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시선으로 문화대혁명을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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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문혁 10년
천이난 지음 | 장윤미 옮김 | 도서출판 그린비 | 인문 · 역사
출간일 : 2008년 10월 20일 | ISBN(13) : 9788976825070
신국판 양장 (150X220mm)| 840 쪽


이 책은 문화대혁명 시기 저자가 노동자의 신분으로 조반조직을 전두지휘하면서 경험한 일을 서술한 회고록이다. 조반조직의 세력 확장으로 열여덟의 나이에 당시 회사 혁명위원회 부주임을 거쳐 후난성 치안 업무까지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문혁이 끝나면서 그도 숙정(肅正)당하는 처지가 된다. 그는 문혁 10년간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문혁이 단편적이라고 반박하며, 노동자들과 홍위병·중앙·당시 기층 민중들과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 지은이 및 옮긴이

지은이_천이난(陳益南) | 자유저술가.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1949년에 태어나 문혁 발생 당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장단위의 노동자 조반조직에 참여한다. 현재 독자적으로 문혁 역사연구에 종사하고 있으며 "문혁 중의 홍위병에 관한 전면적 인식", "문혁 중 후난 군중조직의 개황" 등 10여 편의 문혁사 관련 문장을 발표한 바 있다.

옮긴이_장윤미 | 중국정치 전공.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근무하며, 중국사회의 변화와 중국인의 삶과 노동 등을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개혁시기 중국의 노조모델"(2004), "문화대혁명과 노동자의 교육혁명"(2007), "중국의 체제전환과 러시아"(2008) 등의 논문을 썼다.


∎ 목 차

한국어판 서문 5
머리말 11
배경지도/당조직도/용어 해설 16
화보 337

제1장 1966년 6월: 사진관 직원이 뜻밖에 ‘소삼가촌’으로 공격받다 27
제2장 먼저 ‘조반’을 진행한 것은 홍위병이었다 49
제3장 견습공이 조반파 우두머리가 되다 75
제4장 우리는 처음 대결의 승리자이다 106
제5장 베이징에 ‘기소’하러 가다, 중앙 상업부에서 내게 호신부 한 장을 주다 133
제6장 1월 폭풍 중 부친은 추가 지급된 2천 위안의 임금을 돌려주다 156
제7장 1967년 2월 5일의 역사기록 176
제8장 ‘등착조’에서 ‘포성융’ 전투대까지 209
제9장 뜻밖에 중앙문혁의 지시를 뒤엎다 241
제10장 신비한 ‘청년근위군’에 참가하다 279
제11장 진짜 총탄이 오가는 무투를 직접 겪다 314  
제12장 탱크와 대포 모두 사용된 ‘문혁’ 353
제13장 조반파의 유혈 ‘내전’에 말려들다 385
제14장 성 군구 정문에서 총을 갖고 보초를 서다 414
제15장 조반조직 총부에 두 명의 홍군 노장군이 오다 431
제16장 일주일간 공안국의 ‘간수장’이 되다 447
제17장 총기 반납과 수거 476
제18장 ‘성무련’ 사건과 ‘삼우일풍’ 반대 운동 499
제19장 불과 열여덟의 혁명위원회 부주임 534
제20장 회사 ‘혁명위원회’ 기록 561
제21장 ‘계급대오 정리’ 운동의 치욕과 곤혹 595
제22장 문혁 승리를 표방한 ‘9대’ 이후 도리어 권좌에서 내려오다 623
제23장 ‘일타삼반’ 운동으로 숙정의 맛을 보다 645
제24장 하마터면 ‘5·16’분자로 잡힐 뻔하다 675
제25장 비림비공운동으로 인한 조반파의 두번째 영광 701
제26장 ‘비등반우’의 1976년은 깊은 모순과 우려를 느끼다 734
제27장 1976년 10월: 마음을 놀라게 하고 넋을 뒤흔든 최후의 날들 761
제28장 나의 문혁_ 2년간의 심사를 받고 끝나다 797

