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라고 명명되는 텍스트에 대하여
―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기린 (연구공간 '수유+너머')

기술에 대한 예술의 관계가 철저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알린 파노라마는 동시에 새로운 생활 감정의 표현이기도 했다. 시골에 비해 도시의 인간이 정치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은 이 세기가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분명해졌는데, 도시의 인간들은 파노라마를 통해 시골을 도시 속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개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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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분량에 요령부득의 인용들로 꽉 찬 『파사젠베르크』+라는 책을 읽어 보았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슬쩍 훑어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저자 발터 벤야민은 도시 속에서 펼쳐지는 모더니티의 흔적을 좇아가며 산업과 예술, 정치 현상을 탐구한 철학자이자 비평가다. 그에게 있어 도시란 당대 권력의 움직임과 정치 및 과학적 흐름, 구성원 개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만나 기묘한 정물화를 만들어 내는지 확인하기에 매우 적합한 텍스트였다.

+ 국내에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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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소개하려는 책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는 그의 기획대작(?) 『파사젠베르크』의 맹아(萌芽)를 담고 있는 책으로, 지금껏 맑스나 데리다, 네그리의 책을 읽어도 도통 내 삶과 관련하여 직접적 감응이 생겨나지 않았던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 기대한다. 영세한 가내수공업이 이뤄지는 창신동의 구불구불한 골목, 밤마다 휘황찬란한 조명을 뿜는 명동 롯데백화점, 늘 가래침과 구겨진 신문지로 뒤덮여 있는 청량리역 계단, 냉장고 빛처럼 냉기 서린 쇼 윈도우가 즐비한 압구정 로데오 거리… 이 안에서 당신이 점하고 있는 좌표는 어디인가? 당신은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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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는 벤야민이 1926년에서 2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그 두 달 동안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기록한 일기를 모아 출판한 책이다. 일기도 편지도 모조리 얼굴 모르는 이들에게 다 팔리는 유명인의 운명이란 참 거시기하다, 생각하면서도 내가 이 책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첫째 이 책이 이방인(독일 베를린에서 건너온 자)의 눈으로 본 타국, 그것도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는 나라의 중앙을 서술한 것이라는 점, 둘째 일기라는 글의 특성상 첨가되고 수정된 ‘발표용 글’이 아니라 가장 소박하고 직설적인 글이리라는 개인적 예상 및 바람,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앞서 열거한 두 가지 이유의 종합이기도 한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 글 전체가 마치 당시의 모스크바를 보여 주는 일종의 상형문자 같다는 점이다. 아마도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글은, 저 마지막 이유에 대한 부연이 될 것이다.

벤야민은 12월 9일 모스크바에 도착해 처음으로 기록한 일기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12월 6일, 여기 도착했다.” 그는 아직 모르지만, 이 책을 이미 다 읽은 나는 그 옆에 이런 메모를 남긴다. “그는 파편을 줍는다고 여긴다. 실제로 그는 파편을 쓰고 있다. 그 파편을 내가 줍는다. 동시에 나 또한 파편을 쓰기 시작한다. 이상한 연쇄. 사이렌.”

그는 파편을 줍고 그것들을 늘어놓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필연적으로, 피할 도리 없이 다른 무엇이 끼어들어 간다. 그것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빨려 들어가 글 전체를 불균질적으로, 비대칭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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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이 고로트 담장의 헌책 노점
서유럽에서는 높은 탑을 보고 교회를 찾는다. 하지만 여기선 긴 담장과 낮은 쿠폴라들이 수도원 교회의 넓은 복합건물이나 예배당들을 에워싸고 있는 것에 우선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나면 모스크바의 많은 곳들이 왜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마치 요새처럼 보이는지가 분명해진다. 서유럽에서 낮은 탑은 세속적 주거지의 특징인데 말이다. 우체국에서 전보를 보내고 정신병자들의 그림 전시회에 가기 위해 종합 기술 박물관 안을 한참 동안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대신 키타이고로트 담장을 따라 서 있는 점포들을 둘러보며 이 노력을 보상받았다. 여기가 헌책 시장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여기서 러시아 밖의 문헌들을 찾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12월 29일 일기 중)

