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과 냉소 사이, 무능한 자가 여는 길

곽소현 (연구공간 수유+너머) 

잘못된 과거의 헐벗은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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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 1981년 진도조작간첩사건 기록영화」 포스터, 2007년
_ "재판장님, 저희 가족은 무죄입니다." 1981년, 인생의 시계가 멈춰버린 한 남자와 가족들에 대한 기록영화.
요즘은 연일 용산 철거민 사망 참사로 신문지상이 떠들썩하다. 미네르바 구속사건에 이어서 이번 용산 사태를 철거민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정부의 태도는 그들의 무능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특정한 비판에 대해서 나름의 합리적 관점을 갖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채 비판자를 침묵시키거나 제거하는 지도자, 대화나 설득을 기초로 해서 국민의 이해와 공감을 끌어내야 하는 리더가 듣는 귀는 없이 일방적 명령과 복종을 강요하는 행태는 민주주의 사회의 지도자 자격을 스스로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성숙한 민주적 지성을 가진 국민이 대화와 설득 능력 부재의 이런 폭군 지도자를 언제까지 봐줄 수 있을지 미지수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태보다 좀 더 가슴을 답답하게 한 작은 신문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81년 ‘진도 간첩단 사건’ 재심 무죄라는 작은 제목을 단 이 기사는 국가의 잘못된 법적 폭력이 개인의 삶과 자유를 얼마나 처참하게 짓밟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81년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세 사람이 올해(2009년) 22일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들이 검찰의 혹독한 고문 때문에 허위자백을 했고 재판과정에서 변호사의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이들은 당시 남파간첩에게 포섭돼 간첩행위를 도왔다는 혐의로 기소됐으며, 석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18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함께 기소됐던 김씨는 사형을 당했다.” 이미 18년 동안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며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과 감옥에서 죄 없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버린 사람. 이 사람들에게 국가는 어떻게 사죄해야 하는가? 사죄할 수는 있는가? 이런 일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나라가 내가 사는 나라 한국이다. 잘못된 역사의 되풀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비판능력의 부재가 권위주의를 존속시킨다

국가 안보 유지를 정당성의 기초로 한 대한민국 젊은 남성의 병역 의무화 시스템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 채 지금도 한국식 권위주의를 재생산하는 매커니즘이 되고 있다. ‘인간이 되려면 군대에 다녀와라’는 말은 부당한 권위에 반발하지 않고 혹은 그것들을 참아내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논리에 순종할 수 있는 훈육된 신체로 길들여지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온갖 스트레스를 견디며 진행되는 공무원 생활이나 정규직을 적극적으로 갈망하는 한국인의 욕망은 이처럼 부당한 명령에 잘 순종할 수 있는 군대식으로 훈육된 신체, 그리고 그렇게 견딘 삶이 줄 거라고 믿어지는 달콤한 열매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한다. 학교와 군대를 통해서, 그리고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해 또 다른 집단으로의 단절 없는 편입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관점과 목소리를 키울 수 있는 여지를 상실한 채 살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돈’이라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은 이러한 흐름에 한 몫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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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육군훈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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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육된 신체로 길들여진 '능력 있는 인간'을 생산해내는 '권위주의' 매커니즘이 작동하는 곳, 군대.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 조용학)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능력 있는 인간’이란 일반적으로 사회나 조직에 잘 적응하는 인간, 경쟁력 있는 인간, 부당한 권위나 명령에 딴죽 걸지 않고 묵묵히 주어진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인간, 주어진 것들을 혹여 그것이 견딜 수 없이 부담스러운 일일지라도 잘 참아내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인간을 말한다. 70-80년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그런 침묵과 희생의 미덕을 몸소 실천한다고 여겨지는 아버지와 큰 아들에 대한 존중이 음지에서의 그들의 첩질과 오입질을 정당화시켜왔고, 그 곁에 머무는 며느리의 희생과 자식들의 순종을 정당화해왔다. 침묵과 희생의 논리를 기초로 한 가족주의. 하지만 지금 사회는 이처럼 일방적인 가부장적 흐름의 체계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어느 부분은 그렇게 돌아가고 어느 부분은 아니다. 명박 세대의 정신은 여전히 이러한 가부장적 사회에서나 통용되었을 법한 막힌 대화, 단절된 정서적 논리를 진리로 간주하고 있으며 지금 자라는 어린 정신들은 이것들을 이해하거나 수용할 수 없는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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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괴물」의 '무능력한' 백수 역, 박남일
어설프게 끼인 삼십대. 50대의 낡은 권위주의에도 냉소적이고, 책임 없이 남발하는 어린 정신의 비판에도 회의적인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권위에 대한 맹신과 그것에 대한 냉소 사이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비판능력의 부재는 부당한 권위주의를 존속시킨다. 잘못된 역사, 부당한 국가의 폭력이 국민의 일상적인 삶을 침해하는 용서받기 힘든 이런 잘못이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행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목소리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까? 그건 ‘무능한 자’에게서 인 것 같다. 여기서 ‘무능한 자’란 앞서 내가 말한 ‘능력 있는 인간’이 아닌 자들을 말한다. 부당한 권위에 맹종할 수 없는 자, 그것들을 견디는 조건으로 떨어지는 떡고물을 먹으면 체하는 자, 그것들과 타협할 수 없어서 ‘거리로 나선 자’를 말한다. 내가 보기엔 제 한 몸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삶의 유일한 기치로 삼아 달리는 ‘능력 있는’ 경주마들의 대열에서 벗어나, 이들 할 일 없이 길거리로 나와 배회하는 자,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 얻어터져 시퍼레진 타인의 눈두덩을 보고 쓸데없이 분노할 줄 아는 자가 소리 없이 자행되는 부당한 일상적 폭력들에 대한 비판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능한’ 자의 ‘능력’

