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도서출판 그린비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 또다시 '이책하고 인사하실래요?'가 여러분을 찾아뵙습니다.
처음 보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 카테고리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희 그린비의 식구들이 책을 읽고, 소감이나 서평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그 책을 독자 여러분들께 추천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당연히!)그린비의 책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책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책을 좋아하신다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면, 즐겨찾기RSS 구독을 잊지않는 센스!
부탁드립니다. ^^;

그럼 지난 주에 벌써 이 지면을 낙찰(^^;)받으신 강혜진씨의 글, 시작하겠습니다!


1. 옛날 이야기 하나

20살..그날은 술자리였다. 동향 친구들끼리 만나 외로운 서울 생활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며 안주 없이 술만 퍼마시던 때였던 것 같다. 나는 남자친구들에게 18살에 우리가 먹어야 했던‘순결 캔디’를 너네도 먹었냐고 물었다.(난 순결 캔디 먹는 것을 거부했다. 그 대신 선생님께 “아무하고나 자겠다는 거냐?”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들이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무슨 순결 캔디?’ ‘뭐야 그 핑크색 있잖아. 선서도 하고..기억 안나?’ ‘기억 안나는 게 아니라 그런 걸 왜 먹어. 먹으라고 한 적도 없어~’ 반골이라고 선언하기엔 워낙 제도 교육에 순응적이었던 인간이라 학교 교육에 대한 큰 불만은 없었다. (물론 남들이 가지던 체벌, 강제 야자, 두발 자유, 선생들의 성인지적 관점에 대한 무지 같은 것은 나도 예민했다 흠흠..) 나름 평등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나 모르는 곳에서 내 기대를 배반하고 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남성과 여성이 의무교육 안에서 받는 커리큘럼이나 특별 교육들이 아주 조금씩은 사회적 성별을 만들어 가는데 봉사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2. 여성어가 있는 곳


『섹시즘-남자들에 갇힌 여자』들은 현란한 이론으로 독자들을 정신 없게 하는 책은 아니다. 신문, 어휘 같은 실질적 언어 사용 예들을 분석하여 생각하지 못했던 언어 환경이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읽기에도 어렵지 않고, 단락들은 치밀하게 붙어 있기 보다는 느슨하게 떨어져 있다. 그런데 문장들이 아주 힘이 세다. 난 처음 읽을 때, 저자의 질문에 머리를 한 대씩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굳어버린 생각들을 강하게 후려친다. (특히 자신이 언어와 여성은 상관 없다고 믿었다면 이 책을 읽고 더 충격이 클 것이라 믿는다)

나도 질문을 던져 본다.

“ 노동자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 의사와 간호사를 생각해 보자. 의사와 간호사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선 우리가 너무 흔하게 들어서 차별이라곤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휘들을 분석한다. 앞서 질문했듯 노동자하면 떠올리는 것이 힘들게 일을 하고 난 후 고단한 표정을 짓는 남성이다. 우리가 여성을 떠올리기 위해선 ‘여성 노동자’라고 일부러 지칭해 줘야 한다. 의사와 간호사에선 우리의 고정된 이미지가 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의사는 남성, 간호사는 여성이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 이런 분석에서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일반 명사들은 거의 남성의 영역이다. 일반 명사에 여성은 들어 있지 않다. ‘여성 노동자’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여성은 어떤 특수한 집단일 뿐(언어 속에서)이다. ‘의사와 간호사’의 예는 ‘여성 노동자’의 예와는 조금 다르지만, 더 큰 문제를 드러낸다. 직업을 나타내는 말 중에 간호사처럼 여성이 차지하는 일반 명사들은 사회에서 단순 업무, 보조 업무, 저임금을 의미한다. 또한 남성이 자리를 차지하는 직업들은 전문성이나 권위를 연상시킨다고 분석한다. 혁명이 일어났던 나라이기 때문에 프랑스가 여성권익을 더 생각할 것 같지만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다. 특히 프랑스어는 그런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를 몇 가지 갖고 있다. 프랑스어는 우선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남성 명사, 여성 명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기준은 남성 명사다. 여성 명사는 남성 명사에 ‘e'를 덧대서 만들기에 한국어에서 ’여성‘이라고 붙여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변호사, 의사의 경우 아예 여성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미 어휘 안에서 여성이 끼어들 자리를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3. 여성은 이미 배제되었다


