯, 그 어렵다던 들뢰즈/가타리의 욕망 이론을 ‘영화 평론 책 하나’로 해결해보자는 꼼수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이런 꼼수에 아주 적절히 부응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웃어대며 보았을 「모던 타임즈 - 자본주의와 유쾌한 분열자」를 읽으며 자본주의와 욕망이론의 요체를 쉽게 이해하게 되고, 흔히들 황당무계한 변태 영화로 알고 있던《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를 통해 욕망과 권력, 혁명의 문제에 대한 숨은 질문과 대답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좀더 인상적인 것은 영화를 통해 탈주의 철학을 펼치면서, 그보다 앞서 이미 영화를 탈주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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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필로시네마』와 영화의 친구들. 책은 영화를 '다루지' 않는다.

친구를 대하는 '개념'을 통해 영화를 만날 뿐.

가령 이 책은《블레이드 러너》속 복제인간의 금기에서 라캉의 언어적 무의식을 읽어내고, 그럼에도 ‘금지된 귀환’을 계속하는 복제인간들의 모습에서 욕망의 일차성을 말한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로 해석했을 때, 이 영화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영화와 다른 것이 된다. 나아가 복제인간과 그를 ‘폐기’하기 위한 인간의 초라한 대결을 보며 ‘인간주의’의 근원을 파괴해버릴 때, 이 영화는 더 이상 이전에 나를 감동시켰던 그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가 된다. 이러한 해석은《와호장룡》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책은 대밭에서, 사막에서, 그리고 무심코 지나쳤던 객잔과 동굴, 북경이란 도시에서 홈 파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찾아낸다. 이 매끄러운 공간을 다시 마지막 장면, 백척간두 구름 속에 자신을 던지는 용의 모습에서 찾아낸다. 그곳에서 매끄러운 공간은 무아無我 혹은 “오르내림에 자유롭고 삶과 죽음에 자재한 경지”와 연결된다. 영화를 보고 강호에 가는 것만이 대안이 아님은 누구나 알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매끄러운 공간이란 멀고 먼 개념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도시의 벽을 바라보는 아래의 시선은 어떤가?

벽은 길을 홈으로 만드는 장치지만 동시에 벽 위로 오르는 통로다. 벽 위로 가는 통로, 그것은 벽이 있는 모든 곳에 있다. 오를 수 있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라고는 해도 말이다.
강호라는 공간은 물질적인 장치들에 의해 정의된다기보다는 그것을 달리고 이용하는 방식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같은 책, 5장. 「와호장룡」에 관한 포토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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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호장룡》중에서

바닥을 치고 솟구치는 몸. 공간은 이미 중력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능력에 따라 다른 규칙을 창출하는 몸.

책은 그 흔했던 ‘벽’, 무협영화 속 그 흔한 ‘벽타기’에서 속도로 변용되는 통로의 공간을 읽어낸다. 이렇게 책에서 다루는 열편의 영화는 저마다 스토리라는 ‘뼈대’와 철학적 개념이라는 ‘근육’으로 생동하게 된다. 여기에서 영화는 더 이상 영화이기를 그치고 철학도 더 이상 철학이기를 그친다.


3. 탈주는 모든 곳에 있다-영화에 의한 탈주로의 초대

그간 ‘탈주’는 거대한 혁명 아니면 무책임한 도피를 의미해야 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찾아낸 탈주는, 윤리적 질타와 거대한 상전벽해의 부담에서 빗겨간 곳에 있었다. 탈주란 삶의 문제 자체에 있었다. 탈주가 혁명이라고 할 때, 그것은 정권을 뒤집는 운동만이 아니라 탈주적인 삶을 창안하며 내 삶을 혁명하는 것이었다. 영화가 단순한 픽션이 아닌 것처럼 철학 또한 ‘논픽션’이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를 개념어로만 보이던 탈주로 선뜻 읽는 이들을 초대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전염돼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것이 결국 탈주의 속성이기에.

