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책을 다시 내겠다구? 왜?"
2년 전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하 『사사방』, 책 소개 바로가기)을 재출간하자고 이진경 선생님(저자 소개 바로가기)께 말씀드렸을 때의 첫 반응이었습니다.
"내고 싶으니까요. 그러니까 내게 해주세요."
긴 대답 없이 그렇게만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몇 번 더 졸라서 『사사방』 출간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초판을 한글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일로 이 책의 편집은 시작되었습니다. 노트 2권 분량을 꽤 짧은 시간 동안 써내느라, 한동안 손이 아파서 고생하셨다고 하는데, 아무튼 그래서 입력된 파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입력이 완료되자 각각 다른 사람이 한 번씩, 모두 세 번에 걸쳐 누락된 부분이나 오자가 없는지 대조를 하고서 드디어 초판본의 한글 파일이 완성되었습니다.

『미-래의 맑스주의』(이진경), 『나비와 전사』(고미숙) 출판기념회
_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열린 『미-래의 맑스주의』출판기념회 모습입니다. 기사 제목이 「편집자의 집요함이 없으면 책도 없다」(구본준 기자)였죠 아마? ^^*
(이미지 출처_2006년 4월 16일자 한겨레신문)
_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열린 『미-래의 맑스주의』출판기념회 모습입니다. 기사 제목이 「편집자의 집요함이 없으면 책도 없다」(구본준 기자)였죠 아마? ^^*
(이미지 출처_2006년 4월 16일자 한겨레신문)
제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즈음, 수유연구실과 너머가 대학로에 함께 자리를 잡았던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90년대 초반 학번인 저에게 이진경이라는 이름은, 어떤 '전설'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꽤 두근두근 했습니다. 그날은 인사만 꾸벅 드리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채 그린비 사장님과 두 분이 말씀 나누는 걸 가만히 옆에서 듣고만 있었습니다. ('전설'의 인물이라기엔 너무 평범한 외모에 혼자 살짝 실망했던 기억도....^^;;)
그 이후로 수유연구실에 강의를 들으러 가면서 자주 만나고 얘기도 제법 많이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온 건물을 울리는 특이한 웃음소리와 간식을 탐하는 모습(흑, 선생님, 죄송해요. 그래도 진실은 밝혀야죠.)에도 익숙해졌고, 쑥스러움을 꽤 많이 탄다는 것과 하루의 대부분을 독서와 세미나 등 공부하며 보낸다는 것, 양말이 떨어지면 본인이 꿰매 신는다는 것과 옷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것(계절별로 한 벌씩밖에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등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진경 선생님의 저작들
_ 그의 사유가 진화하는 만큼, 그것을 담아내기 위한 책들도 진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의 초판부터 증보판까지, 『사사방』초판과 현재의 증보판까지.
_ 그의 사유가 진화하는 만큼, 그것을 담아내기 위한 책들도 진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의 초판부터 증보판까지, 『사사방』초판과 현재의 증보판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증보판+을 시작으로 『철학의 외부』(2002),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 『미-래의 맑스주의』(2006)를 만들면서 그가 현실사회주의 붕괴 뒤에 가졌던 의문과 고민들을, 한순간도 놓지 않고 풀어내려 애쓰고 있음을, 그 속에서 그의 사유가 어떻게 깊어지고 넓어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 철굴은 두 번 만들었습니다. 2001년에는 새로운 그림들과 캡션이 추가된 증보1판을, 2005년에는 저희의 제안으로 들뢰즈와 가타리 편을 추가시킨 현재의 증보2판을 만들었습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맑스주의가 불모의 땅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 불모의 땅을 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 그러나 미련스레 아직도 그 불모가 된 땅에 남아서 헤매듯이 길을 찾고 있는 바보 같은 유목민들이 적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떠나는 사람들은 종종 떠나는 용기에 대해 말한다. 낡은 이념을 버리는 것도, 새로운 전망을 찾아 떠나는 것도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물론 낡은 것을 버리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낡고 실패한 것을 버리는 데 무슨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단 말인가? ……실패를 던져 버리기보다는 그 거대한 실패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실패를 살아가고 사유하는 것이, '그나마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보증된 편안함보다는 아무것도 보장하진 않지만 또 다른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실낱같은 희망을 향해 삶을 거는 모험이 진정 용기라는 말에 값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 또한 …… 불모가 된 땅, 폐허가 된 '이념'의 대지를 헤집으며 새로운 혁명(!)의 꿈을 찾는 몽상가임을 자처한다. 그리고 그 몽상을 실험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그 불모의 땅을 새로운 창조의 공간으로 변환시킬 어떤 실마리를 찾고자 탐색하는 탐험가임을 자처한다.