“그래서 뭐?”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여성형으로 굳어진 단어들은-불어뿐만이 아니라 한국어에서도 보모, 간호사, 가정부들은 거의 대부분 여성의 직업이라고 생각된다, 높은 직위에 올라가면 ‘여’라는 단어를 붙여 줘야 한다-사회에서 저임금혹은 대우받지 못하는 영역을 가리키는데 정말 그런 일들이 아무 쓸모없고, 무의미한 일이어서 그런 것일까? 사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 환자를 돌보는 일도 기술과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기술과 지식이라는 말도 사실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p55) 기술과 지식과는 다른 층위에 있지만 사랑 역시도 성편향적인 언어의 포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연인 사이의 애칭 사용이 위계 관계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우선 애칭은 동물, 먹을 것, 유아적인 것들로 이루어진다. 또한 애칭은 여성이 남성에게 사용하기 보다는 남성이 여성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사실 이러한 애칭은 애정을 빌미로 교묘한 차별을 숨기고 있다. 애칭이 사용되는 층위를 보자. 모두가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주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언어 속에서 여성은 온전한 사람이라기 보다 동물과 먹을 것과 어린 아이들에 가깝다. 그런 언어의 연결들은 어느 것이 먼저 인지 알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있다. “사랑하는 남자가 ‘내 병아리’라고 했을 때 성차별적이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여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p70)”라고 저자는 묻지만, 어느 누군가는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게 여성의 위치를 교묘히 고정시키고 있는 언어의 매듭을 풀어야 여성은 자신의 위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4. 여자는 뭘 해도 후져!!


이것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여성들의 언어를 보는 시각 자체가 굉장히 성편향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도 이 책이 가진 미덕 중에 하나이다. 캐롤 길리건이 『다른 목소리』에서 남성과 여성이 다른 맥락의 도덕 교육을 받는다고 주장하기 전까지는 모두가 여아들은 뭔가 열등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그런 시각은 여성 교육 문제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저자는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여성이 사용한다고 하면 바로 열등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비판한다. 한국도 그렇고 외국도 그렇고 여성들은 방언 보다는 표준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그 이유가 뭘까?” 라는 질문에 트러질(Peter Trugill)이란 학자는 남성에 비해 여성들이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그것을 의식하고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을 쓰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일종의 보상심리로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표준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p242)(물론 트러질의 생각 속에는 ‘표준어와 방언 중에서 표준어가 더 낫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 다른 주장은 여성이 자녀 교육에 깊이 관여하기 때문에 자녀를 의식해서라도 표준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사실 둘 다 증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내용이다. 여기엔 여성의 언어 습관을 보는 학자들의 태도가 이미 들어가 있다. 남성 보다 여성이 상황에 맞춰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더 많은 능력이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텐데, 그냥 보상심리, 자녀교육 정도로 여성의 표준어 선호를 해석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 익숙하지 않은가? 이런 해석은 우리 주위에도 흔하다. 남자도 남자의 적이지만, 유독 ‘여자의 적은 여자’, ‘여자에겐 진정한 친구가 없다’ 뭐 이런 말이 더 많이 들린다. 이런 말들은 여성이 함께 무엇인가를 공동으로 꾸려가게 만드는 경험을 막아 버린다. 이런 말 덕분에 여성들은 남성 한 세 배(倍)이상을 관계 유지에 노력해야 한다. 사소한 실수 하나가 세상의 통념을 서로에게 확인시켜 버리는 일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도 분명하지 않는 말 들이 많은 여성들 관계의 폭을 한계지어 버린다. 
언어는 여성을 차별한다.(p367) 법도 차별하고, 세상도 차별하고, 이젠 언어마저!!하겠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 차별 정도가 아주 심각해서, 느끼지도 못할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 사소한 말하기가 큰 변화를..


언어는 이성(logos)이기에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믿었지만, 언어도 내 편이 아니었다.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언어가 무의식처럼 우리 안을 구조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언어 속에 꼼짝없이 갇혀 다른 삶을 꿈꿀 수 없다면 우리는 삶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언어로 포섭되지 않는 웅얼거림을 통해서 말하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그 어떤 것도 해답은 되지 않았다. 이 세상 속에선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저자는 내 이런 질문에 대해 ‘말하기’란 답을 내놓는다. 다른 여성학자들은 이제까지 ‘글쓰기’에 집중했는데 말하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저자에게 언어는 열려 있다. 언어를 둘러싼 이데올로기가 어느 누구의 손에 있느냐가 문제지 언어 그 자체는 여전히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의 말하기는 이제까지 시끄러운 수다로 폄하되어 왔다. 다른 언어권에서 조사한 바로는 실제 여성 보다는 남성들이 훨씬 더 말을 많이 한다는데 오히려 여성의 말하기가 ‘수다’라고 낙인찍혀 왔던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사회에서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남성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수다’라는 낙인이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여성에게 말하기는 더 중요해 진다.

여성의 말하기는 열려 있다. 말하기 속에서 대화는 끊임없이 오고 간다. 여성의 말하기 안에선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입을 막거나, 귀를 닫는 일은 거의 없다.  여성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진실을 만들어 내고, 또 그것을 나눈다. 또한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언제든지 타인의 이야기를 수용하기에 순간순간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장이다. 그래서 여성의 말하기는 monologue가 아니라 dialogue라고 저자는 결론 짓는다.

