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와 괴물
―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로 『오셀로』 읽기


이명기 (연구공간 ‘수유+너머’)

오셀로에게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가 던지는 질문

『오셀로』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유일하게 연인 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그것도 잘못된 사랑인 불륜!(그래서인지 재미만으로 보자면 ‘4대 비극’ 중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저기 불륜이 넘쳐나는 불륜 홍수의 시대에 왜 새삼스레 불륜의 고전인 『오셀로』인가?  이 책에는 ‘착한 가족, 착한 연인’이 되라는 도덕적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통속적 불륜 이야기들을 넘어, 우리가 한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는 ‘사랑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문제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이하 『호모 에로스』)는 우리 시대 사랑에 대한 통념들을 들춰 내고, 그것들을 비판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의 방식을 제안한다. 이 책에서 내가 꽂힌(!)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이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시쳇말로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죽기 위해 사랑하는 인간은 없다.”(고미숙, 『호모 에로스』, 15쪽) 그런데 우리는 왜 더 잘살아보려고 하는 노력 때문에 비참해지는 걸까? 왜 사랑은 증오로 끝나야만 하는 걸까?(“부숴 버릴 거야!”) 도대체 왜, 우리는 사랑 때문에 불행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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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부숴 버릴거야!"
_ 현대판 셰익스피어 비극,
「청춘의 덫」의 한 장면. 이들은 왜 사랑 때문에 불행해지는 걸까?

사랑과 불행이라는 양가적 가치가 만들어 내는 역설적 질문. 이 ‘교묘한 결탁’에서 빠져나가는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랑이 “그 자체로 축복”이라면,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천국”이어야만 한다.(『호모 에로스』, 14쪽) 고로 사랑한다면 결코 불행해져서는 안 되는 법. 문제는 이 간단한 답을 취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거다. 사랑은 백마 탄 왕자님이, 꿈에 그리던 그녀가 짠~하고 나타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오셀로의 사랑의 말로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에로스의 화신에서 괴물로 변해 버린 오셀로.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셀로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서 그가 거짓말쟁이 이아고의 농간에 쉽게 속아 넘어갔기 때문에? 아니다!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셀로의 사랑엔 그들을 파국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었던 어떤 요소가 그 시작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에로스의 능력 ― 생성과 창조

사이프러스 섬에 투르크 함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베니스 공국 원로원은 혼란의 도가니다. 우왕좌왕하는 의원들이 한 목소리로 찾고 있는 사람은 검은 피부를 가진 용맹한 장군 오셀로. 그런데 그는 두 손을 결박당한 채 의원 브라반쇼에게 끌려 원로원에 나타난다. 이유는 그가 브라반쇼의 딸 데스데모나와 비밀리에 혼인을 했기 때문. 브라반쇼는 온갖 호사스러운 혼처를 마다한 데스데모나가 그와 혼인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마도 이 무어인이 그녀에게 추악한 마법을 부렸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는 사이프러스에 달려가야 하는 오셀로를 “금지된 불법 마술을 쓰는 자”로 원로원에 고발한다.(셰익스피어, 『오셀로』, 1막 2장)

데스데모나가 나이나 신분, 심지어 인종의 벽까지도 넘어서게 만든 오셀로의 마법은 다름 아닌 ‘이야기’였다. “이것이 제가 쓴 유일한 마법입니다."(오셀로) 그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을 들려 줬고, 이에 그녀의 마음은 그에게 “최대의 기쁨을 줄 만큼 정복되었”던 것이다. “전 이 무어인을 사랑했고 함께 살 것임을, 제가 철저하게 규범을 깨뜨리고 운명의 여신들을 조롱한 사실로 온 세상에 알립니다. …… 전 오셀로의 얼굴을 그의 마음에서 보았고 그의 명성과 그의 용맹스런 자질에 제 영혼과 운명을 헌납하였습니다.”(데스데모나) 사랑을 위해서라면 앞으로 닥치게 될 험난한 운명들도 모두 감내하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오셀로를 따라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장터로 가겠다고 나설 정도로 그녀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던 예전의 데스데모나가 아니었다.

데스데모나가 잘 보여 주듯이, 에로스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축복은 바로 생성과 창조의 능력이다. 사랑에 빠진 우리의 신체는 더 없이 민감하고 유연해진다. 평소엔 무심코 스쳐 지나가던 소소한 일상들도 사랑에 빠진 자들에겐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유연한 신체의 상태는 새로운 몸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새로운 몸을 창조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즉 새로운 삶의 리듬과 강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데스데모나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서슴없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연인 ‘로미오와 줄리엣’도 마찬가지. 아무리 강한 억압 장치도, 뚫리지 않을 것만 같은 견고한 배치도 넘어설 수 있는 강력한 힘. 이것이 바로 에로스가 지닌 역량이다.