후기 803
해제: 문혁은 왜 끝났는가? (한사오궁) 807
옮긴이 후기 823


∎ 책 속으로

신임을 받던 ‘혁명 계승자’가 그 이후 도리어 조반파가 돠디니 무엇 때문인가? 원칙대로라면 문혁에서 나는 보수파 쪽에 참가했어야 했다. 역사의 발전은 뒤엉켜 복잡하다. 사실 나는 점차 ‘조반’으로 편향되었는데, 이는 일부 대학생 홍위병들의 최초의 조반운동이 진압당한 상황을 직접 목도하고 난 뒤 동정심으로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조반’ 행위를 한 홍위병들은 그 뒤 결코 조반파가 되지 않았고, 도리어 이른바 ‘보수파’ 혹은 소요파가 되었다. (본문 49쪽)

어떤 이들은 그때 당신들은 ‘파벌싸움’에 어찌 그리 몰두할 수 있었느냐면서,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당신들의 그때 행동은 확실히 정신에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고 얘기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동시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 그렇게는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란 언제나 정신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말이다. (본문 213쪽)

문혁 중 어떤 일들은 확실히 후세 사람들을 알 수 없게 하거나 곤혹스럽게 만든다. 예컨대 ‘비림비공’ 같은, 고위층에서의 린뱌오 집단 문제에 관한 조사운동이 어떻게 또 한 번 기층 조반파들의 ‘성대한 축제일’로 변할 수 있었는가? 전체 문혁이 발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위에서는 위대로의 어떤 생각이 있었던 것 같고, 아래에선 아래대로의 요구가 있었던 것 같다. 마침 양자가 결합되어 결코 단일한 원인이 아닌 힘을 합친 운동이 형성되었다. (본문 715쪽)


∎ 책소개

“민중의 시선, 민중의 목소리로 문화대혁명을 이해한다!”
―조반파 노동자가 직접 체험한 문화대혁명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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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1966년 8월 베이징 천안문에서 마오쩌둥이 수백만 명의 홍위병을 사열하는 장면.

2008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인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행사였다. 30년간 실시해 온 개혁개방 정책으로 어떻게 중국이 달라졌는지를 세계인에게 보일 수 있는 자리였으며, 이제까지 후진국이나 제3세계로 평가받고 있던 중국이 선진국 대열에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음을 과시하는 행사였다. 하지만 중국의 이러한 화려한 변신 속에는 티베트 독립 운동의 무력 진압 같은 폭력적인 모습이 숨겨져 있을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심한 소득 격차로 인한 사회적 불안 요소도 함께 내재되어 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중국 내부에서, 중국의 노동자들은 현재에 만족하기보다는 40년 전의 문화대혁명(1966~1976년)을 그리워하고 있다. 문혁의 상징인 마오쩌둥을 다시 등장시키며 그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는데, 특히 노동자들은 국유기업 민영화 과정에 항의하며,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높이 들고 당시의 구호들을 외치며 집단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살 권리를 주장하는 이런 시위와 그들이 외치는 구호의 근거를 살펴보면, 그 밑엔 문화대혁명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명 중국 내부에서는 잊혀져야 할 시간, 알리고 싶지 않은 과거로 굳어져 버린 문혁이 왜 지금 평범한 중국 인민들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을까?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끝나 버린 문혁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문혁에 대한 관방의 기억과 인민의 기억 사이에는 어떠한 틈이 있는 것일까?

