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저항을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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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이스마엘 압바스
_ 의사가 꿈이라던 이라크 소년, 알리는 전쟁으로 가족도 꿈도 잃어버렸다.
알리 이스마엘 압바스라는 이라크 소년이 있었다. 2003년 미국의 바그다드 공습으로 20여 명의 가족이 몰살당하는 와중에 홀로 살아남은 소년 알리. 알리는 두 팔을 잃었고, 온몸에 화상을 입어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지만, 그런 처참한 모습을 담은 사진이 세계적인 관심을 끌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라크를 박살내는 데 여념이 없었던(혹은 ‘기꺼이’ 구경만 하고 있던) 서방의 국가들과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그 사진 한 장에 다시 인도주의의 가면을 덮어쓰고 옹색한 ‘친절’을 베풀기 시작했고, 알리는 영국에서 의수를 받고 캐나다로 입양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2003년에 열세 살이었으니, 벌써 10대 후반의 어엿한 청년으로 자랐을 터. 알리가 전쟁의 상처를 잘 극복했을지, 가족들을 몰살시킨 학살자들에 대한 증오로 몸부림치고 있지는 않을지……. 그래도 알리는 나은 편인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시체 사이에서 방치된 채 죽어가고 있는 가자 지구의 아이들에 비하면 말이다.

그렇게 세계는 아직도 전쟁 중이다. 이라크에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폭음과 총성은 멎질 않고, 가자 지구에서는 미국의 비호 아래 이스라엘이 대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곧, 계속해서 사람들이 무고한 목숨을 잃고 있다는 뜻이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해에 출간된 진중권 교수의 『레퀴엠』은 이렇게 전쟁에서 죽어간, 혹은 죽어가고 있는 이들을 위한 진혼곡이다.

얼굴

저자는 전쟁을 게임이나 장대한 스펙터클 정도로 여기는 이들에게 전쟁에서 죽은 이들의 맨얼굴을 들이댄다. 그러나 그 얼굴들은 무기에 짓이겨진 시체의 ‘죽은’ 얼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이다. 첫번째로 저자가 들이대는 것은 병사들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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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의 얼굴
_ "전장으로 달려나가야 하는 병사들도, 누군가의 연인이고, 친구이고, 가족이다"

‘릴리 마를렌’+. 2차세계대전이 벌어졌던 1939년 작곡되어 1941년 독일의 선전방송을 통해 전장에 울려퍼진 이 노래는 전쟁에 참전했던 모든 병사들에게 국적을 가리지 않고 사랑받아 지금까지 48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전선으로 떠나기 직전 가로등 아래에서 이별을 하는 병사와 소녀의 이야기로, 이 노래의 주인공인 ‘릴리 마를렌’은 모든 병사들의 연인을 상징하게 되었고, 이 노래가 전장에 울려퍼지는 밤 9시 55분경에는 암묵적인 휴전이 이뤄질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는 이야기. “이 노래가 울려퍼지는 동안 병사들은 적군과 아군으로 갈라놓은 전선을 지우고, 가로등 아래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한 여인의 연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 여러 언어로 발표된 ‘릴리 마를렌’을 공식 홈페이지에서 들을 수 있다.

이렇게 군복 속에 갇혀서 죽음이 예정된 장소로 달려나가야 하는 병사들도, 누군가의 연인이고, 친구이고, 가족이라는 사실. 그들 역시 군모를 덮어써 얼굴을 지우기 전까지는 각자의 삶을,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전쟁은 그런 이들을 피가 흐르고 살점이 튀는 아비지옥으로 몰아넣는다. 잠깐만 접해도 큰 트라우마로 남을 경험들을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전쟁 상황에서 병사들이 멀쩡할 리 없다. 미쳐버리거나 무감각해지거나. 학살자가 되거나 가미가제가 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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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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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사라진 채, 불을 뿜으며 타오르는 전차들만이 마치 스펙터클한 영화처럼 보도된다. 그래서 알리의 얼굴이 보도된 후에야 그들은 전쟁이 영화가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고, 무감각했던(혹은 기뻤던) 감정이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일까? (이미지 출처 : http://www.fotos.geschichtsthemen.de/iraq-war/iraq.htm)

그러나 서방의 언론들에게 전쟁은 스펙터클이다. 그들은 밤하늘을 휘황하게 밝히는 포탄과 총탄의 불꽃들을 중계한다. 실제로 그 불꽃들 아래에서 사람들의 몸이 갈가리 찢기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저자는 묻는다. ‘CNN이 보여 주는 화면 속 이라크군의 전차는 하나같이 불을 뿜으며 타오르고 있다. 거기에도 사람이 타고 있었을 터. 용광로처럼 끓는 쇳덩어리 속에서 사람이 까맣게 타죽어 간다는 사실이 왜 그들을 저토록 기쁘게 할까?’ 같은 식으로, 도시락과 망원경을 들고 가자 지구 ‘유람’에 나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물어야 하지 않을까? 포격으로 사람이 산산조각 나는 상황이 왜 당신들을 기쁘게 하냐고…….

