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남자 vs 재테크 하는 여자


“아무것도 안 하고 놉니다.”
“누가 귀찮게 살림하고 살겠소. 얹히어 먹는 것이 편하지.”
(홍명희, 『임꺽정』 중에서)

한마디로 ‘노는 남자’, 임꺽정의 어록입니다. 걱정스런 꺽정이와 그의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사농공상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안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도 별로 없습니다.  지금 우리 88만원 세대들이 정규직을 욕망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꺽정이와 친구들은 ‘정규직’을 못 견뎌 합니다. 그럼 얘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던 거지? 고미숙 선생님께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임꺽정』에 필이 꽂히셨다고 합니다~. 비정규직 900만, 청년실업이 일상화된 우리 시대에 무직자들의 ‘생존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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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호 作 <임꺽정>
_ 꺽정이와 그의 친구들은 '노는 남자'들입니다. 이들은 신분적 불평등에 대한 울분은 강렬했지만 정작 직업이나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이나 콤플렉스 같은 건 전혀 없었다나요~.

고미숙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내가 쓰고 있는 ‘돈’의 흐름, 즉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고 있는지 파악하면 된다.”

아, 잠시 제 대학생활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해야 할 공부는 뒷전으로 두고(심지어 노는 것도!) 아르바이트만 죽어라 하면서 얼마 되지도 않는 푼돈을 쪼개고 쪼개 월세내고 청약저축 들고 적립식 펀드를 넣으면서 그렇게 보냈더군요! 하지만 그때는 제 나름대로 철이 든 거라고 생각했었다나요(네, 좀 부끄러워요 >_<;;). 벌고 쓰는 것을 동시에 하기보다 미래를 위해 지금 투자한다는 명목으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고, 다른 욕망들은 나중으로 미루면서 돈을 ‘축적’하는 데만 급급했습니다(뭐, 모았던 돈들도 이래저래, 어영부영 다 쓰고 결국 남은 건 후회뿐입니다...털썩). 한낱 휴지 조각일지도 모르는 ‘화폐’의 신비한 마법에 걸려서 말이죠.

그런 삶이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를 들끓게 했던 재테크 책들이 입을 모아 말했죠. 결혼, 내집 마련, 자녀 양육, 그리고 노후대비를 위해 재테크는 필수라고 말이에요. 우리는 언제부턴가 20대에 노후를 걱정해야만 하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하지만, 지금 우리 20대들은 노후대비는커녕 당장의 앞가림도 힘겹다고요). 이처럼 재테크 책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면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청사진을 그려 주고, 친절하게도(?) 삶의 목표까지 제시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한순간이라도 일하지 않으면, 한 푼이라도 모으지 않으면 불안에 떨게 만들었죠(저만 그랬나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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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 책들
_ 요람에서 무덤까지 잘 벌고 잘 모으는 법! 부자들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저축과 투자! 오늘의 준비가 당신의 30년을 결정한다! 돈, 쓰는 것보다 모으는 게 즐겁다! 삶을 돈의 욕망대로 설계하게 하는, 이것이 바로 재테크 책들이 제시하는 단일화된 자본주의적 삶의 모습입니다.

고미숙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내가 쓴 돈이 나’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화폐’와 ‘자본’에 둘러싸여 단자화된 삶을 살고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화폐와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는 이처럼 화폐화될 수 없는 모든 것을 점차 제거하고 축소하며 ‘부정’한다. 화폐는 이질적인 것을 동질화하고 다양한 것을 단일화(획일화)하는 초월적 가치다.”

“이러한 화폐적 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고서, 모든 것을 가치에 따라 계산하고 모든 활동을 등가성을 기준으로 계산하는 화폐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않고서, 삶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 화폐를 선망하고 모든 것을 화폐화하고자 하는 욕망의 배치를 바꾸지 못하고서, 다양한 욕망의 형태로 펼쳐지는 자유로운 삶이 대체 과연 가능할까?”
(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중에서)

버는 것과 쓰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활발한 순환(우주 만물의 이치!)의 장 속에서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꺽정이네가 오로지 [돈을 위한] 돈에 대한 욕망으로 점철된 이런 우리들을 봤다면 아마도 절대! 절대!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포인트는 역시 순환이다. 우주의 모든 것이 그렇지만, 돈이야말로 돌아야 한다. 돌면서 막힌 데를 뚫어 주어야 한다. 순환의 방식은 무궁무진함. 또 모든 존재는 이 순환에 참여해야 한다.(지금, 순환에 참여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고미숙, <임꺽정-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강연문 중에서)

저도 『자본』· 『자넘자』 세미나(사내 세미나랍니다. ^^ 관련글 "박카스 청년 vs 돈 안 되는 여자" 보러 가기)가 아니었다면 꺽정이네를 이해할 수 없었겠죠. 철이 덜 들어 그러는 거라고 면박을 줬을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철이 든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이들이 욕망하는 것만 욕망하게 되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주어진 삶(설사 그것이 불합리하더라도)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철이라면 이제 사양하렵니다. 재테크 책들보다 좀더 일찍 『자본』·『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만났더라면 철없이, 오히려 더 풍성한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맑스와 이진경 센세-와 곰샘과 주간님♡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 세미나가 끝나 갈 때쯤이면 저도 ‘화폐’라는 마법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을까요. 그땐, ‘내가 쓴 돈이 나’라 할지라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으면 합니다(지금은 여전히 초큼 부끄럽거든요..*).

- 마케팅팀 서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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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12:01 2009/01/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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