이 책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어느 조반파의 노동자의 문혁 10년』은 지은이 천이난(陳益南)이 장장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노동자의 신분으로 조반(造反;‘혁명을 받든다, 혁명적’이라는 의미)운동에 참가하면서 경험한 일을 서술한 회고록이다. 따라서 저자는 혁명의 한가운데서 직접 체험한, 문혁의 발생 과정과 조반파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 상황, 또한 중앙에 의해 숙정(肅正)당하기까지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조반파 노동자조직은 문혁 연구의 중요한 과제임에도 아직 한국에 소개된 적이 없다. 지금까지 한국에 소개된 문혁 관련 작품들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구성되거나, 상층부의 권력 투쟁의 결과라는 관점에서만 다루어졌고, 문혁 시기를 살아가던 평범한 민중들의 경우 그저 혁명의 흐름에 휩쓸려 피폐한 일상을 꾸려가는 존재로만 비춰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담론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홍위병 출신 지식인들이 그들의 문혁 경험을 다양하게 재생산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노동자들은 그들의 문혁 경험을 알릴 통로가 마땅하지 않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노동자가 자신의 문혁 경험을 써 내려간 이 책은, 독자들에게 문혁의 다층적인 면모를 알려 주는 것은 물론, 노동자의 시선으로 관방에 의해 통제되지 못하는 문혁의 다른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에게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노동자가 바라본 문화대혁명
문혁이 시작될 때 이제 막 사회로 나가게 된 견습공에게 현실이 가르쳐 준 첫번째 수업은, 바로 혁명 계승자의 신분으로 몇 명의 무고한 보통 군중과 소간부들이 문혁운동의 피해자가 된 것을 목도한 것이다. (본문 27쪽)

▶ 동정심에서 시작된 문혁
평범한 민중들에게 문혁은 그렇게 가벼운 사건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지지자와 반대자가 언론을 통해 서로를 비판하고 있었을 때, 당시 중국 인민들은 반당분자 색출에 시달려야 했다. 학교에서나, 공장에서나 어느 곳을 가든 직장 내의 반당분자 색출이 주요 과제였다. 홍오류(紅五類; 빈농, 노동자, 혁명간부, 군인, 혁명 유가족. 문화대혁명 당시 계급적 배경이 좋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 계급이 아니라면, 언제 반당분자로 지목당할지 몰라 타인을 경계하고 믿지 않았다. 저자의 문화대혁명 참여도 바로 여기서 시작했다. 당시 저자가 일하던 공장에는 다양한 계급들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공산당 통치 아래 모두가 같은 인민이라고 생각했지만, 과거의 계급은 그들을 같은 곳에 두질 않았다. 예전에 자본가 계급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저자의 친구가 ‘소삼가촌’(小三家忖; 반당분자)으로 지목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저자는 그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한 차례 복권 운동이 벌어지고 모두 일터로 돌아갔지만, 문혁은 쉽게 그들에게 반당분자의 혐의를 벗겨주지 않았다. 정세가 조금만 변화되면 이전의 소삼가촌들을 다시 색출하여 괴롭히는 사람들로 인해, 저자는 전격적으로 조반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그의 관점에서 문혁은 중앙의 잘못된 지시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복권시키는 운동이었고, 노동자들을 위한 혁명이었다.

당시 ‘리이저’ 대자보(「사회주의 민주와 법제에 관하여 마오 주석과 4기 인민대표회의에 바침」이라는 글로 당시 문화대혁명이 마오쩌둥의 독재로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비판했다)로 인해 우리 일부 청년 조반파 핵심분자들은 일정 정도 계몽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로 인해 우리들은 문혁 이후 일들에 대해 처음으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고, 더 이상 과거의 ‘파벌’ 관점에 국한되지 않았다. (본문 746쪽)

