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과 유령의 존재론
황석영의 『손님』과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오하나 (연구공간 '수유+너머')

자자, 이젠 돼서. 그만들 가자우.
순남이 아저씨의 헛것이 말했고 일랑이도 그 옆을 따른다.
그래, 가자우.
다른 남녀 헛것들도 벽에서 스르르 일어나 바람에 너울대는 헝겊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득하게 먼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로 죽이구 죽언 것덜 세상 떠나문 다 모이게 돼 이서.
요한이 아우에게 말했다.
이제야 고향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두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 간다, 잘들 있으라.
(황석영, 『손님』, 길 가르기-이별- 중에서)

황석영의 『손님』은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고, 그 손님을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며, 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귀신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귀신, 혹은 유령이란 있는 걸까 없는 걸까? 명절날의 제사가 그렇고 때로 우리는 잡귀를 쫓기 위해 푸닥거리를 하기도 하고 원혼을 달래기 위해 굿을 하기도 한다. 돌아보면 농담이나 심심풀이 수다의 소재에 이르기까지 유령, 귀신, 허깨비, 환영이 등장하지 않는 곳이 드물 정도다. 유령은 이미 죽었지만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후에 또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어디 시간에도 속하지 않고, 어느 공간에도 묶어둘 수 없다. 규정 불가능한 존재.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그보다 먼저, 잘 알려진 리얼리즘 소설가 황석영이 말하는 귀신은 어떤 모습일지, 위의 인용과 함께 좀 더 살펴보자.

1. 손님과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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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作 <한국에서의 학살>
_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목도하고
『손님』을 집필한 황석영과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린 피카소. 이 두 작품 모두 신천 대학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피카소는 프랑스공산당(PCF) 소속이었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미군의 행동을 고발하려 했다고 하죠.)

소설 『손님』의 배경은 한국전쟁이지만, 글쓴이가 작품을 구상하게 된 배경은 방북 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목도하면서라 한다. 그리고 그는 ‘무릎팍 도사’에 초대 손님으로 나와『손님』을 집필하던 당시를, 이남과 이북의 경계 위를 비행기에 떠 있는 심정으로 써내려갔다고 회고한다. 그는 말한다. 한국전쟁 당시, 마르크스주의라는 ‘손님’과 기독교라는 ‘손님’이, 저마다의 견고한 해방의 약속 때문에 결국 살육의 광기를 부르고 말았다고. 『손님』에서 그는 이를 6·25 신천 학살 사건의 모습으로 다시 불러낸다. 소설은, 목사 요섭에게 이미 죽어 잊혔던 이들이 귀환하며 시작된다. 그의 형인 요한을 중심으로 유령들은 요섭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저마다 이승을 사는 자들이 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던진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들 유령들의 기억을 하나씩 밟아가며, 유령들의 기억들을 저마다 상속한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유령은 대개 상처로 인해 원한을 갖게 된 자들의 혼이다. 그들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 상처 때문이다. 원한의 상처가 지워져야 그들은 비로소 떠날 수 있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손님』에서도 그렇다. 소설은 진지노귀굿의 마당 순으로 옷 태우기, 넋반, 뒤풀이 순으로 푸닥거리를 하고 마침내 이승을 떠돌던 유령들을 떠나보낸다. 이로써 유령들이 떠나 ‘깨끗하게 정화’된 땅에서 비로소 새로운 세대의 정치가 시작된다.

 “갈 사람들언 가구 이제 산 사람들언 새루 살아야디.
저이 태 묻언 땅얼 깨끗하게 정화해야디 안카서?”
(황석영, 『손님』 중에서)

그런데 데리다는 이를 다르게 말할 것 같다. 이미 상처가 될 균열이 있었던 것이고 그 균열의 틈새로 이국의 귀신들이 들어온 거라고. 어떤 문제가 있는 한 귀신은 들어오게 마련이며 쫓아낸 귀신 또한 되돌아오게 마련이라고.

2. 마르크스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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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의 붕괴
_ 황석영과 데리다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라는 역사적 현장에서 각각
『손님』『마르크스 유령들』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지금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붕괴는 마르크스 유령을 다시 불러옵니다.

데리다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보며 유령에 대해 사유한다. 데리다는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속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보았다. 실제로, 세계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라는 도취감에 빠져있을 때 마르크스주의는 분명 유령과 같았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신이 발 디딜 땅(국가라는 형체)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육체는 죽어 없어지고, 정신만 남아 유령이 되어 떠돌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2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사태는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지금 다시 마르크스를 말하는 것은 더 없는 시대착오로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도 마르크스야?”  

그런데 여기,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한 마르크스가 되돌아왔다. 미국에서 시작된 거대한 경제위기, 그러니까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붕괴와 함께. 경제위기 덕분에 『자본론』이 다시 팔리기 시작하고, 맑스의 이론을 경제이론가들이 다시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그간의 거듭된 푸닥거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랬듯이 마르크스는 유령이 되어 되돌아온 것이다. 황석영이 역사 속에서 보았던 귀신들은 원한 때문에, 상처 때문에 되돌아왔다. 귀신이나 마르크스의 유령 모두 무언가 풀리지 않아서 되돌아온다. 그러나 귀신은 상처입은 원한이 풀리지 않아서 되돌아온다면, 마르스크의 유령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되돌아온다. 그러니 귀신이나 유령에는 아주 다른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풀리지 않은 상처와 원한으로 인해 되돌아오는 것과 풀리지 않은 문제로 인해 되돌아오는 것이. 따라서 나는 전자를 귀신, 후자를 유령이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노동절에 모여 전태일을 불러오고, 청계광장에 그의 상의 세우는 것은, 그가 품었을 원한 때문도 아니요 그를 단지 애도하기 위함도 아니다. 이처럼 유령이 되돌아오는 문제가 원한이 아닌 구조적 모순에 있다면, 푸닥거리는 오히려 모순에 대한 하나의 거듭되는 증상이 될 것이다.

3. 유령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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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유령 캐스퍼>
_ 어떻게 해도 떨치기 힘든 유령, 우리의 캐스퍼(^^;)
우리는 이렇게 유령과 함께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환영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 ... 유령들과 함께 존재하기는 ..."

흔히들 마르크스는 인민을 미혹케 만드는 유령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 종교, 물신숭배를 혁명으로 극복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마르크스야말로 어떻게 해도 떨치기 힘든 유령이라고 한다. 마르크스는 유령이 되어 반복하여 우리에게 출몰한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그가 살던 시대의 유럽에 출몰했던 것처럼. 그래서 데리다는 유령에서 정치를 사유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환영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 ... 유령들과 함께 존재하기는 ... 기억과 상속, 세대들의 정치일 것이다.”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머리말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불러내면서, 그를 단순히 상속하지 않는다. ‘유령과 함께 존재하기’ 그것의 ‘기억과 상속, 세대들의 정치’란, 유령처럼 끊임없이 돌아오는 균열 속에서 그것을 전복할 가능성을 탐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자동적 승계가 아니라 선택이자 재긍정의 형식으로 마르크스를 초혼招魂할 것이다. 강고해 보이는 이 시대의 질서 사이에서 균열을 보자. 끊임없이 돌아올 ‘마르크스의 유령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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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9 10:56 2008/11/1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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