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시대의 삶과 정치
국민이면서 국민이 아닌자들, '내부 난민'에 대하여



[ 2편 ]

'내부 난민'이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적 정부 하에서 국민이 자주 호명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국민)이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희생을 요구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국가 부도의 위험을 이유로 구조조정의 불가피한 희생자로 떠오르는 노동자들, 한미 FTA의 성사를 위해 희생을 요구받는 농민들, 재개발 지역에서 쫓겨나야 하는 주민들, 이 사람들은 국민 전체의 경쟁력을 이야기 할 때 경쟁력의 저해요소로 취급받는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이들은 전체의 부분인가? 아니면 사실상의 전체인가? 사실 '국민', '국가'는 이들의 '국민', 이들의 '국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들은 커다란 '주변'을 이루고 있다.

내부에 있으면서 '주변'으로 취급받는 이들을 '비국민' 또는 '내부 난민'이라고 부르자. '난민'은 그들을 돌보는 국가를 잃어버린 자들을 부르는 말이다. 국가 내부에 있으면서 국가 밖으로 이탈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내부에 있는 난민, 즉 '내부 난민'이다. 서구에서 80년대 중반부터 포기되기 시작한 케인즈주의와 그 자리를 대체한 신자유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국민국가의 배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배신'이 '비국민', '내부 난민'의 양산체제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떠오른다. 국민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할 부분으로 규정된 '비국민'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국민'의 표상이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한다. 즉, '비국민'을 양산하면서도 여전히 '국민'이라는 강력한 표상을 통해 지배하는 국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포의 체제에서 불안의 체제로

우리가 이 변증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주변-존재'로서 대중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이해해야 한다. 고전주의 시기에 국가가 가진 생사여탈권은 기본적으로 '살리는' 권리가 아니라 '죽이는' 권리였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것을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 두는 권리"라고 불렀다. 군주가 누군가를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 그 권리가 행사된다. 따라서 절대왕정의 군주가 가진 통치력의 범위는 그의 눈에 보이는 거리까지, 즉 가시권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눈에 보이는 누군가를 가리키며) "저자를 죽여라!"라는 명령을 할 때에 그의 통치력의 범위가 드러나는 것이다.

반대로 근대권력은 기본적으로 인구를 살게 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인구의 건강과 복리를 증진하는 것이 권력의 관심사인 것이다. 이렇게 착한 근대권력 하에서 어떻게 '대량학살'이 가능했을까? 그 물음의 힌트는 '인구'라는 표현 속에 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어떤 자者' 였던 것이 근대에는 '인구'라는 표현으로 바뀐다. 즉 근대권력의 관심사는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인구'라는 하나의 '종'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 '종'을 보존하기 위해 살아야 할 것과 죽어야 할 것을 가르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근대권력의 속성을 고전적 권력의 속성과 대비하여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리"라고 부르자.

한미 FTA협상 과정에서 정부가 끊임없이 구사한 수사를 기억해 보라. 그들은 "이것이 국민 모두가 살길"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제발 우리를 살려달라"는 외침과 극명한 대칭을 이룬다. 저 외침은 촛불이 타오르던 광장에서, 농촌에서, 공장에서,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들은 '국가'를 잃어버린 '국민'이었다.

독일의 사상가 아렌트의 말을 빌려보자. 어떤 나라에서든지 나라를 잃은 난민들은 충성심 높은 국민을 연기한다고 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독일에서 프랑스로 넘어온 한 유대인이 프랑스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독인에서 이제껏 훌륭한 독일인이었습니다. 이제 프랑스에 왔으니 훌륭한 프랑스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난민들이 어느 나라에서든 그 나라에서 그 나라 시민보다 애국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그 나라에서 커다란 존재의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존재의 불안을 느끼는 대중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를 견지한다. 삶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사태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다. 국가를 잃어버린 '내부 난민'들인 우리들은 항구적인 구조조정, 삶의 터전으로부터의 내쫓김 등을 겪으며 '불안'을 신체에 각인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중심부로 진입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잃어버린 자들의 미래


우리는 '합의에 의해 배제된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홈리스'가 아닐까? 니체는 "영예로운 의미에서 자신을 실향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의 운명은 가혹하고 그들의 희망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위안을 준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이 과도기의 현실이 지속되리라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의를 통해 우리를 배제하는 장 속으로의 '난입'은 불가피하다. (배제하는) 낡은 질서의 상실이 예속의 조건이 될지, 자유의 조건이 될지는 '우리, 잃어버린 자들'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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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9:31 2008/11/1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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