죽은 자의 망막에 남은 자

다카하시 가즈미(高橋和己)의 작품 중에 「사자(死者)의 시야에 있는 것」이라는  짧은 글이 있다. 학생시절 읽은 글인데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에세이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경찰 권력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은 평론집의 서장으로, 여기에는 숨이 끊어진 시체의 망막에 최후의 영상이 계속 남는다는 우화(寓話)가 등장한다. 시체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볼 뿐이다. 그 죽음의 순간에 본 영상을 망막에 새겨 넣은 채 시체는 계속 존재한다. 그리고 그 망막에 새겨진 영상에 등장하는 자는 비록 시체 옆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 시체는 아니다. 총살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이미 총을 맞은 자가 그 죽음의 순간에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의 옆얼굴을 자신의 망막에 포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시체의 얼굴은 아니다. 또한 그 옆얼굴은 죽음이 예정되고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자의 얼굴도, 그렇다고 총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밝은 얼굴도 아니다. 그리고 폭력에 저항할 가능성에 대해 사고하고자 한다면 사자의 망막에 포착된 바로 곁에 있는 자의 옆얼굴에서 시작해야 한다. 시체 곁에 있는 자는 언제나 응시되고 있으며, 응시되고 있다는 것은 다음 총살을 기다리는 사람의 운명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옆얼굴은 기술자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다.
(『폭력의 예감』 ‘서장’ 중에서)

그린비에서 곧 나오게 될 『폭력의 예감』에서 저자인 도미야마 이치로가 하고 있는 이야기이다(이 이야기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전장의 기억』에도 실려 있다).『레퀴엠』을 읽으며 계속 이 영상을 떠올렸다. 시체의 망막에 남은 자, 총살의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폭력에 저항할 절박한 가능성’을 가진 자. 그렇다면, 바그다드에서, 가자지구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망막에 남아 있는 자들은 누구일까?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과 저항의 임계점에 서 있고, 우리 역시 그 임계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이라크 파병 과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에서, 건수만 있으면 모여서 ‘생떼거리’를 쓰고 있는 우익들의 집회에서 이런 임계점에 대한 체험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추방과 탈주』에서 저자 고병권이 제시한 것+과 비슷하게, ‘팍스(!) 아메리카나’의 주변부에 살고 있는 이 ‘국익주의자’들은 불안감에 떨면서 미국에 동조하거나 충성을 맹세한다. 자신이 언제든 꿇어앉혀져 총살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애써 망각하고, ‘괜찮다, 괜찮다’라고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는 이들. 이렇게 저항의 자리는 곧 야만의 자리이기도 하다. 『레퀴엠』에서 진중권은 펜타곤에 앉아 게임하듯 학살을 자행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이런 야만의 근거들(이라크 전쟁 파병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나섰던 복거일, 3.1절에 성조기 휘날리면서 미국을 찬양하던, 기독-군바리주의자들 등등)을 통렬히 비판한다. 자신이 다음 차례인지도 모른 채 동료들에게 총질을 해대는 미련한 자들…….

+ “주변으로 추방된 대중은 대개의 경우 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내치는 국가와 자본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도미야마 이치로가 식민주의 경험을 통해 ‘폭력’을 ‘예감’하려 한 것은, 그 폭력이 예전 식민주의 시기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의 폭력, 제국주의적 폭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그것도 총과 포탄이 난무하는 전장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말이다. 『레퀴엠』도 똑같은 방식으로 읽힌다. 저자는 주로 이라크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전쟁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가 이 책을 쓴 지 6년이 지나도록 ‘전쟁의 세계’는 변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저자는 국가가 대중에게 선포한 폭압적인 ‘전쟁’에 저항하기 위해 촛불과 마이크를 들고 거리로 나서야 했다. 명박이와 부시가 마주보고 웃는 동안, ‘전쟁’은 명실상부하게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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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 대신 촛불을 들고, 수류탄 대신 장미꽃을 꽂고, 폭탄 대신 의약품을"

그 와중에, 결국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5명이나 되는 철거민들이 ‘괜찮아, 괜찮아’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대신, 절박하게 자본과 권력의 폭력에 맞서 싸운 대가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들의 망막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들은 누구일까? 무시무시한 불길과 경찰과 용역깡패들 너머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이웃들,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바로 우리들이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 미디어를 방패삼고 자본과 권력을 거느리고 우리에게 ‘총질’을 해대고 있는 자들을 멈추게 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무수히 보아왔던 것은 아닐까?

그 어떤 무기도 그 어떤 군대도 미군이 지키는 그 성의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소총 대신 촛불을 들고, 수류탄 대신 장미꽃을 꽂고, 폭탄 대신 의약품을 보내는 시민들의 평화시위 앞에서는 그 견고한 요새의 성벽도 언젠가 힘없이 무너져내릴 것이다. 예리코 성을 무너져내리게 한 것은 노랫소리였다. 미군이 지키는 제국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것 역시 요란한 포성이나 찢어지는 총성이 아니라 고요한 반전평화의 노랫소리다. 사악한 자들이 날뛰는 시대에 야훼든 알라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아마 이런 식으로 역사(役事)할 것이다.
(『레퀴엠』 150~1쪽)


- 편집부 박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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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2 09:48 2009/02/1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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