이런 무능한 자의 목소리가 어떻게 권위주의적 삶에 균열을 내는지를 엿보고 싶다면 고병권님의 삶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병권님은 이 시대의 또라이다. 그는 잘나가는 학벌에 박사학위를 가졌으면서도 취업을 거부한 채 사회적 무능력자가 되기를 선언한 적극적 실업자다. 그러면서도 쓸데없는 남의 일에 관심은 많고, 참견하며, 함께 일 벌리기를 좋아한다. 사회적 기피대상 1호인 범죄자들이 있는 교도소를 제 돈을 들여서 찾아가 사회적으로 유용성 없다고 여겨지는 인문학 강의를 하고 토론을 한다. 또 저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간주되는 학벌이면서도 지식인의 죽음을 ‘자신 있게’ 선언한다. 그뿐 아니라 촛불시위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는 현장이라면 앞서서 달려가 함께 뛴다. 이 시대의 무능한 또라이가 벌인 짓. 선언하길 밥 먹듯 하는 그가 어떻게 이 땅의 견고한 권위주의에 균열을 내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다면 『추방과 탈주』를 읽어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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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 질문하기
_ 고병권, 그는 벗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앎을 얻고 삶을 실천하는 급진적 무능력자다. 그같은 무능력자들이 길에 넘쳐나길, 또 그들의 능력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가길 꿈꿔본다.

고병권의 글은 언제나 절반은 살아온 날에 대한 고백이며, 절반은 앞으로 실천해 나갈 미래에 대한 선언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진지한 지식인이라면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소위 그 ‘선언’이라는 것을 밥 먹듯이 하며, 그 말에 따라서 지금껏 걸어온 자다. 『추방과 탈주』에도 소수자 투쟁 선언, 걸으면서 질문하기, 대중지성 프로젝트를 위한 선언, 시민지식네트워크를 위한 독서 프로젝트, 코뮨주의 선언 등 이제까지 벌여온 다섯 개의 선언과 그에 부합하는 실천의 기록이 서술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또라이적 행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행보에 발맞춰 함께 걷는 벗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벗들에 대한 고마움을 결코 잊지 않는다. 
    
꼭 김영민+님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이러한 ‘무능한 자의 급진성’은 권위주의에 대한 맹종과 그것에 대한 냉소 사이에서 현실에 없는 길을 열어가고 있다. 시대가 인정하는 ‘능력’을 거부하고 적극적인 무능력자임을 자처하며 새로운 능력의 장을 스스로의 삶을 통해 열어가는 또라이들. 이런 또라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하나 둘씩 앞서 걸어가는 이 또라이들의 행보를 보면서 나 역시 프랭클린의 ‘돈이 되는 시간’ 외부를 배회하는 이 시대의 급진적 무능력자가 되기를 꿈꿔본다.

+ 김영민, 『동무론』에 관한 글 http://greenbee.co.kr/blog/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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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1 10:19 2009/02/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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