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낯설게 하기-부끄러움이라는 감응
- 『국화와 칼』,「어떤 정동의 미래」로 읽은 일본


오하나 (연구공간 '수유+너머')

1. 일본을 알고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본을 알고싶다?"
_ 『국화와 칼』은 전후 점령정책을 위한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일본이라는 대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문제는 이제 서구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서구를 통해 일본을 바라본 일본인의 문제가 되었다.

 나는 그린비에서 일본어를 강습하고 있다. 강습을 하다보면 반드시 일본인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을 곁들이게 된다. “일본어로 말할 때, 확실하게 거절하는 말은 피하세요~”, “타인에겐 자기 가족에 대한 호칭을 모두 낮추세요~” 그리고 이윽고 이어지는 말. “왜냐하면, 일본인은...” 일본어 특유의 문형을 잘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 얼마간 이 ‘일본싸람론’이 필요한 것이다. 감정 내색을 잘 안 한다, 최대한 나를 낮추고 내 집단을 낮춘다, 타인에게 피해를 덜 주려 한다 등등. 일본어 완전정복을 위한 태도가 이런데, 일본 완전 정복을 위해 분투하던 군부(軍部)의 시선은 오죽했을까? 여기 일본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교양서가 있다. 찬 겨울, 청결하고 고아하게 핀 한 떨기 국화와 그 옆에 퍼렇게 날이 선 장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1946). 고등학생용 고전100선에 들어갈 정도로 잘 알려진 이 책은 뜻밖에도 전쟁목적으로, 전후 점령정책을 위한 연구프로젝트를 위해 미국 전쟁정보국에서 발주되어 쓰였다. 그래서 초기 인류학의 식민주의적 성격을 아주 잘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일본은 어떤 식으로 나올 것인가? 일본 본토에 진격하지 않고도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국화와 칼』제1장 연구과제-일본)

『국화와 칼』이 보편적 서구인과 비교될 수 있는 특수한 일본인을 말했다면, 50년 뒤 한 일본인이 ‘서양인의 일본인론’을 다시금 거리를 두며 논하고 있다. 우카이 사토시의 「어떤 정동의 미래-‘부끄러움’의 역사성에 관해-」가 그것이다.

2.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죄의 문화와 부끄러움의 문화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배우와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를 가꾸는데 신비로운 기술을 가진 국민에 관한 책을 쓰면서, 동시에 이 국민이 칼을 숭배하며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린다는 사실…… 이런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스 베네딕트
(Ruth Benedict)
‘책 한 권으로 일본인을 알고 싶다.’ 과연 미국무부의 목표는 뚜렷했고 여기에 문화인류학자인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적국인 일본 국민의 습성을 책 한 권속에 풀어 썼다. 미국인의 눈을 가진 저자가 보기에, 일본은 매우 독특한 ‘부끄러움’의 문화가 있었다. 이는 서양의 ‘죄’ 문화와의 비교 속에서 이루어진다. 서양은 그리스도교적 유일신의 문화를 공유한다. 그리스도교는 아담에서 시작된 원죄를 가책하고 고해하는 것에서 개인의 덕목이 시작된다. 이에 반해 일본은 국민적 상징의 층위에서만 신토神道를 국교로 내걸며 개개인의 종교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따라서 온갖 자연물이 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에 따라 도덕적 잣대도 자의적이다. 베네딕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일본인에게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하나의 진정한 죄의식보다, 주변을 의식하며 외부의 강제에 더 민감한 감정 곧 ‘부끄러움’이 더 일반적이다. (일본인에 대해 겉과 속이 다르다며 이중적이라 할 때,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한다고 할 때, 이 말의 연원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절대 도덕을 내면화한 미국인(서양)과 타인의 눈에 따라 심성이 좌우되는 일본인(동양). 따라서 저자인 그녀가 보기에 ‘부끄러움’이란 전근대 봉건사회가 빚은 감정으로서 근대화 과정에서 지양되고 없어져야 할 것들이었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이미 일본 사회 내부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감지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일본인도 매우 이런 방향으로의 변화의 필요성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다. …… 누구나 일본에서 ‘부끄러움(하지(恥))’의 역할에 의문을 품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국민에게 새로운 자유, 즉 ‘세상’의 비난과 추방을 두려워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국화와 칼』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중에서)

 미국인 문화인류학자가 본 일본 국민의 특징, 곧 ‘부끄러움’이란 세간의 비난 앞에서의 부끄러움이었다. 일본인은 그것이 일본국의 사명과 일치하지 않으리라 생각할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일본인으로서의 부끄러움’. 따라서 저자가 볼 때, 일본국민은 이러한 부끄러움 일반에서 벗어날 때 자유를 얻고 민주적 근대국가(미국)로 도약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우카이 사토시는 부끄러움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일본인으로서의 부끄러움’과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어떤 정동의 미래」에서 부끄러움의 가능성은 바로 이 점에서 시작한다.