(이진경,『미-래의 맑스주의』서문 중에서)
그 불모가 된 땅에 남아서 찾아낸 실마리의 첫번째 기록인 『맑스주의와 근대성』(문화과학사)을 뒤늦게 읽으며, 저는 이 사람의 첫번째 책을 다시 세상에 내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사사방』은 아직 대지가 불모의 땅이 되기 전의 것이었기에 어떤 간극이 존재하겠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그 땅을 떠나지 않고 '새로운 삶'에 대한 사유를 펼쳐온 것을 추가한다면, 우리 사회가 20년 동안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지는 물론이고, 그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사방』을 다시 만들면서 초판에 언급되고 인용되고 있는 80년대의 자료들을 모두 뒤지면서(헌책방 단골 고객으로 등극했습니다 ^^V), 그렇게 20년 전의 시간을 한동안 살면서, 저는 이 치열한 논의들이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이렇게 잊혀지고 있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당시 논쟁을 이끌었던 그 무수한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 혹은 남아 있어도 더 이상 사회과학 출판을 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당시의 자료들은 온 힘을 다해 '새로운 삶'을 위한 논쟁을, 자기 생각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사방』과 함께 치열한 시대를 살았던 텍스트들
_ 이 텍스트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직접적인 변혁의 방법론을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텍스트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_ 이 텍스트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직접적인 변혁의 방법론을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텍스트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사회를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 공부하고 사유하고 토론하는 그런 때가,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러고 싶다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방』을 만드는 동안 커진 그 소망을 제가 어떤 선생님들과 어떤 텍스트로 만들어갈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출판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진경은 오늘도 불모지에서 몽상을 실험하며 탐색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글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도 그렇습니다. 그의 생활은 자본주의적 소비, 자본주의적 욕망과 거리가 멉니다. 그가 책이나 음반 외에 무엇을 새로 샀다는 이야기를 지난 8년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아! 최근에 빨간색의 실내용 슬리퍼를 하나 구입하신 걸 보긴 했습니다). 허명에 휘둘려 어깨에 힘주거나 공부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친구를 무시하거나, 분노해야 할 사안에 대해 "다 그런 거야"라고 슬쩍 넘어가는 모습도 본 적이 없습니다.
원칙을 위해 싸우는 것도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원칙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제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본 이진경은 그렇게 사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묵묵히 고지식하게 불모지에 눌러 앉아 새로운 삶의 실마리를 찾고자 탐색하는 이 열정적인 학자의 사유를, 더욱 깊고 넓어져 갈 그의 사유를, 계속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고 소통할 수 있게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그의 책을 한 권 한 권 내갈 때마다 더 커져 갑니다.
* * *
덧붙임. 『사사방』 초판은 이진경이라는 저자의 이름만 가짜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
#장면 1
"선생님, 초판 출간이 1986년 2월인데, 본문에 인용된 글 중에는 1987년 3월에 나온 것도 있는데요……?"
"아, 그거, 원래 1987년 5월쯤 나왔는데, 그때 아침출판사가 『김형욱 회고록』 출간으로 출판 정지를 당한 때라, 출간연도를 속여서 인쇄할 수밖에 없어서 그랬어."
"……"-_-;;
#장면 2
"선생님, 3장의 각주 2번에 재인용 표시가 되어 있는 책을 찾아보니까, 그 페이지에는 인용하신 부분이 없는데요……?"
"아, 그거, 그 책에 실린 재인용은 다 가짜야."
"네?" -_-;;
"맑스나 레닌 글 인용할 땐 일부러 문제되지 않고 출간된 다른 책에 그 내용이 있는 것처럼 원전 표시 옆에 가짜로 재인용 책과 페이지를 넣은 거였어."
험한 시절, 험하게 태어난 책이었습니다(그 시절, 그렇게 태어났던 모든 책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증보판에서는 초판 출간연도와 인용 표시를 모두 바로잡아 놓았습니다.
- 편집 주간 김현경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하하^^ 초판본에는 여러가지의 비밀이^^
김강기명님 안녕하세요. ^^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연극을 봤는데 그 때 처음 전설이 된 초판을 발견했어요. 서점에서 재판 보고 좀 어리둥절 했는데 역시 좋은 의미가 담겨있었네요.
띠보님 안녕하세요. '책에도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불어 책도 '업데이트'가 가능하다는 걸 아주 잘 보여주고 있지요.
한번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다가 결국 이번에 재판으로 편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aidster님 안녕하세요.
편하게 잘 읽고 계시다니 저희야 말로 정말 감사합니다.^^*
어제 교보에서 증보판을 보았습니다. 초간에 비하여 양장에 두꺼워진 쪽 수와 많이 오른 가격이 눈에 들어 오더군요. 일단 며칠 시간이 나면 집에 있는 책을 한번 더 읽어 봐야겠습니다.
책을 보니 증보판을 만드는데 많은 수고와 노력이 들어갔음을 느꼈습니다.
한방블르스님, 안녕하세요. ^^
80년대의 '사회구성체론'과 지금 '사회구성체론'이 어떤 맥락에서 달라졌는지를 이야기하는 증보판 서문과 현시기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보론이 네편 추가되면서 초판에 비해 많이 두꺼워졌습니다. 초판을 보시고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증보판에 실린 글들을 읽어주세요! ^^*
아니 누가 지금 이 책을 본다고 이 책을 내?
아니, 각주, 그거 누가 찾아본다고 그리 정성스레 일일히 확인하며 하나하나 고치고 있어?
각주 단다고 다시 볼 것 같지 않은 옛날옛적의 책들을 그리 사 모을 거 까진 없잖아?
재판은 저자는 놀고 편집자가 고생했으니, 편집자 후기 달아내자니까...
등등에 대답하는 글을 쓸 줄 알았더니,
시덥잖은 넘 부추기는 글을 올려놓았네. 쑥시럽게시리....-.-;;
편집자의 생각이나, 편집자 고생한 얘기를 써 달라구여!--현경 상, 다시 써, 다시!
솔라리스님 안녕하세요. -_-; 이거 댓글을 우찌 달아야 할지 난감합니다...(전 정군임) 본문의 "『사사방』을 다시 만들면서 초판에 언급되고 인용되고 있는 80년대의 자료들을 모두 뒤지면서", "사회를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 공부하고 사유하고 토론하는 그런 때가,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러고 싶다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부분에 "편집자의 생각이나, 편집자 고생한 얘기"는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블로그의 이쪽(댓글란)말고, 저쪽(본문)에서 만나뵙고 싶사옵니다. 아하하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