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마음을 풍요롭게 해보자!
― 「너는 내 운명」을 통해 본 내면 가꾸는 방법



만세 (연구공간 ‘수유+너머’)

1. 왜 민정은 새벽이를 괴롭히는가?

작년 한 드라마를 만났다. 「너는 내 운명」. 출생의 비밀에서 백혈병까지 드라마가 갖출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춘, 말 그대로 버라이어티 드라마다. 인터넷에서 그 드라마에 대한 비난/비판과 주요 스토리 소개가 끊이지 않은 덕에, 자취 생활로 TV가 없는 나조차(ㅜ.ㅜ) 그 드라마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심지어 몇 편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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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너는 내 운명」
_ 민정이 퍼부은 와인을 뒤집어 쓴 새벽(위), 백혈병에 걸린 민정(아래)

거의 절반에 가까운 국민들이 저것도 드라마냐고 씹으면서 계속 보는 이 희한한(!)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민정(호세 엄마, 새벽 시어머니)과 새벽(며느리)의 관계다. 알다시피 민정은 새벽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그냥 새벽을 괴롭히는 것을 넘어 호세와 새벽을 헤어지게 하려고 실어증을 연기하는가 하면, 결국 백혈병에 걸려버린다! 덕분에 호세와 새벽은 헤어졌다.(다시 합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정보는 여기까지다.) 그 집념과 의지는 본받고 싶을 정도다.

나는 민정이 특별히 심성이 고약해서 새벽을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와 달리, 민정의 눈에는 새벽이가 뭘 하든 그냥 미워보이는 거다. 왜 그럴까? 금지옥엽 키운 말 잘 듣는 호세가 처음으로 자기 말을 거스르고 고아 출신 계집애한테 장가를 갔다. 덕분에 민정의 마음에는 큰 상처가 생겼다. 그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으면서 민정의 판단을 제약한다. 상처는 새벽을 ‘아들을 빼앗아간 괴물’로 인식시킨다. 이제 민정은 새벽의 모든 행동을 자신에 대한 위해로 간주한다. 새벽이 김장을 하느라 무리를 하면 그건 자기가 못된 시어머니임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책략이며, 새벽이 잘해주면 이는 아들과 자신을 이간질하기 위함이다. 정확히 말해, 새벽이 뭘 하든 상관없다. 상처는 모든 행동이나 말을 특정한 형태로 ‘해석’해 버린다. 이런 해석메커니즘이 민정을 점점 악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은, 과장되었을지언정 이런 상황이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님을 반증한다. 사실 이런 해석메커니즘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뭘 해도 저 놈은 싫고 짜증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꼭 괴롭히는 입장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시어머니가 뭘 하든 그건 날 괴롭히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 며느리처럼, 약자의 입장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해석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부관계는 양자가 모두 이렇게 왜곡된 해석메커니즘을 발동하기 때문에 쉽게 풀리지 않는다). 꼭 공격적인 감정일 필요도 없다. 사랑이나 애정 또한 이런 판단의 제약을 쉽게 가져온다. 사랑하는 연인이 뭘 하든 옳고 좋아 보이는 경험도 상당히 일반적이다. 사랑을 빙자한 사기가 가능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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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作 <기억>
_ "사람들은 아무것도 제거할 수 없고, 아무것도 거부할 수 없다. 모두 상처를 준다. 인간들과 사물들은 조심성 없이 너무 가까이 접근한다. 그래서 모든 사건은 흔적을 남긴다. 추억은 곪은 상처다.(니체)"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긴 상처는 변하지 않는 기억이다. 그것에 얽매이는 순간, 우리는 석고상과 다름없다.
상처이든 애정이든,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을 경우 그것은 판단을 제약한다. 바깥에서 아무리 다른 종류의 자극이나 변화가 생겨도 모두 동일하게 해석된다. 소위 내면이 깊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마음에 강한 흔적이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떨어지는 낙엽에 슬피 울 수 있는 감성을 가진 사람은, 지나가는 개미의 발자국 소리나 당장 초록색으로 바뀌지 않는 신호등에서도 자신을 미워하는 세상을 읽어내지 않는가?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에서 이처럼 마음에 남은 상처는 사람을 극히 수동적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수동성은 적극적이지 않음(non-actif)이라기보다, 영향받지 않음(non-agi)이다. 이처럼 어떤 변화에도 자극받을 수 없는 상태, 뭘 보든 그것에서 동일한 것을 읽어내는 심적 상태는 삶을 왜소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들은 슬픔에 빠져 시를 쓸 수는 있을지 몰라도, 좋은 삶을 살 수는 없다.