2. 부끄러움의 가능성 「어떤 정동의 미래」
 
 ‘일본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은 일본 얼굴에 먹칠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으로, 바로 국화와 칼에서 주목했던 부끄러움의 모습이다. 하지만 또 다른 부끄러움,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은 한 마디로 일본 자체가 창피스러운 정서이다. 전쟁에서 모든 것을 내걸고 싸우라고 말했던 천황이 라디오 너머에서 패배를 고할 때, 나라를 지키지 못한 데서 나오는 부끄러움이 ‘일본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라면, 천황에 대한 의구심, 전쟁에 대한 의구심이 우러날 때가 바로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의 순간이다.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을 이탈하게 밀고나가 부끄러움의 문제를 윤리적, 정치적 문제로 끌고나간다. 이 과정에서 부끄러움은 범위를 근본으로 넓혀,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을 통해 가책과 자기반성을 거쳐 휴머니스트가 된다면,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한 사람은 그간의 인간중심주의를 낯설게 느끼며 인간 아닌 다른 것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부끄러움이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게 해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타자의 눈, 내면화된 시선, 넘어서는 눈
_ '부끄러움'의 눈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느냐에 따라 내면으로 소급해들어가는 눈이 될 수도, 긍정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산출하는 눈이 되기도 한다.

 『국화와 칼』을「어떤 정동의 미래」로 따라 읽어가다 보면, ‘일본을 알고 싶다!’던 (우리의) 정복자적 시선은 일본인을 넘어선 인간의 삶에 관한 의문으로 변형되어 간다. ‘열쇠 구멍을 통해 방 안을 엿보고 있는 현장을 뒤에서 포착 당할 때’.  부끄러움이란 내가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우카이는 사르트르가 말한 저 ‘열쇠 구멍을 보는 자’에 대한 예를, 부끄러움이란 나를 의식할 때 타자의 존재가 구조적으로 필수 불가결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중요한 기술로 든다. 저자는 바로 이 지점, 일본인을 넘어선 인간의 삶에 관한 일반적 주제로 변형시키며, 일종의 ‘부끄러움의 계보학’을 시도한다. 그가 보았을 때, 부끄러움의 경험은 제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하여,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이른바 전쟁 체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에서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의심스러워지는” 경계에 들어서는 경험을 우리는 이미 함께 겪어온 것이다.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까지도 발견되어버린 시대이기 때문에야말로 정동이 ‘국민’과 ‘인간’의 외부로 동시에 표출될 가능성 또한 처음으로 틈새를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그런 예감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국화와 칼』9장 마지막)

 3. 『국화와 칼』의 (본의 아닌) 국제성 혹은 안티 휴머니즘


부끄러움을 긍정하는 것은 가책을 긍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이란 나의 주변, 나의 입지, 나란 몸덩이 자체까지 좁혀 들어오면서 삶에서 당연시된 동일시를 이탈하여 그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보게 만드는 힘으로 재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이전의 나이기를 그치게 만든자는 점에서 부끄러움이라는 감응의 가능성이 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응, 그것은 상대방과 내가 만나 변용이 일어나는 ‘능력의 증감상태’(스피노자)이다.「정동의 미래」에서 저자는 일본 사회가 대개 아직도 이 ‘부끄러움’의 문화를 띤 국가임을 인정하는 반면 전후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노출증에 가까운 ‘무치無恥’”를 보인다는 모순을 담담히 지적한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그대로 통용되지 않을까. 한국에서 여수 ‘보호소’ 화재 사건이나, 지난 11월 마석가구공단에서 국가는 ‘경찰력’을 앞세워 이주노동자를 ‘사냥’하고 감금하고 추방해 ‘버렸다’. 이러한 경험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긍심을 의심하게 만든 계기가 된다. 그런 점에서『국화와 칼』은 “혹성 규모의 ‘부끄러움’ 시대(우카이)”를 본의 아니게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도 ‘거작’의 힘이라 말해야 하는 걸까?
알라딘 링크
2008/12/24 11:16 2008/12/24 11:16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468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08/12/25 10:32

    그린비님!!!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포스팅 하신거세요!!!!

    안돼요~ 안돼~!!

    오늘은 메리크리스마스라구요!!! ^^

    • 그린비 2008/12/26 15:05

      솔님은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어쩐 일이셨어요~~!ㅎㅎ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솔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