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자본주의 역사 강의』(책 소개 바로가기)의 저자이자, 『장기 20세기』(책 소개 바로가기)의 역자이신 백승욱 교수님께서 『장기 20세기』를 소개해 주신 글입니다. 백승욱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미국 세계헤게모니 시기 '장기 20세기'
― 역자가 소개하는 『장기 20세기 :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

백승욱

『장기 20세기』에서 아리기는 자본주의를 개별 국가 단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 역사 속의 세계체계적 차원의 변화로 보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아리기는 자본주의의 장기역사를 일정한 리듬을 지닌 순환 과정으로 규명하고자 하는데, 여기서 그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체계적 축적순환이라는 개념으로, 이는 생산의 특정한 조직방식 및 이를 기반으로 한 전지구적 경제조직화를 보여주는 축적체제가 역사적으로 교체되어 온 과정이다. 자본주의를 단순한 개별적으로 분산된 자본간의 경쟁이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거대 자본들의 경쟁으로 이해할 경우, 새로운 축적체제는 특정 지역이나 국가의 자본이 세계경제에서 상대적으로 독점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로 이해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은 국가간체계이다. 자본주의는 원리상 국가를 초월하는 팽창적 경향을 가지고 있으나, 현실의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독점을 행한 대자본들의 경쟁은 이런 경쟁을 지원하는 정치적 틀로서 민족국가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독특한 역사적 특성이 발생하게 된다. 어떤 한 국가도 이런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절대적 우위에 설 수 없도록 하는 상호 제약의 틀인 국가간체계가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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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의 '장기순환' 쟁점들 : 장기 세기들과 체계적 축적순환들

체계적 축적순환과 국가간체계의 변증법적 결합은 근대자본주의의 역사를 만들어 낸 중심축인데, 이 때 체계적축적순환은 자본주의의 원리를 표상하여 초민족적이고 코즈모폴리탄적 경향을 나타내는 반면 국가간체계는 개별국가를 단위로 한 영토주의적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체계적 축적순환과 국가간체계가 결합한 근대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특정 시기 강력한 국가를 배경으로 한 자본은 상대적으로 세계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축적체제를 수립하는 동시에 강력한 군사·정치력·이데올로기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가간체계에 자국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고이윤 부문을 독점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런 국가를 우리는 세계 헤게모니라고 부른다.

근대 자본주의 역사는 이런 헤게모니의 등장과 쇠퇴, 그리고 새로운 헤게모니로의 교체의 역사로 파악된다. 가까운 시기부터 역으로 추적해 보면, 장기 20세기의 미국 헤게모니, 장기 19세기의 영국 헤게모니, 장기 17세기의 네덜란드 헤게모니를 들 수 있고, 여기에 아리기는 다른 세계체계 분석의 이론가들과 달리 일종의 전사로서 장기 15/16세기의 제노바 헤게모니를 추가한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세계 또한 지중해 세계로부터 유럽세계로, 그 다음 전지구로 확대되어 왔다. 각각의 헤게모니는 축적체제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조직혁명’을 통해 생겨나는 새로운 효율성을 통해 이전 축적체제의 수익성 하락 위기를 반전시킨다. 제노바 헤게모니가 네덜란드 헤게모니로 교체되는 과정에서는 경제영역에서 국가(국방)의 분리가 발생하는 ‘보호비용의 내부화’가 진행되며, 영국헤게모니로 이전하는 과정에서는 생산과정을 자본이 직접 내부로부터 통제함에 따라 발생하는 ‘생산비용의 내부화’가, 그리고 미국헤게모니로 이전하면서는 분산된 생산과 유통의 고리들을 초민족적 법인기업 내부에 포섭함에 따라 형성되는 ‘거래비용의 내부화’가 진행된다.

헤게모니 교체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아리기는 헤게모니의 부침을 ‘실물적 팽창’과 ‘금융적 팽창’ 두 국면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새로운 헤게모니의 경합국은 새로운 축적체제의 우위를 바탕으로 세계자본주의의 새로운 축적의 중심으로 부각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처럼 생산의 새로운 집적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가치생산이 늘어나는 실물적 팽창 국면이 개시되고 이것이 세계경제의 새로운 팽창을 주도한다. 국가간체계 또한 헤게모니 국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질서로 재편되면서 적어도 중심부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 구도가 유지된다. 그러나 일정 시기가 지난 후 실물적 팽창은 한계에 부딪히고 이윤율은 하락하게 된다. 헤게모니 체계의 정치·사회적 유지비용이 증가하고 후발 헤게모니 경합 국가들이 저비용의 우위를 기반으로 헤게모니 국가의 축적체제를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헤게모니 국가의 생산비용 우위의 토대는 약화된다. 이윤율이 하락하여 이윤율과 이자율의 역전이 발생하는 지점에 도달하면 방향은 역전되어 물질적 팽창은 중단되고 금융적 팽창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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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만국박람회장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는 유럽의 상류계층(런던, 1899년)
_ 원래 '화려한 시절'을 뜻하는 불어의 벨에포크는 풍요로운 경제력에 기반해 소비생활이 활발해졌던 1890~1914년의 기간을 지칭한다. 아리기는 이 표현을 어느 한 세계헤게모니의 순환이 '최종적 위기'에 빠지게 되는 시기 바로 그 이전으로 정의한다. 화려한 만큼 짧은 벨에포크는 기존의 세계헤게모니가 곧 맞이하게 될 가혹한 위기의 징조이다.