헉..이렇게 열심히 따라 왔는데 저자의 결론이 너무 빈약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나 역시도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 책이 지닌 가치가 작아지거나 약해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저자가 지적한 문제들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가 없다. 특히 저자가 처음에 지적한 부분들-여성이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여성 스스로가 모순에 빠지는 경우가 생긴다-라는 말은 여성이 여성 스스로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그럼 이젠 어떻게 차별과 배제가 아닌 평등과 열림의 언어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 지점부터는 온전히 우리의 고민과 실천이 녹아 들어가야 할 부분이다.

『섹시즘-남자들에 갇힌 여자』은 대학교 3학년 때 만난 책이다. 그땐 거의 이 책에 미쳤었다. 누구든 만나면 읽으라고 권했고, 한동안 여기 나오는 예들을 외우면서 살았었다. 덕분에 내가 사용하는 말들에 대해 꽤 많이 민감해졌다고 나름 자부한다. 다시 읽어 보니 처음 읽을 때 느꼈던 강렬함은 오지 않았지만, 느슨해졌던 나의 언어를 점검할 수 있었다. 아직도 나에겐 감수성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교재로 남아 있다.


다음은 출판 학교 시절 좋은 목소리로 여성들을 팬으로 만들어 버린 그 분 입니다. 여성적 말하기를 하는 데 성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보여 주시기도 하셨지요. 사회학도라고 하지만, 오히려 예술에 관한 책을 더 많이 읽고 있답니다. 어떤 책을 얘기해 주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진승우씨! 다음 바통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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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부 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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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즘 - 남자들에 갇힌 여자
정해경 (지은이) | 휴머니스트

출간일 : 2003-07-21 | ISBN(13) : 9788989899563
반양장본 | 373쪽 | 223*152mm (A5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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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7 11:25 2007/09/0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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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발 2007/09/07 13:04

    한가지만 알자.
    세상에서 여성을 차별받게 만드는 건 남성이 아니라 다른 여성이라는 것을..
    예를들면 나 시집갈래 하고 직장을 아무렇지 않게 뛰쳐 나가는 여자들 때문에
    진짜 일하려는 여성이 취직하기가 힘들어 지는 것이다.
    남성과 사회를 계몽하려고 하지말고 다른 여성을 계몽하라.
    그러면 모든게 해결된다.

    • 그린비 2007/09/07 16:58

      저... 이거... 혹시... 악플인가요? ㅡㅡ;;;;

    • 아직도 2007/09/28 21:20

      이런말을 하시는 분이 계시네..-_-

    • 쩝. 2008/09/07 15:37

      역시 이 사회엔 섹시즘이 너무나도 깊게 파고 들어 이런 말을 한다는 거 자체가 은근히 여성을 무시하고 성차별하고 있다는걸 깨닫지 못하는군요;

  2. 루인 2007/09/07 14:41

    음...남성적인 단어와 여성적인 단어, 그리고 중성적인 단어가 존재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 있죠.
    그런 이유는 아마 언어가 생기면서 단어가 만들어질때 대부분 그 단어(예를 들어 명사-직업이나 기타 등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남성이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합니다.그나마 우리나라 언어인 한국어는 그 양이 적다고 제 나름대로 생각합니다. 비약하자면 독일어는 남성, 여성, 중성의 단어와 동사가 있다고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기억이 나네요. 일본어를 배우진 않았지만 일본어도 남자가 사용하는 언어랑 여자가 사용하는 단어(단어나 어투, 어감등...)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회 직위에서도 남성들은 그냥 직위를 부르지만 여성들은 직위에 여~를 붙여서 사용하는 예가 많습니다. 물론 직위에 남성 여성이 어디 구분이 있겠습니까? 단지 아직은 남성에 비해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많이 부족(높은 직위나 계층에)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 그린비 2007/09/07 16:59

      대부분 언어를 개인적 습관의 문제나 문화적 관습의 문제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사실은 언어만큼 '권력'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도 없다고 봅니다. 루인님처럼 언어를 통해서 감수성 있게 사회적 맥락을 읽어낼 수 있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3. Trapezium 2007/09/08 05:04

    man이란 단어는 현대에 남성을 지칭하기도 하고, 인간이라는 집단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woman이라는 단어는 어원조차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예전 서양에서는 인간=남성 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단어들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단어들을 '교육'할 때 그러한 삽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가 내려온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먼저 시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 살아 생전에 바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 그린비 2007/09/10 10:05

      네, 많은 것들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그게 현실이겠죠.
      그래도 바꾸려고 무단히 애써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불평등의 현장, 곳곳에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