비극에 이르는 길 ― 순수에 대한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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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作 <질투>
_ “오, 질투심을 조심해요. 그것은 희생물을 비웃으며 잡아먹는 푸른 눈의 괴물이랍니다.”

사랑의 달콤한 말들에 현혹되어 주의를 놓쳐선 안 된다. 이 아름다운 언어들 뒤에선 벌써 파국의 싹이 움트고 있다. 감동적인 데스데모나의 모습을 보며 오셀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정절(faith)에 이 생명 바치리.”(오셀로) 오셀로는 사랑에, 그것도 순수한 사랑에 자신의 존재를 걸었다. 이때부터 그는 비극의 선분을 타기 시작한다. 그런데 ‘순수한 사랑, 영원한 사랑’, 이것은 사랑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이상이 아닌가? 그것이 왜 문제란 말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하나의 연극이라고 해보자. 이 거대한 연극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어떤 시의 제목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살아야만 한다.  자식으로, 학생으로, 친구로, 연인으로. 삶에 부여된 다양한 캐릭터들을 잡음 없이 소화해 낼 때, 사람들은 그를 능력이 있다거나 훌륭한 삶을 산다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는’ 형식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순 없다. 그렇지만 행위자를 분리시키고 그가 차지한 ‘자리’ 자체가 과도한 가치를 부여받기 시작할 때, 그것이 이상적인 어떤 것이 되어 절대성을 획득할 때 비극은 시작된다.

브라반쇼에게 데스데모나는 언제까지나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착한 딸이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오셀로에게는 언제까지고 지고지순한 자신만의 연인이어야 했다. 연극 속 캐릭터와 행위자를 동일시하기 시작할 때, 그럼으로써 고정된 관계의 영속성을 욕망하고 그것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괴물이 된다. “오, 질투심을 조심해요. 그것은 희생물을 비웃으며 잡아먹는 푸른 눈의 괴물이랍니다.”(이아고)

데스데모나가 캐시오와 바람이 난 것 같다는 이아고의 거짓말에 오셀로의 마음이 흔들렸던 이유는 아버지를 ‘배신’했던 그녀의 전력 때문이었다. 그는 그의 사랑이 성취된 곳에서 배신의 단초를 발견한다. 이는 브라반쇼의 욕망에 그것과 동일한 자신의 욕망이 공명함으로써 그의 불안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 유명한 3막 3장에서 오셀로의 변신이 시작된다. 셰익스피어는 이 한 장에 고귀한 오셀로가 괴물로 변하는 과정을 담는다.

오셀로가 괴물이 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은 그가 데스데모나에게 처음 선물로 주었던 ‘손수건’이다. 이아고는 그것을 몰래 훔쳐내 캐시오가 줍게 하고, 손수건을 들고 있는 캐시오의 모습을 오셀로가 보게 함으로써 그의 의심을 확고하게 한다. 고작 손수건 한 장에 엄청난 비극이 야기된다는 것이 극의 개연성을 떨어트린다며 이 장면을 비판하는 비평가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바로 이 장면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무런 물적 근거도 없이 편집증적 망상에 사로잡힌 오셀로는 1, 2막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그가 만나고 소통하는 세상이 그에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그 손수건은 ‘고작 손수건 한 장’이 아니다. 그것은 데스데모나에 관한 모든 진실을 말해 주는 진리의 담지체이다. “질투하는 사람에겐 공기처럼 가볍고 하찮은 물건도 성경 말씀처럼 강력한 확증이야. …… 무어인은 벌써 내가 준 독약을 먹고 변했어. 위험한 상상은 그 본질이 독약인데 맛이 고약한 줄 처음엔 거의 모르다가 약간씩 핏속으로 퍼지기 시작하면 유황불처럼 타오르는 거야.”(이아고)

에로스와 괴물의 친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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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_ 오셀로는 에로스의 화신에서 질투의 화신으로 전화한다. "죽기 위해 사랑하는 인간은 없"지만
죽음을 부르는 사랑이 있으니, 파괴적인 죽음의 욕망은 에로스의 이면인지도 모른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에로스의 힘은 언제든 괴물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로스로 인해 형성된 유연한 신체와 분자적 욕망의 흐름은 어떠한 경계도 타고 넘을 수 있는 역량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은 안정된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언제든 ‘검은 구멍’으로 수렴되어 파괴적 욕망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거시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전체주의적 욕망과 구별되는 파시즘적 욕망이다. 히틀러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대중들 자신의 욕망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변화를 바라는 대중의 열망은 체제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동했지만, 곧바로 파시즘적 욕망으로 전화되었다.