▶ 정치 주체로 성장하다
문화대혁명은 지식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중국 정치인들이 ‘인민들의 배는 무겁게, 머리는 가볍게’라는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그들의 정치 원칙으로 삼았다면, 문화대혁명은 그런 구도를 해체하는 혁명이었다. 혁명은 억압과 지시로 진행되지 않았다. 관방은 어떠한 힘도 조반파 노동자들에게 쓸 수 없었다. 노동자를 우위에 두는 마오쩌둥의 정책에 따라, 노동자들의 권한은 그들을 뛰어넘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오의 정책은 더 많은 참여 기회만큼이나 더 많은 정신적 각성을 요구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저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세상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비록 끈질긴 보수파와 관료들이 잔존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중앙의 지시와 조반 운동으로 인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숙명처럼 느껴졌던 신분관계를 뒤집고, 그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가치를 세상에 적용시키는 일은 저자를 생각 없는 대중에서 의식 있는 정치 주체로 일어나게 만들었다. 동정심에서 시작했던 조반 운동을 시작했던 어린 청년은 마오의 사상에 매료되어 곧 적극적인 행동 분자로 변모한다. 지은이는 곧장 공장을 관할하는 서기에게 달려가 직업 조반파가 되겠다고 요구한다. 직업 조반파는 적은 임금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에겐 문화대혁명 운동을 하며 마오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 문혁을 통해 중국 사회를 바라보다
이런 혁명에 대한 열정은 조반파와 보수파들 간의 무장 투쟁(이하 무투)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이런 무투는 그들의 비장한 시작에 비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전쟁 경험이 없다 보니, 적에게 총을 맞은 사람보다 같은 조직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참호에 수류탄을 던진 아군 병사나 뒤에서 쏜 총에 맞아 죽을 뻔한 조반파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문혁 시기 동안 무투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희생시켰는지 전해 준다. 저자는 문혁이 정리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무투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당분자로 몰린다. 당시 보수파나 조반파 모두 무투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문혁 이후 다시 보수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모든 폭력은 보수파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시작이 어땠는가에 상관없이 보수파들이 승리로 끝난 문혁의 결과가 바로 조반파들을 문혁의 폭력 주체들로 몰고 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조반파조직이 중앙의 지지를 받을 때, 저자는 혁명위원회의 부주임자리까지 올라간다. 이전에는 가담하지 못했던 회사 행정 일로 인해 바빠지기도 하고, 후난성의 감옥 경비와 치안 업무를 맡아 보게 되기도 한다. 이런 경험들은 저자에게 자신이 당과 국가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 인간에 대한 모든 기록이 담겨 있어, 공직 사회에 진출하지 못하게 하는 당안(췧案) 제도, 관방에 의해 통제된 언론사들의 상황 등, 저자는 당시 중국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알게 된다.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던 지은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을 점점 비판적으로 보게 된다.

노동자가 중심에 섰던 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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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주석(가운데), 린뱌오 부주석(오른쪽에서 세번째), 저우언라이 총리(오른쪽에서 두번째)
중앙 지도자들이 천안문 성루에서 홍위병 대표들을 접견하는 모습. 이들은 모두 중고등학생 · 대학생이다.

문혁 초기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한 인간의 계급적 위치였다. 특히 흑오류(黑五類; 지주계급, 부농분자, 반혁명분자, 악질분자, 우파분자를 의미) 같은 자본 계급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쉽게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혁명에 참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을 위시한 홍오류들은 그 당시 영도계급으로 인정받아, 문화대혁명에 직접적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노동자의 문혁 참가는 당시 대약진 운동 기간(1958년~1960년대 초) 동안 자본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노선의 첨예한 갈등 시기, 지배 계층들이 관료화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중앙의 의도를 넘어서, 문화대혁명 시기 동안 노동자들은 영도계급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직장 단위 내에서 자본가들을 뛰어넘는 조직을 건설한다. 이들은 당위원회의 권력을 탈각시키고, 새로운 체제를 형성하기 위해 탈권위원회(奪權委員會)를 조직한다. 그 탈권위원회 안에서는 당 서기가 아니라 조반파 노동자들이 책임을 맡았고, 직접 그 공장의 주인으로서 조직을 경영했다.