그의 일기에는 문단 나누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그런 그의 글쓰기가 흡사 저 위의 인용에서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마치 요새들처럼 보이는’, 그래서 서유럽과는 확실히 다른 러시아, 모스크바적 특성들을 보여 준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가난에 찌들어 신음하는 이 도시에 병난 입술의 치석처럼’(12월 14일) 보이기도 하고, ‘모스크바라는 거대한 야전병원에 놓여 있는 침대들’(같은 날)처럼도 보여서, 때로는 ‘온통 선동적인 구호로 덮여 있’(12월 16일)는 러시아의 벽 같이 느껴진다.

벤야민은 자신이 돌아다니며 본 그 많은 낯선 풍경들을 다시 종이 위에 재생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렇게 재생된 모스크바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결국 ‘말없이 끈질기게 각축하고 있는 삶’(12월 15일),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레닌의 신경제정책(NEP, 본 책에서는 ‘네프’라 부름), 그리고 레닌의 사망(1924)까지 이어지는 다이내믹한 곡선 위에서 러시아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삶이 어떻게 변화무쌍하게 구성되었을지 상상해 본다면 아마 벤야민의 이야기가 조금 더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을 듯하다. 아울러 혹한을 무색하게 하는 노점과 더 이상의 생명력도 없는 구걸꾼을, 좁아터진 인도와 촉각적 체험을 선사할 전차 타기를 함께 이야기하며 ‘외국에서 온 이방인’ 벤야민의 머릿속이 차차 어떻게 정리되었을지도 상상해 본다면.

한 나라의 수도, 그리고 그 수도를 따라 변하며 균질화 되는 도시는, 모험 정신으로 가득 찬 이방인에게는 더할 바 없이 풍요로운 텍스트일 것이다. 그것은 그 나라 사람들의 욕망을, 관습을, 낯선 대상에 대한 태도를 보여 주고, 더불어 그 나라 사람이라 부르기 애매한 사람들, 즉 외국인노동자, 망명자, 노숙자, 철거민 등을 어떻게 분리하는지도 보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마천루 꼭대기에 매달린 광고판, 한 건물 당 족히 열 개씩 달린 간판들, 벽에 붙은 포스터들, 거리 위를 구르는 전단지, 밥을 타먹기 위해 길게 줄지어 서 있는 노인들, 산보를 방해하는 온갖 종교인들, 백화점 앞의 노점상들, 백화점 뒤의 사창가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 내 친구가 아는 미국 국적의 레지던스 아티스트는 서울 변두리 골목길 산책과 전단지 모으기, 가겟집들의 유리문과 셔터 관찰이 자신의 중요한 취미 중 하나라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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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스노이 광장
여기서도 눈부시게 밝은 한 다발의 자동차 불빛이 어둠을 뚫고 내달린다. 여기 크렘린에 넓은 훈련장을 갖고 있는 기병대의 말들이 그 불빛에 놀라 날뛴다. 보행자들은 차들과 난폭한 말들 사이를 뚫고 힘겹게 걸어간다. 눈을 실어내는 썰매들이 한참 동안 지나간 뒤 말을 탄 기병들이 나온다. 말없는 까마귀떼가 눈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크렘린 대문 앞엔 눈이 부신 불빛 속에 눈에 띄는 황갈색 가죽옷을 입은 초병들이 서 있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통과하는 차량들을 통제하는 붉은 불빛이 점멸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모든 빛깔들이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듯 여기 러시아 권력의 중심지에 수렴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1월 4일 일기 중)