2. 마음의 풍요로움에 대하여

이러고 보면 내면이나 마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다. 상황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하니 말이다. 하지만 마음이 늘 그렇게 부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마음이나 내면은 정반대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사실 마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인간과 사물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인간이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다. 마음을 가진 덕에 사물과 달리 인간은 같은 상황에서도 다채로운 활동과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연필은 같은 힘이 가해질 경우 항상 동일한 거리를 움직인다. 같은 힘으로 밀었는데 어떤 경우 평소보다 더 멀리 밀려나거나 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기억이나 심적 상태에 따라 동일한 자극에도 다르게 반응한다. 과자가 눈앞에 있을 때 어떤 이는 그것을 집어먹을 테지만, 어떤 이는 과자를 먹다 체한 기억 때문에 거꾸로 피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먹고 싶은 충동을 참은 채 사랑하는 이에게 과자를 건넬 것이다.

연필이 중력의 법칙에 종속되어 규정된 행동만을 하는 데 반해, 마음을 가진 인간은 다채로운 활동을 할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를 뿐 아니라, 동일한 사람도 어떤 경험과 기억을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동일한 상황에서 다르게 반응하고 활동한다. 게다가 우리가 쌓아가는 기억들은 늘 같은 방식으로 판단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섞이고 상호작용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곤 한다. 실연의 기억이 특정한 계기를 통해 역경을 이겨내는 자원이 되는 것처럼, 같은 기억조차 다른 기억이나 경험과 함께 작동하여 달라진다. 인간이 다채로운 문화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마음이 늘 새롭게 변화하여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마음은 사람들이 자극에 즉각적이고 충동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창조적으로 행위할 수 있도록 한다. 마음은 우리가 삶을 무한한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게 하는 잠재력의 원천이다.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생기면, 이런 잠재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새벽을 미워하는 민정처럼 다른 상황이나 자극조차 동일하게 해석해버린다. 활동의 관점에서 보면, 이때 인간은 연필만도 못한 존재다. 적어도 연필은 다른 자극에는 다르게 반응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마음을 풍요롭게 하거나 내면을 갈고 닦자는 말은 착해지자는 뜻이라기보다, 흔적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풍성한 잠재력으로 새로운 삶을 실험하고 창조하자는 제안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상처를 망각하는 것이라기보다, 기억을 특정한 형태로 굳어버린 상태에서 끄집어 내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상처나 흔적은 특정한 종류의 기억이라기보다, 기억이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상처가 되었던 기억이 다른 기억이나 경험들과 함께 다르게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면,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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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가 김영만氏
_ 베트남 참전 군인 출신인 김영만씨는 베트남전의 끔찍한 기억으로로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시민운동가의 삶으로 승화시켰다.
물론 쉽지 않다. 상처나 흔적에 얽매이고 싶어서 얽매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상처나 흔적을 극복하고 그 기억을 더 풍요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이들 역시 많이 존재한다.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반공투사가 되는 대신 그 고통스런 기억을 딛고 평화운동가가 된 참전용사들이나, 무슬림을 미워하는 대신 ‘우리의 이름으로 싸우지 마라’고 미국 정부에 외치는 9.11참사 희생자 가족들처럼, 아픈 기억을 상처로 만드는 대신 더 풍요로운 가능성의 원천으로 삼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상처와 같은 흔적은 마음에 덧씌워진 장애물일 뿐, 마음의 본성은 이런 큰 잠재력에 있다. 인생에서 친구가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처럼 기억을 마음의 변치 않는 흔적으로 만드는 대신 삶의 자원으로 삼도록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새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신 ‘부자 되세요.’ 라는 말을 덕담으로 주고받는 걸보면, 우리가 정말 서로 상처를 크게 주고받고 있나보다. 얼마나 그 상처가 컸으면, 5000만 국민이 모두 자기 삶이야 어찌되건 돈을 벌겠다는 폭주 기관차가 되어버렸을까.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을 보기에는 날씨가 너무 추웠지만, 이불 속에서나마 다들 올해의 목표 정도는 세웠으리라. 올해는 각자의 목표와 함께, 내면을 풍요롭게 가꾸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부여잡고 있는 마음의 상처와 흔적으로부터 벗어나, 여러 기억들을 새로 삶을 구축하는 자원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내면이 풍요로워질 때, 우리는 세상을 훨씬 더 풍요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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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7 11:30 2009/01/0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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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ou 2009/01/08 00:01

    저는 모르는 드라마인데...(간첩인가봐요ㅠㅠ)
    마그리트 그림 아래 니체 인용구는 어디에 나온 말인지 궁금해요~
    니체라면 뒤에 이걸 뒤집는 다른 말들을 마구마구 했을 것 같은데...^^
    새해에는 더 많은 기억들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상처든 뭐든!

    • 그린비 2009/01/08 09:50

      you님 안녕하세요.
      니체 인용구는 위에 소개된 『니체와 철학』, 209쪽에서 들뢰즈가 인용한 것을 재인용한 것입니다. 원문은 『이 사람을 보라(Eco Homo) Ⅰ』의 6쪽입니다. ^^
      새해 기억 많이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