이윤율이 하락하는 헤게모니 국가의 자본은 생산부문의 신규투자를 점차 중단하게 되고, 생산상의 우위를 이제 금융상의 우위로 전환하여 하락하는 수익성을 만회하기 위해 금융부문을 주도산업으로 하여 전환을 개시한다. 금융부문은 헤게모니 국가의 특권적 우위가 있는 부문인데, 이러한 금융적 팽창은 헤게모니의 쇠퇴국면에 반작용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헤게모니의 쇠퇴는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다시 한번 반전하여 자본의 수익성이 상승하여 호황을 누리는 국면이 나타나게 되며, 이를 아리기는 벨에포크(경이적 순간: la belle époque)라고 부른다. 에드워드조의 영국(1896-1914년)이 그러하며, 20세기 후반에는 1980년대부터(또는 1993년부터)의 미국이 그러하다.

그러나 벨에포크는 축적체제의 근본적 전환이 아닌 단순한 자본수익성 하락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기 때문에 헤게모니의 전성기에 비해 그 지속 기간이 매우 짧다. 벨에포크가 종료되면서 세계체계는 거대한 불안정에 빠져들게 된다. 이와 관련해 아리기는 두 가지 위기를 구분한다. 먼저 실물적 팽창이 금융적 팽창으로 이전되는 시점을 신호적 위기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위기는 과잉생산 위기가 아닌 과잉축적된 자본 때문에 발생하는 금융위기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어 벨에포크를 거치면서 금융적 위기는 전세계적으로 확대되고 결국 세계경제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개별 국가들을 상호 폐쇄적인 상태로 몰고 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또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금융화한 자본은 새로운 고성장 지역을 찾아 전세계를 떠돌게 되며, 새로운 헤게모니 경합 지역들은 이런 이동 자본을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된다. 자본은 새롭게 집중되며,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쇠퇴하는 헤게모니를 계승하려는 경합이 벌어짐에 따라 중심부 국가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이는 결국 헤게모니 하에서 유지되어 온 국가간체계의 질서 자체를 붕괴시키는 체계의 카오스로 귀결된다. 이 시점에서 위기는 최종적 위기로 치닫게 되는데, 이 위기는 여러 차례의 세계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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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회담의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1945년 2월 8일)
_ 18세기 후반~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영국 헤게모니는 에드워드 왕 시절의 벨에포크를 지나 1차대전 이후에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 뒤 20여 년간 꾸준히 힘을 기르던 미국은 2차대전 이후 바야흐로 명실상부한 세계헤게모니 국가가 된다. 냉전의 시작을 알렸던 1945년의 알타회담은 미국 헤게모니의 전지구적 확장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앞선 헤게모니의 교체의 역사에 대한 설명은 20세기 미국헤게모니의 부침을 중심으로 하는 ‘장기 20세기’의 순환적 특징과 동시에 특이성을 포착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법인자본주의에 바탕하고, 고도금융에 대한 통제를 목표로 한 뉴딜을 통해 자본주의에 새로운 순환을 개시한 미국 헤게모니는 양차 대전 사이에 전장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전시물자 공급지라는 이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었고, 또한 영국헤게모니 하에서 형성된 금융자본의 투자가 집중됨에 따라 빠른 속도의 성장을 해 나갈 수 있었다. 2차 대전 종료 후 미국은 붕괴된 세계경제질서를 통합하는 틀을 만들기 위해 브레튼우즈 체제를 설립하였고, 또한 UN과 냉전을 통해 국가간체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헤게모니는 그에 앞선 다른 헤게모니에 비해 지속 기간이 매우 짧아서, 1945년부터 시작된 미국헤게모니의 정점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종료되었다. 미국은 1970년대의 경제위기를 발권특권을 이용해 조절하였으나, 이는 자본 수익성과 달러 신뢰성에 위기를 초래하였다. 미국 법인자본주의의 초민족적 확장과 미국 세계권력의 민족적 기반 사이의 모순은 점차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미국은 금융적 팽창을 본격화하는 1979년의 이른바 ‘볼커혁명’을 단행하게 된다. 이자율 인상과 긴축정책으로 요약되는 볼커혁명은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제 3세계에 대대적인 외채위기를 불러오면서 제 3세계의 ‘발전주의’ 시대를 종료시켰지만, 미국이 벨에포크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냈다. 미국의 벨에포크는 구조적 위기를 더욱 증대시키면서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의 벨에포크는 이전의 세계자본주의 헤게모니의 교체과정과는 상이한 조건을 형성하였으며, 자본주의 자체가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던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동아시아가 쇠락하는 헤게모니 국가와 어떤 연계성을 형성할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 이미지와 캡션은 『자본주의 역사 강의』(백승욱, 그린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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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2 16:05 2009/02/0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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