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책임’의 대중심리


권은영 (연구공간 '수유+너머')

“이제 그만, 더 이상 정치는 필요 없다! 이제 생동하는 사회적 삶의 과제에 다가서자!”
(정치가들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외치는 말, 『파시즘의 대중심리』)

1. 누가 정치하고 누가 책임지는가.

요새 신문을 보다 보면,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어디 신문뿐인가. 뉴스, 인터넷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소식들로 가득하다. ‘합의 없는 휴전’으로 인해 언제든 무력 충돌이 재발할 여지가 남아 있는 가자지구, 감히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2MB의 발언, 검찰의 미네르바 구속 소식을 듣고 있자면 짜증을 치밀어 오른다. 특히 나를 더욱 짜증나게 하는 것은, 기사 속에서 계속 언급되는 두 단어이다. ‘책임’과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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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기사 속 '책임' 남발
_ 경제책임 미네르바에 전가, 여권·보수언론들 책임호도, 책임을 하마스에게, 하마스에도 전쟁의 책임이 있다...

기사 속 주인공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책임’을 남발한다. 미네르바에게 현 경제 위기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국회에서의 물리적 대치는 ‘정치’위기이며 국회폭력법을 통과시켜 야당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사이버 모욕죄’를 통해 법치주의 국가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네티즌에게 그 ‘책임’을 묻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든 간에 가자지구 봉쇄/공격은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에 ‘책임’을 묻는 당연한 일이라고. 물론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의견들 역시 존재한다. 본격적으로 책임소재를 따지기 시작하면, 2MB 정권/여당/이스라엘 당신들이야말로 책임을 지고 반성해야 한다고. 정치위기, 정치개혁을 외치는 당신들이야말로 바로잡고 다스려야 할 ‘정치’(政治)의 대상이라고 말이다.

사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 외환 손실과 경제 위기를 가속화시킨 장본인이 바로 현 정부라는 것을, 국회 폭력 사태를 조장한 것이 정부/여당이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하마스의 이스라엘 로켓 공격의 배경에는, 이스라엘이 40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과 가자지구 봉쇄 정책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 찜찜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다. 짜증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어느 쪽 책임이 더 큰지를 묻고, ‘정치하는 인간들 그리고 힘 있는 인간들 다 속물이다’라고 성질내면 되는 문제인 걸까. 그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제발 말 그대로 정치(政治)를 하라고 요구하면 끝나는 문제일까.

2. 정치가들은 정치(政治)할 수 없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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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_ "사랑, 노동, 지식은 우리 생활의 원천이며, 이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해야 한다." 정치가 아니라.
답답하던 차에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파시즘의 대중심리』,  이 책에서 스스로 파시즘을 욕망하는 대중들의 비합리성을 탁월하게 분석한 라이히는 정치 그리고 정치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생물체든 자신이 겪은 큰 재앙의 원인을 밝혀내고 없애려 하기 마련이다. … 이것이 바로 경험을 통해 불행을 극복하는 본질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가들은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반응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이 정치가의 본질이라고 냉정하게 주장할 수 있다.’ (본문 298쪽) 지금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정치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해결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순간을 모면하거나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의도로 가득하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가들의 인성이 나쁘거나 한심스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위 ‘정치판’이라고 하는 것이 계속 유지되고 굴러가기 위해서는, ‘정말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해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말로’ 정치를 잘하고 정치가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그렇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면, 결국 정치가는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된다. 정치가와 일반인의 구분이 불필요해지는 순간이 오게 만드는 것,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정치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정말로’ 정치가들이 해야 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현재 정치가들이 누리는 기득권은 당연히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기득권을 누리는 혹은 누리길 원하는 정치가들은 ‘정말로’ 정치가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정치가들이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자신의 안위와 권력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이렇듯 짧은 우리의 인생을 한 줌도 되지 않는 정치 사기꾼들에 의해 괴롭힘이나 속임을 당하면서, 또는 그들을 맹종하면서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정치가 우리의 삶을 손상시키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영원히!’(본문 444쪽) 정치가들에게 책임을 묻고, ‘정치’를 제대로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들에게 내 삶을 더 이상 손상시키지 말라고 외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 삶에 정치가들이 필요 없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것은, ‘정치’와 ‘책임’을 나 스스로에게 묻겠다는 뜻이 아닐까. 정치가들을 비난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 이외에, 현재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더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3. ‘정치’와 ‘책임’이 실행되어야 하는 곳은 어디인가.

