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시간’ 탄생의 일화—해상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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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입구역에서 광화문까지 '환승시간 제외하고'  16분, 서울서 도쿄는 2시간 10분
_ 공간도 시간으로 환산되는 '근대적 시간'은 어떻게 탄생하게 된 것일까?

세상은 온통 시계와 시간표로 이뤄진 건 아닐까? 잠자기 전 꼭 알람시계를 맞춰 놓는 근대적인 습성, 아니면 낮 12시가 되어야 배가 고파지는 ‘근대적인 식욕’은 우리가 온통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건 아닐까? 맞춰 놓은 알람 소리에 휴대폰의 시간을 들여다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허겁지겁 출근해서는 회사의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면 컴퓨터 속 시간을 흘긋거리는 삶. 집에서 회사까지 자전거로 15분.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웹서브웨이를 검색하면 홍대 지하철역에서 광화문까지 ‘환승시간 제외하고’ 16분. 서울서 도쿄는 2시간 10분. 뭐 어쩌다 서울서 부에노스아이레스쯤 가려면 23시간! 거리도 시간으로 환산되고, 가치도 시간으로 환산되고, 심지어(or 말할 것도 없이) 인간도 시간으로 환산되는 세상. 지금이야 모두가 똑같은 시간 속에서 그 시간이 구획하고 있는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어디 근대 이전에도 그랬을까? 사극 보면 나오듯이 “달포 뒤에 마포나루 주막에서 보세” 하면 보는 것이고, “보름 있다 봉평장에서 보세” 하면 보는 것이지 뭐 특별히 시간을 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성싶다. 그렇다고 특별히 불편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15세기 이후 유럽 사람들은 이 ‘시간’이라는 놈을 어찌하지 못해 무척이나 힘들었나 보다.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은 곧 자신이 위치한 ‘경도’를 알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 대항해시대.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콜럼부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등 세계를 약탈하기 위해(혹은 그 길을 열기 위해) 바다로 나섰던 이들은 하나같이 ‘갈팡질팡하다가 간신히 목적지에 닿았고, 그때마다 무사한 걸 신의 은총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니 저리 ‘쟁쟁한’ 이름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도 저들이 항해를 잘해서라기보다 우연히 살아남은 덕이랄까? 어쨌든!! 문제는 경도와 위도였다. 그 중에서도 위도는 태양이 가장 고점을 찍었을 때의 각도로 바다 위 어느 곳에서나 쉽게 파악되었지만, 경도 문제는 그렇게 녹록지가 않았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그리니치가 본초 자오선이 되기 전에는 배의 위치를 ‘어느 도시에서 동쪽으로 4도 지점’ 식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별자리의 위치나 항해 시간 등으로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는 경도 때문에 항해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위치를 오판했고, 망망한 바다에서 이런 오판은 쉽게 죽음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예기치 않게 닥친 육지나 암초로 좌초하거나, 기항지를 찾지 못해 오랫동안 망망한 바다를 헤매다가 괴혈병과 굶주림으로 죽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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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롱스 피네, <세계 지도>
_ 위도선과 경도선이 사용된 것은 지표면에 존재하는 모든 지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본초자오선—경도가 0도인 자오선—은 지도 제작자가 임의로 정할 수 있었기에 경도를 판정하는 것은 대단히 정치적인 문제였다.