- 연구공간 수유+너머 오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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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10:46 2008/10/0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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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라 2008/10/08 15:40

    호호, 정말 좋은 책인 듯하네. 정말 좋은 책인 듯하게 썼네. 근데 추천을 눌렀는데 왜 이미 했다고 나오는 걸까나?-.-;;

    • 그린비 2008/10/08 15:52

      호호 소라님 안녕하세요! 『이진경의 필로시네마』는 정말 좋은 책이랍니다. 영화를 철학으로 설명하는 여느책들과 달리 철학과 영화가 만나 새로운 의미, 개념들을 생성하는 책이기 때문이죠!

      아마 추천이 안 되는 이유는 추천을 누르시려고 했던 그 컴퓨터를 함께 사용하는 다른 분이 이미 추천을 눌렀기 때문일 거에요. 추천은 한 IP당 한번씩 밖에 안 되거든요. ^^

      앞으로도 그린비 블로그에 자주 방문해 주셔요!!

  2. 어머나 2008/10/08 15:53

    저도 이책 엄청 좋아하는뎅!! <필로시네마>에 관한 글 중 제일 좋은 것 같네요! 전 무려 이 책 5명에게 선물했답니다. 후후*-_-* 좋은 글 잘 봤습니당! 다음 글이 기대되는군뇨. 후후.

    • 그린비 2008/10/08 18:13

      어머나님 안녕하세요!
      무려 5권이나 선물하셨다니...ㅠㅜ 감사합니다. 다음에 댓글 남기실 땐 블로그나 미니홈피 주소도 남겨주셔요!!

  3. 어떤날 2008/10/08 15:55

    책도 정말 좋은 책이지만, 소개하신 글도 정말 좋은 글 같아요!
    예전에 봤던 무협지에서 벽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그런 고수들을 보면서 허황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보면서 그것이 어쩌면 고착된 우리 삶에서 탈주하는 방법에 대한 은유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어요! ^^

    • 그린비 2008/10/08 18:14

      어떤날님 감사합니다. 오하나님의 글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4주후에 다시 포스팅됩니다. 다음에도 꼭 찾아주세요!!

  4. 한순간 2008/10/08 16:10

    이진경 선생님의 <필로시네마>가 예전 딴 출판사에서 나왔을 때 읽었습니다. 그때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나니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제가 예전에 읽을 때 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잘 설명해주는 서평이라 이 글쓰신 분을 한번 뵙고 설명을 듣고 싶어지네요.^^

    • 그린비 2008/10/08 18:22

      안녕하세요 한순간님!
      다른 판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어떤 판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초판으로 나왔던 새길 판의 경우엔 7편의 영화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후에 나온 소명출판사판의 경우엔 <와호장룡>, <동사서독>, <풀 몬티>까지 세편의 영화가 더 추가되어 10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난 5월30일에 그린비에서 나온 판본의 경우에 영화 관련 이미지들이 대폭 추가되었고, 이진경 선생님이 직접 이미지를 고르고 캡션을 붙인 <와호장룡> 포토 에세이가 추가되었습니다. 점점 진화하는 책이랄까요? ^^

      꼭 새판본도 읽어보셔요!!

  5. 수0 2008/10/08 17:25

    건강한 탈주의 욕망을 자극해주는 멋진 글~ <요리사...> 이 영화 다시 봐야겠네요. 글고 <필로시네마도>도 다시....

    • 그린비 2008/10/08 19:09

      수0님, 안녕하세요 ^^
      혹시 『섹슈얼리티와 광기』의 저자 이수영 선생님 아니신지요??
      으하... 이거 영광입니다. ㅠㅠ

  6. 어느놈 2008/10/09 16:04

    책도 좋은 듯하고, 서평도 좋으니 한 번 읽어봐야죠.... 아직도 이 책을 읽지 않았다니...!^^

    • 그린비 2008/10/09 16:23

      어느놈님 안녕하세요!! 크하~~ 꼭 읽어보셔요!! 아주 좋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