특히 후난성에서 활동했던 지은이는 조반파 노동자조직이 단위 지역이나 공장 내에서만 움직이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공장 내에서의 탈권이 수위를 벗어나자, 중앙에서는 그들의 권력을 넘어서려 하는 조반파 노동자들에게 보황파라는 낙인을 찍어 버린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자가 문혁의 주인이라는 대원칙을 되새기며, 중앙에 대해서까지 조반을 일으킨다. 결국 후난에서 벌어진 조반파 노동자조직의 복권 사건은 오히려 중앙의 지시를 뒤엎고, 중앙조직에 자신들이 진정한 혁명 주체임을 인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이들은 군 대표·성 기관 대표·노동자 대표로 구성되는 삼결합(三結合)으로 혁명위원회를 조직해, 직접적으로 행정 기관 수장의 자리에도 올라간다. 이러한 영도계급으로서의 경험들은 관방이 아무리 억압하더라도 노동자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된다. 따라서 많은 노동자들에게 개혁개방을 거쳐,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지금에도 문혁은 그들이 사회의 진정한 주체일 수 있었던 시간으로 회상되는 것이다. 이런 기억은 여전히 노동자들에게 문혁을 그리워하도록 만들고, 관방이 억압할 수 없는 문혁 담론의 틈새를 드러낸다.

언론 해방의 시기였던 문화대혁명

문혁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문투(文鬪)였다. 문투는 이른바 ‘표어 투쟁, 대자보 투쟁’으로서 문혁 기간 동안 민중들의 중요한 의사 표현 수단이었다. 신문이나 뉴스조차도 관방에 의해 통제되던 시절에, 중국의 민중들은 그들 조직이 추구하는 가치와 반대조직에 대한 이견을 대자보의 방식으로 개진했다. 관방 서기나 중앙의 정치가들은 황제와 같던 지난 날의 위엄을 지속할 수 없었다. 문투의 방법으로 민중들이 자신들을 공격해 오면 어쩔 수 없이 사죄하고, 고깔모자를 쓰며 반성해야 했다. 문투는 민중들에게 사회 지배 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취하도록 만들었고, 이후 문혁에서 조반조직들이 민중의 지지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조반파 노동자들은 대자보를 통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지식에 대한 갈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문혁이 끝난 이후 1970년대 초반 조반파 출신 노동자들은 다양한 독서회 활동을 통해 중국 상황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으며, 기존 조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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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8월 저자가 소속된 조반조직 '청년근위군' 총부의 일부 경위대원들의 모습.
문혁 중 문투에 참가한 대다수는 청년들이었다.
중고등학생과 청년 노동자들로,
당시 군대 조반파의 지지를 얻어 모두 총기와 진짜 군복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의 문혁에 불만을 갖고 파리코뮌 방식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던 양시광(楊曦光)의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대자보, 린뱌오(林彪)가 죽기 직전에 발표한 마오쩌둥의 독재를 비판한 「571 공정기요」는  문화대혁명 기간의 유명한 문투 사건이다. 하지만 이런 지식 계층에게만 문투가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노동자의 신분이었지만, 그가 속했던 조직 상강풍뢰(湘江風雷)가 보수파로 낙인찍혔을 때 직접 대자보를 쓰고,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기도 했다. 이것은 단순히 저자만의 특이한 경험이 아니라 그 당시 조반파조직에 속했던 노동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었던 경험이다. 문투는 노동자들에게도 쉽게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이었으며, 그로 인해 도시의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언론 해방의 역할을 하며, 중국 인민들에게 시시각각 소식을 전하던 대자보들은 마오쩌둥의 통제 아래 놓일 수 없었다. 문혁 후반부로 갈수록 마오쩌둥을 비롯한 기타 중국의 엘리트들은 문투가 지닌 여론 형성의 잠재성에 압도당하고, 중앙은 문투로 발생하는 언론 형세를 막기 위해 문혁에 반대하는 엘리트뿐만 아니라 조반파조직까지 탄압한다. 이런 사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앙의 지시-민중의 따름’이라는 기존 문혁에 관한 이해 구도를 해체한다. 중국 인민들은 문투를 통해 문혁에 대한 타인의 견해를 읽게 되고, 다시 그것들을 통해 그들의 견해를 전개해 나갔다. 이런 생각들은 후에 문혁의 신사조(新思潮)라 불렸고, 이렇게 형성됐던 문혁의 신사조는 현대 중국의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을 넘어서