정치가들이 제시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선동과 환상을 걷어내고 난 후에, 그것들이 다시 나를 덮쳐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직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사실이 고통스럽고 부담이 되더라도, 우리가 수천 년 동안의 기계 문명에 의해 발전되어 왔으며 또한 사회적 무기력과 지도자에 대한 강렬한 욕구로 표현되는 인간의 구조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본문 390쪽)
언제나 파시즘으로 결말을 맺는 환상적 충족에 더 이상 흡족해 하지 않고, 삶의 욕망을 실제로 충족시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배우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본문 373쪽)

라이히는 정치가 혹은 지도자의 선동과 환상에 휘둘리는 것은 필연적으로 파시즘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우리는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더 믿음직스럽고 강력한 선동과 환상을 원하곤 한다. 우리는 2MB의 대통령 선거 공약을 믿었고, 지금이라도 그가 정신 차리고 이 선거 공약을 실현시켜 주길 바란다. 우리는 환상이 환상이었을 뿐임을, 정치가들의 약속이란 허망한 것임을, 이미 알고 있지만 또 다시 새로운 환상에 젖곤 한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 삶의 욕망을 실제로 충족시키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는 것’에 서툴다. 약속과 환상이 사라진 앙상한 현실을 바라보는 것, 무력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내 삶의 피폐함을 국가나 정치가가 아니라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진실은 항상 어렵고 어색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전세계 인간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어떻게 하면 인간구조와 사회제도를 고통스럽게 개편하는 책임을 떠맡지 않으면서 가장 확실하게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가에 관한 수많은 입장들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 국가를 증오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 문제는 더 깊고 심각하다.’
(본문 327쪽)

정녕 지금 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면, 정치가나 지도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지금 이 사회에 살고 있는 것만으로, 나에겐 다른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정치가를 비난하고 갈아 치워서 사회를 바꾸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내 자신의 책임과 고통은 최소화하면서 사회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허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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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 Addis 作 <What Is Fas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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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파시즘으로 결말을 맺는 환상적 충족에 더 이상 흡족해 하지 않고, 삶의 욕망을 실제로 충족시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배우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나 자신과, 내 삶과, 내 욕망과 온전히 마주할 때,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사회를 바꾸고자 한 많은 노력들이 좌절되는 것을 경험했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가진 강점이면서 동시에 약점이다. 우리는 과거 경험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정치가뿐만 아니라 사회제도 그리고 무기력한 인간구조까지 바꾸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노력이 있어야 함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수많은 세월을 지금과 같이 책임을 전가하고 환상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환상을 걷어내고 고통스러운 개편을 감당하기에 너무 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적은 한심한 정치가이면서, 사회제도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안다는 것은 싸움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생각해본다. 무관심, 끊임없는 소비, 사유 재산의 신성함, 일회용품 사용 등.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로,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지’라는 환상으로, 내가 경제 위기를 불러오는 지금의 사회제도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을 오염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전쟁과 죽음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찜찜함의 정체는 바로, 정치가를 탓하고 시대를 탓하면서 내 비겁함과 책임을 은근슬쩍 덮어버리려고 한 나의 태도였다. ‘정치’와 ‘책임’이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말이 쉽지, ‘나로부터 시작되는 정치와 책임’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사는 게 쉽고 뻔하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넘어서야 하는 내가 있어서, 나는 세상이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를 속이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우리 대신에 어떤 것에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추신
어제(21일) 용산동 4가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죽었다. 한 겨울에 갈 곳이 없는 철거민들에게 경찰특공대를 투입한 결과였다. 2MB 정부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자신의 ‘친위체제’가 아니라, 철거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나는 내가 용산구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용산 철거 현장에서 돌아가신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알라딘 링크
2009/01/21 14:47 2009/01/2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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