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 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


다들 한 번씩은 장례식장에 가보셨을 겁니다. 문상객이 아닌 주최 측(꼭 상주는 아니더라도)으로 가셨던 분들도 계실 텐데요. 사실 상주들은 고인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참 바쁩니다. 일단 누군가 돌아가시면 여러 가지 절차들이 기다립니다. 시신은 어떻게 할지도 결정해야 하고 병원비 같은 것도 계산해야 하죠. 장례식장이 잡히면 문상객들을 맞을 준비도 해야 합니다. 육개장 몇 인분, 밥 몇 인분 등을 주문하고 잘 기억도 해둬야 합니다. 나중에 계산이 틀리면 안 되니까요. 이틀째 밤(3일장일)에는 부의함을 열어서 부의금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장례비용을 치릅니다. 이 뒤에도 또 여러 일들이 있지만 이상이 대강의 오늘날 장례식장의 풍경입니다. 쌓아둔 감정의 폭발로 일어나는 형제들 간의 멱살잡이나 문상 와서 노름하던 사람들끼리의 드잡이는 옵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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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장례식 모습(명성왕후 장례식)

세상이 달라져서 장례 절차가 그전에 비해 간소화되고 형식도 다양해졌지만 옛 사람들의 장례에는 지금과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로 묘지명(墓誌銘)이라는 것인데요.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추모하는 글을 써서 돌에 새기든지 그냥 종이에 쓰든지 해서 함께 묻는데 그 글을 묘지명이라고 합니다. 일단 글을 잠깐 볼까요?
숭정 갑진년(1664) 10월 15일 계유일은 망자 정랑의 운구가 나가는 날이다. 하루 전날 늙은 아비는 제사를 지내는 차에 목 놓아 울며 고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지극한 정은 표현할 글이 없으며, 지극한 슬픔은 나타낼 말이 없다”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다시 무슨 글을 지을 것이며 무슨 말을 할 것이냐. 그저 하늘을 부르며 길게 통곡하노라. 어서 죽어 이 아픔을 잊어버리고자 하지만 되지를 않는구나. (…중략…) 하늘이여, 하늘이여, 가슴이 미어진다,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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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
_ "그들의 삶이 흔적이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위의 글은 우암 송시열과 함께 서인을 이끌었던 동춘당 송준길이 지은 아들의 묘지명입니다. 오늘 인사시켜 드릴 책, 『옥 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태학사)에 실려 있습니다. 이 책에는 우리에게 ‘위인’으로 잘 알려진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교산 허균 등이 겪은 절절한 죽음의 사연이 실려 있습니다. 책 제목은 간서치로 잘 알려진 이덕무가 누이를 잃고 “너는 비록 이제 편해졌지만, 내가 죽으면 누가 울어줄 것이냐? 컴컴한 흙구덩이에 차마 어찌 옥 같은 너를 묻으랴”라고 울부짖은 데서 따온 것입니다. 연암의 경우 누님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누님이 시집가시던 날 심술을 부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합니다. 강정일당이라는 여인은 자식을 잃고 이렇게 말합니다. “슬픔에 겨워 버려두지 못하고 글을 지어 그 사연을 기록하니 이는 마음에 복받치는 정이 있어서라. 바라건대 후세 사람들은 이 마음을 헤아려 밭가는 소로 하여금 (자식의 무덤을) 밟아 뭉개지 않도록 하시라.” 추사 김정희는 예술가답게 굉장히 낭만적입니다. 후세에 다시 부부로 태어나거든 그때에는 자신이 먼저 죽어 지금 내가 겪은 슬픔을 당신도 겪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이 책과 처음 인사한 것은 2004년이었는데 그때는 박지원, 중상학파 실학자. 『열하일기』저술. 정약용, 실학자. 『목민심서』, 『경세유표』저술 등으로만 알고 있었던 이들에게 이런 감정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아, 이 양반들도 사람이었구나! 뭐, 이런 감정이었죠). 이제 올해로 아홉수 반열에 오른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슬픔과 황망 중에 종이를 펼치고 붓을 들어 고인의 삶과 그들과의 추억을 기록하는 저들의 모습입니다. 이 책에는 세 살배기 자식 농아를 잃은 아버지 정약용의 글도 있는데요. 3년이라는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두 해나 귀양 가 있던 아버지와 떨어져 있던 농아는 정약용이 강진에서 보낸 소라껍질을 기다리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런 애절한 사연 뒤에 이 책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사실 덧붙여 있는 글이 있습니다. “요절한 자녀들에 대해서는 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 후세에 징표가 되게 하고, 그들의 삶이 흔적이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라는 복암 이기양의 말에 따라 다산이 자식들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짤막하게 적은 글인데요. 여기에는 유산한 아이에 대한 기록까지 있습니다(자세히 보시고 싶으신 분들은 같은 출판사 『뜬세상의 아름다움』이라는 책을 보시면 됩니다).

어쨌든 옛사람들이 험한 일을 당한 와중에도 고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했던 것은 어떻게든 그들이 세상에 왔다 갔던 흔적을 남겨주는 것이 살아 있는 자로서의 의무라고 여겼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망자의 죽음을 슬퍼할 줄은 알아도 그들의 삶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할 줄은 모르는 우리의 모습과는 참 대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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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Memorial Day Visit(퓰리처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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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은 이의 삶이 사라지는 것이겠지요. 슬픔 속에서도 붓을 들어 고인의 삶과 그와의 추억을 기록함으로써 그에 대한 예와 의무를 다하고 살아 있는 자들의 슬픔도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진작 이 책을 읽었던 저도 얼마 전 큰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저 슬퍼하지밖에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보다 그분이 살아내신 삶이 안타까워서 많이 울었습니다. 죽은 이들의 삶을 짧은 기록으로나마 남기는 것도 옛사람들만큼의 내공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가봅니다.
- 편집부 평택개고기
2009/01/28 11:10 2009/01/2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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