얼마 전 상하이에서는 하방되었던 지식청년들이 돌아와 자신들의 지위를 다시 복구해 달라는 시위를 벌였다.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아 신장(新疆)으로 하방했던 청년들이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살 터전이 없어진 것이다. 국가에서는 이미 지나 버린 사건이라는 이유로 모른 체하고, 이들은 날마다 상하이 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문혁이 끝난 후, 자신의 젊은 시절을 혁명에 바치고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한 ‘잃어버린’ 세대들의 현재 모습이다. 이런 사건들은 단순히 상하이시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혁은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끝나 버린 사건이며, 들춰 보고 싶지 않은 과거이다. 하지만 이런 상하이 지식청년들의 생활 구제 요구뿐만 아니라, 홍위병 폭력 사건에 대한 문제 제기, 노동자들의 요구에서 드러나듯 문혁은 아직도 어떤 세대들에게는 현재 진행형이다.

민중들은 왜 문혁에 대해 당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확연히 상반되는 의견을 가질까? 그것은 문혁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당에 의해 공식적으로 정리되고 개혁의 최대 수혜자인 지식인들에 의해 정당화된 문혁은 ‘관방의 기억’이자 ‘선택된 기억’이다. 중국 사회에서 문혁에 관한 공식 입장은 ‘문혁 재난[浩劫]론’이다. 대재난은 문혁 조반파가 만든 것이며, 재난을 당한 것은 중화 문화·지식인·당의 좋은 간부라는 것이다. 물론 문혁의 최대 피해자가 지식인이고 문화에 대한 파괴가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허나 1966년 문혁 초기에 발생했던 이른바 ‘사구 타파’(破四舊; 구습속·구사상·구관습·구문화 타파 운동)는 주로 학생들이 저지른 일로 문혁 시기 군중 조반운동과는 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군중 조반운동은 1966년 11월에 가서야 발생했고 지식인, 문화계 인사에 대한 핍박은 8월에서 9월 사이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타도에 가담한 학생들은 대부분 고급 간부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많은 문학작품이나 회고록에선 이 모든 일을 조반파가 일으킨 것으로 묘사한다. 지식인들에게 이렇게 문혁 담론들이 결정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겪었던 아픔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문혁 이후 관방에 의해 정리되고 선전된 문혁에 대한 일방적인 기억이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조반파 노동자조직들이 추구하던 조반은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노동자의 위치로 돌아가 문혁이 남긴 새로운 사상과 행동 양식들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다. 문혁은 끝났지만, 이들의 신체에 또 다른 저항의 방식을 남긴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그리워하고 불러내는 문혁은 마오쩌둥·군대·지방 간부·보수파·고급간부 자제 출신의 홍위병 등의 문혁이 아니라 바로 그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기존 권위와 체제에 저항했던 ‘민중의 문혁’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문화대혁명의 또 다른 기억은 우리에게 이런 모순들이 무엇을 은폐하는지, 무엇을 선택적으로 드러내는지를 보여 준다.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처럼,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억은 하나가 아니다.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의 계급과 젠더, 어떤 정치적 지형도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많은 역사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기억만을 강요한다. 더 이상의 다른 기억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관방에 의해 정리된 문혁은 후대 사람들에게 더 들춰 보지 말 것을 요구한다. 마치 없었던 시기처럼 그 시간대는 학술 금지 구역이 되고, 사유의 블랙홀이 되어 버린다. 과연 중국에서만 그럴까? ‘광주 민주화 운동’ 여전히 제대로 명명되지 못하고 있는 제주도의 ‘4·3’ 같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대한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의 태도는, 중국 당국이 문화대혁명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니체가 비판했던 것처럼 우리들은 지금 역사를 두고 감상해야 할 골동품처럼 여기거나, 아예 기념비화하여 고정시켜 버림으로써 더 많은 담론이 생성되는 것을 막고 있다.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처럼 역사적 사건을 한 개인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은 관방의 기억으로 통제되지 않는, 기억의 잉여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기억을 보며, 단일 관점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거대담론에 저항하는 태도일 것이다.
2008/10/29 11:35 2008/10/2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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