『경도』는 이렇게 바다 위에서의 경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럽인들(특히 영국인들)의 노력을 다루고 있다. 1707년 10월 영국 전함 4척이 경도 판단 오류로 영국 본토의 코앞에서 좌초하여 2,000명 가까운 생명이 수장된 사건 이래로, 영국에서는 경도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다. 1714년에 경도 문제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는 상인과 뱃사람들의 탄원서가 앤 여왕에게 전달되었고, (무려!!) 뉴턴과 핼리(혜성을 발견한 그 핼리!)의 조언에 힘입어 ‘경도위원회’가 탄생한다. 이 경도 위원회는 20,000파운드(현재 화폐가치로는 수백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현상금을 걸고 ‘경도 문제에 대한 실행가능하고 유용한’ 방법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공식적으로 해결책이 논의되기 이전에도 많은 방법들이 거론되고 있었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이래, 경도가 일반에게도 워낙 중요한 문제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인데, 그 방법이라는 것들이 대체로 황당한 것들이었다. 특히 ‘교감의 가루약’은 독특하다. 케넬름 딕비 경의 발상으로, 상처를 멀리서도 치료할 수 있다는 ‘교감의 가루약’을 이용하여 경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교감의 가루약은 환자가 가지고 있던 물건(가령, 감고 있던 붕대나 다치게 한 칼)에 이 약을 뿌리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마법의 약인데, 다만 이 치료에는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 그러니까 출발지에서 다친 개를 배에 태우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그 개를 감싸고 있던 붕대나 다치게 한 칼에 교감의 가루약을 뿌린다. 그러면 개는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고, 배에 있는 사람들은 출발한 지역의 시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이유로 항해 동안 계속 개에게 상처를 내는 일도 있었을 거라고 한다). 이밖에도 바다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대포를 실은 배를 고정시켜 놓고 일정한 시간마다 멀리서도 들리도록 포를 쏘면 지나는 배들이 이를 기준으로 경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발상(이는 바다 위에 배를 고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고, 그 배에 사람이 근무하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무시되었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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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거법(페터  베네비츠의 『지리학 개론』 삽화)
_ 십자측고의를 사용해 달과 별의 각 거리를 측정하는 모습.

실현가능해 보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우선 ‘월거법’. 이는 천문학적 관찰을 통해 경도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가령 마드리드 시각으로 자정에 개기월식이 발생할 예정이고, 서인도 제도로 향하던 뱃사람들이 약 11시 정각에 그 현상을 관찰했다면 그들은 마드리드보다 1시간 빠른 곳, 즉 마드리드에서 서쪽으로 15도 떨어져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런 식으로 천문현상을 이용하자는 것인데, 개기월식과 같은 경우는 특별하기 때문에 실용적이지가 않다. 따라서 더 흔하게 관찰할 수 있는 달의 이동 궤적을 이용하자는 것. 달이 특정한 별을 통과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경도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월거법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기상상태가 좋지 않거나,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써먹을 수 없는 방법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항성들의 위치와 달이 각각의 항성을 스쳐 지나가는 시각을 미리 예측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천문학자들이 경도를 찾아내기 위해 택한 방법은 수십 년 동안 항성과 달의 움직임을 관찰 기록하여 도표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고 한다.(영국의 초대 ‘왕실 천문학자’인 존 플램스티드는 이 일에 40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방법은 바로 해상에서도 정확하게 작동하는 시계를 만드는 것. 지금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18세기 초만 해도 이런 시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져 왔다. 당시 시계라고 하면 대부분 진자시계였는데, 진자시계는 우선 배의 흔들림조차 극복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항해 중의 극심한 기온 차는 진자 길이나 시계에 쓰이는 윤활유의 상태 등에 영향을 주어 시계를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곤 했다. 당시 수도 런던의 난다긴다하는 시계공들도 극복하지 못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한 것이 바로 독학으로 기술을 익힌 존 해리슨이라는 시계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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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해리슨의 해상시계 H-1(좌), H-4(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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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흔들려도 진동 속도가 달라지지 않는 해상시계. H-4는 존 해리슨에게 경도상을 안겨주었다. 해리슨은 이 H-4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감히 말하건대, 이 세상의 수많은 기계와 정밀한 기구 중에서도 나의 이 경도시계에 필적할 만큼 아름답고 절묘한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시계 덕분에 시공간이 계산가능한 '근대적 세계'가 탄생했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해상에서도 정확하게 작동하는 시계. 해리슨이 이런 꿈의 기계를 만드는 과정은 한마디로 자연의 힘을 하나하나 극복해 가는 과정이었다. 우선 흔들림을 극복하기 위해 진자 대신 스프링식 시소장치를 채택하고, 기온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 종류의 금속을 이용한 석쇠형의 부품을 사용했다.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 처음에는 기름을 칠 필요가 없는 유창목(油艙木)을 사용했고 이후에는 오늘날 볼 베어링의 원조가 된 롤러 베어링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탁월한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존 해리슨은 H-1에서 H-4에 이르는 네 개의 시계를 만들어 냈고, 그 중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H-4가 해상시험을 통과하게 된다. 물론 하늘의 질서를 그 조그만 기계 하나로 알 수 있다는 데 반발한 천문학자들의 방해가 있었지만, 존 해리슨은 결국 ‘경도상’을 받아 노력의 보상을 받는다는 이야기.