자본주의와 화폐에 대해 여전히 질문하고 고민해도, 잠시만 고개를 돌리면 MTV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고 명품 화장품을 부록으로 주는 패션 잡지를 정기구독 할 수 있고 지하철역에서 바로 이어지는 롯데백화점에 들어가 50퍼센트 세일 중인 나이키 운동화를 살 수 있는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질문, 보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공부와 운동의 가능성은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온갖 스펙터클한 광경들이 우리 눈을 사로잡고 마취시키는, 이 도쿄와 뉴욕과 서울, 부산과 광주와 인천에서 이제 우리는 우리들이 점하고 있는 곳의 좌표의 위치를 확인하고 스스로의 언어로 그것을 말해 보아야 한다. 멀게만 느껴지는 어느 위대한 학자의 말이 내 일상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발음되어질 때 그때 비로소 ‘우리의 개념어’가, ‘우리의 언어’가 탄생할 것이다. 말없이, 그러므로 질문도 없이 ‘아침에 우유 한 잔 점심엔 패스트푸드’(N.EX.T, 「도시인」 노랫말 중)로 시티라이프를 구가한다고 착각하며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정부에 속았다며 울부짖거나 혹은 다시 한번 힘을 모아 나라 살리기 운동에 동참하자며 금딱지를 내놓을 게 아니라, 지금 내 발이 딛고 있는 이곳이 무엇을 뜻하는 상형문자인지,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내가 지금 원하고 있는 방향이 무엇인지 숙고해야 할 일이다. 몇몇 사람들이 지금도 되풀이해 말하고 있는 혁명은, 그리고 바로 당신이 지금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라고 푸념하며 꿈에 그리는 어떤 이상은 실은 바로 이 같은 수행적 물음 없이는 눈곱만큼도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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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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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고개를 돌리면 MTV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고 명품 화장품을 부록으로 주는 패션 잡지를 정기구독 할 수 있고 지하철역에서 바로 이어지는 롯데백화점에 들어가 50퍼센트 세일 중인 나이키 운동화를 살 수 있는 도시, 서울. 이곳에서 우리가 점하고 있는 좌표는 어디인가.

벤야민은 짧은 두 달간의 모스크바 경험을 간직한 채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간다. 러시아를 보며 훈련된 날카로운 눈은 이내 베를린의 차갑고 황량한 거리 위에서 죽어버린 정신을 짚어 낸다. 이윽고 그는 다시 쓴다. 모스크바에서 썼던 일기는 수정되고 첨가되어 「모스크바」라는 제목의 원고로 재탄생해 잡지 『피조물』에 실린다. 도시에 대한 관찰과 글쓰기는 이후 『파사젠베르크』의 기획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사이에서 글쓰기에 대한 일종의 진화와 연대를 목격하게 된다. 하나의 질문을 던져 본 사람만이 이후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거나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도시인의 놀이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본 사람만이 친구들과 다른 방식으로 놀고, 연인과 새로운 데이트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을 터이다.

가능한 한 여러 차원의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한 장소에 대해 알게 된다. 한 장소를 파악하기 위해선 우린 사방에서 그 장소를 향해, 또한 그 장소로부터 동서남북 사방으로 다시 가보아야 한다.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12월 15일 일기 중 )

어렸을 때 청량리 시장 근처 용두동에서 살았던 나는 서울토박이이기는 해도 확실히 변두리적 감성의 소유자다. 아무리 대도시를 떠올리려 해도 내 머릿속 유명 백화점 뒤에는 사창가가 이어지고, 굴다리 밑에는 술 취한 노인이 잠들어 있고, 겨울비 내리는 날이면 동네 거지의 시체가 한 구씩 발견된다. 이건 향수할 만한 무엇도 아니고, 단순한 풍경이나 정물화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 전체의 삶에 연결되어 있고, 과거의 삶과 미래의 삶에도 언제든 등장할 배경이자 조건이다.

내게 2009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여전히 불유쾌한 원더랜드지만, 그러나 그것은 눈 돌리고 함구하고 있을 때 더욱더 기이한 괴담을 만들어 내는 무엇이다. 의식화된 양 과시용 교양을 쌓거나 언더문화에 그저 탐닉하여 스스로를 유폐하거나 패거리를 만들어 어떤 파급력도 없이 그저 고인 물이 되는 건 여기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말할 것. 도시 속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 길 위에서 공부한다는 것, 대한민국 서울 안에서도 잘 살아간다는 것은 이 단순한 정언명령을 함축하고 있다.
2009/01/14 09:56 2009/01/1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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