‘욕망의 분자적 흐름’을 출현시킨다는 점에서 파시즘과 에로스는 많이 닮아 있다. 에로스가 새로운 존재를 생성하기를 그칠 때, 그것은 언제고 파시즘적 욕망으로 변하고 만다. 이런 점에서 ‘아리아인의 순수함’을 지키려는 독일인들의 욕망이나 ‘데스데모나의 순결함’을 갈망하는 오셀로의 욕망은 다르지 않다. “죽음으로 귀착되는 이러한 파괴와 억압을 자기 스스로 욕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미시-파시즘에서 보여 주는 욕망의 배치이다.”(이진경, 『노마디즘』)

다른 욕망을 가진 존재로 드러난 데스데모나를 견딜 수 없었던 오셀로는, 말 그대로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데스데모나. 하이얀 그녀의 목을 서서히 죄는 오셀로의 검은 손. 오셀로는 끝까지 데스데모나가 영원한 ‘나만의 그녀’로 남길 바랐다. 이렇듯 ‘아름다운’ 사랑의 이면엔 언제나 ‘괴물의 푸른 눈’이 번뜩이고 있다.

사랑하고 싶어? 사랑을 버려!

우리는 사랑할 때 늘 그 혹은 그녀가 변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아마도 이는 상대방과 함께 더 이상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낼 수 없으리라는 불안에서 솟아오르는 히스테리컬한 반응이리라. 변화를 두려워하며 이대로 모든 것이 멈춰 주길 바랄 때, 우리는 완고한 보수주의자가, 더 나아가 끔찍한 파시스트가 된다. 그렇다면 영원한 사랑이란 불가능한 것일까?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도 논리적으론 가능하다.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집착을 벗어던지고, 변화하는 관계의 양상 속에서 새로운 욕망을 생산해 낼 때, 그것을 거름 삼아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낼 때 사랑은 지속된다. 역설적이게도, 매 순간 사랑하길 그칠 때 비로소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이른다면 그것이 꼭 지금의 그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의 존재를 자극하고, 나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을 통해 내가 행복한데, 그를 부숴 버려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진실한 사랑을 위해 필요한 건 단 ‘한 걸음'이다. 사랑에 관한 오만과 편견, 자의식을 둘러싼 망상의 그물망을 벗어나 한 걸음, 단 한 걸음만 내디딜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백척간두 진일보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호모 에로스』,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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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7 12:01 2008/12/1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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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임연실 2008/12/17 13:21

    그러게요,
    사랑이란 집착의 다른 이름이더군요.
    남녀 간의 애정이 그 극단을 보여주지만,
    우리들은 권력, 부, 명예,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애정으로 착각하죠.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소유하려 할 뿐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모르죠,
    내가 사랑하니까 넌 나에게 와야 해
    넌 내꺼야!
    명박이도 자신이 국민들을 사랑하므로 국민들은 내꺼여야 햇!
    그래서 자신을 비난하는 것들은 모조리 족치는 것 아니겄어요?
    사랑을 얻고자 한다면 사랑을 버렷, 집착하지 않는 슬기로운 대통이길

    • 그린비 2008/12/22 02:42

      안녕하세요, 노임연실님.
      우리는 소유와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기도 하죠. 소유와 집착을 버릴 때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걸 모르고 말예요..

  2. 꺄울~♡.♡ 2008/12/18 02:17

    어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 행위자를 분리시키고 그가 차지한 ‘자리’ 자체가 과도한 가치를 부여받기 시작할 때, 그것이 이상적인 어떤 것이 되어 절대성을 획득할 때 비극은 시작된다.'

    괴물이 되지 않도록.. 공부합시다! ㅎㅎ

    • 그린비 2008/12/22 02:43

      꺄울~님,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래서 사랑도 공부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꺄울님은 이미 깨달으셨군요. ㅎㅎ

  3. 레몬에이드 2008/12/18 22:44

    오셀로의 광기어린 변신을 아직도 잊을수가 없네요

    사랑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어떤식으로 변해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만한 문제 같습니다.
    노임연실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집착이란 형태로 변해 가는 일만 없다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ㅎ

    • 그린비 2008/12/22 02:50

      레몬에이드님, 왠지 의미심장하군요. ^^
      사랑이 어떤 식으로 변해갈 것인가...
      사랑의 변주라면, 고미숙 선생님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에도 잘 나와 있답니다~(광고성 댓글이 돼버렸군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