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리는 이토록 수많은 인연들을 마주치면서 짜증만 내고 있습니다.
일주일의 시작, 월요일입니다. 거리가 북적거리는 주말을 보낸 월요일이죠.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 때문에 바깥활동을 하는 사람이 많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 거리는 늘 사람들로 넘쳐 났습니다. 저는 그런 거리를 너무나도 싫어합니다. 사람이 많은 만큼 ‘무례한 행동’들도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하다보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점점 예민해져서, 화장품 냄새가 심하다(지병인 비염으로 인해 강한 냄새가 좀 힘듭니다 -_-;), 저 남자들은 왜 이렇게 시끄럽냐, 좁은 길로 차 끌고 들어오는 심보는 당최 뭐냐 등등 주변의 모든 상황이 짜증을 유발합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강도는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엔 그 강도가 좀 심한 편입니다. 그래서 그럴 땐 온 사방이 ‘걸림돌’처럼 느껴지죠. ‘걸림돌’이라는 게 평평한 가운데 떡 하니 가는 길 막고 있는 그것을 말하는 것일 텐데, 사방이 ‘걸림돌’이라면 그건 ‘벽’이나 다름 없습니다. ‘벽’으로 둘러싸인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곧 한 발짝 뗄 때마다 그걸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ㅜㅜ
지난 번 임유진군의 포스트(바로가기) 보신 분 있나요? ‘입에 걸레 무는 남자1’이 바로 접니다.
“남자1은 평소에는 온순한 한 마리 양과 같다가도(생긴 것도 연두부와 유사함) 불의를 보거나 혹은 겪으면 입에 걸레를 뭅니다. 그런 게 일상이 되다 보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쉽게 막말을 하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습관이 되니까 말이죠.”
(편집부 임유진, 「오다기리 조, 쉽게 화내지 않는 남자」 중에서)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던 저에게 큰 감화와 감동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두 달 전쯤에 ‘탈주하는 인문학자’ 고미숙 선생님(바로가기)께서 요즘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을 읽고 있는데 무지하게 재미있다는 말씀을 하셨었지요. 인생의 난관을 구렁이 담 넘듯이 술술 넘어가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그런 멋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해 주시더군요. 잊고 있다가 좀 편안히 읽을 수 있는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에 집어 들었습니다. 사건은 거기서 시작된 것이죠. 초반 10페이지부터 제 마음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불안, 초조, 짜증, 소심함 같은 마이너스적인 감정들이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슬금슬금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죠. 사람의 마음이 참 재미있는 것이, 몰두하고 있는 어떤 것(저의 경우엔 책)에서 흐르는 정서가 ‘명랑’한 것이면 내가 아무리 우울하더라도 읽는 동안엔 그 정서에 감염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요동치는 질곡의 삶을 초연하게 살아낸 네루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까칠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맙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시인입니다. 책의 부제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처럼 인생 전체를 부제목 그대로 산 사람이죠. 20세기 초에 태어나서 70년대에 죽었으니, 지구가 요동치는 시간의 한 복판에서 살다 간 것입니다. 그의 주변에서는 온갖 험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가난이 엄습하기도 하고, 지적 허영으로 가득한 관료들이 친한 척하며 다가올 때도 있구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험한 일들이 네루다와 만나면 유순해집니다. 어떤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부드럽기 때문이죠. 그는 결코 짜증을 내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작아진 기쁨을 키워 내고 그걸 사건 전체에 감염시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도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동으로 그렇게 되죠.
아마 저 같은 사람이 네루다가 겪었던 그런 일들을 겪는다면 아마 오래 못 살고 죽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상황마다 까칠하게 굴다보면 그건 결국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돌아오고, 그 스트레스는 생명력을 갉아먹게 되니까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스피노자라면 아마도 “존재 역량이 부족하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존재 역량’이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가는 힘이죠. 그 힘은 아주 작은 ‘부정성’(슬픔의 정서들)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순전한 기쁨의 정서들이 ‘존재 역량’을 만들어 내죠. 부정적인 마음은 능력을 깎아먹을 뿐 어떤 긍정적인 효과도 산출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슬픈 것’에서 ‘기쁜 것’이 나올 리가 만무하니까 말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저는 저의 ‘능력’(존재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주변에서 ‘시니컬’한 것과 ‘멋진 것’을 혼동하는 사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왠지 까칠하면 자신감이 있는 것 같고, 좀 전문가스럽게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네루다나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것들은 결국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타인과의 관계, 더 구체적으로는 타인과 함께 만드는 ‘활동’ 속에서 ‘까칠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요.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밖에서 오는 충격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지고, 나중엔 충격도 아니게 되어 버립니다. 여전히 사람 많은 거리를 걸을 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화가 치밀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결론입니다. 까칠한 성격 덕에 스스로를 학대하고 계신 남자1, 여자1 여러분.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읽으면서 기쁨의 기운에 감염 당해보는 게 어떨까요?
- 웹기획팀 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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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에서 네루다를 처음 만났으니 어언 20년이 지났습니다. 또 한동안 잊고있던 詩를 여기서 보게되는군요.
집에 가면 먼지를 털고 보아야 할 책이 두 권이 늘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그리고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덧붙임_ 이진경님의 책도 블로그 덕분이 먼지를 털었습니다. 지금의 활자와 달라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익숙함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과거는 언제나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조금만 보면 서글퍼짐을 느끼게 하니까요..
한방블루스님 감사합니다. 이 글이 네루다의 시집을 다시 꺼내보는 계기가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 전 자서전을 읽었지만 정작 네루다 시집은 가지고 있질 않네요. 조만간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