이렇게 해서 지구 위에는 분명한 위도와 경도가 그어지게 되었고, 이제 해상시계를 실은 배들은 거침없이 이 그물코 사이를 누비고 다니게 되었다. 동인도 회사의 상선도, 영국의 군함도. 이 배들이 자신이 만든 시계 덕분에 안심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예와 금을 실어나르고, 인도를 다스리기 위한 군대를 실어나르고, 중국으로 아편을 퍼나르게 될 거라고 ‘순박한’ 시계공 존 해리슨은 알았을까? 게다가 배들이 전세계로 실어날랐던 것은 노예나 아편만이 아니었다. 바로 근대적 합리성. 해리슨의 시계 덕분에 시간은 공간으로 공간은 시간으로 치환될 수 있었다. 세상은 계산가능한 것이 되었다. 천문학자들이 ‘월거법’을 통해 이루려 했던 것처럼 하늘의 질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의해서…. 위도와 경도의 그물이 지구에 온전하게 펴지자마자 개별 장소의 특이성은 사라지고, 지구의 어느 곳이든, 기후나 지형 같은 자연적인 제약과 상관없이 정복·이용이 가능한 것으로 상정되었다. 바로 이렇게 3차원의 세계를 환산하는 4차원의 ‘시간’, 이후에 인간의 삶까지도 모두 구획하게 될 이 ‘시간’이 ‘근대’라는 무대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한 것이다.

— 편집부 박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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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14:59 2008/11/1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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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HappyGeo의 생각

    Tracked from happygeo's me2DAY 2008/11/19 00:54  삭제

    세계의 시공간을 계산하는 시계의 탄생 - 내 삶을 지배하는 물건 중 하나, 시계!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지리상의 발견, 제국주의의 확대, 근대 교통(철도)의 발달… 이런 모든 것들과 시간-공간의 강력한 결합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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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루 2008/11/15 08:30

    경도 책이 다시 나왔나 보군요. 작년에 후배녀석에게 책을 빌려줬더니만, 하도 탐내서 한 권 사주려고 했더니 절판이더니.. 참 재밌게 본 책입니다. 존 해리슨의 이야기는 TV미니시리즈로도 제작되어서 아마 '집념'이란 제목으로 EBS에서 방송했던 것으로 기억나네요. 이 책을 아시는 분이 있다니, 참 반갑네요.

    • 그린비 2008/11/17 11:25

      나루님, 안녕하세요.
      여전히 절판입니다. 흑.

  2. 사용인 2008/11/15 11:06

    잘보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

    • 그린비 2008/11/17 11:25

      사용인님, 감사합니다. ^^*

  3. 레몬에이드 2008/11/17 10:06

    이야 이런 시계나 시간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신기하면서도 재밌는것 같아요 ^^
    오랫만에 들렀다갑니다 ㅎ

    참... 생업에 쫓기다보니 호모부커스 프로젝트를 완수하지 못한... ㅠㅠ

    • 그린비 2008/11/17 11:26

      레몬에이드님, 반갑습니다!

      '호모 부커스 프로젝트' 말고도 앞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마련할 예정이니 다음엔 꼭 참여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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