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복수!
― 원한도 용서도 없는 복수, 김시종과 송신도의 말과 삶


오하나 (연구공간 수유+너머)

“아무리 져도 나는 녹 안 슬어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마라
백년 살아도 내일 고꾸라져도 한다
돈이 없어도 옷이 없어도 장신구가 없어도
위안부 문제 해결 해 보여줄게
이 정치가놈들아”
(영화「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중에서)

복수는 원한에서 시작한다. 복수는 원한 가득한 자신의 기억에 대한 보상이다. 이 복수가 즐거우려면, 적을 향한 복수가 자신의 삶의 연장이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버리고 찬란하게 복수를 감행한들 그 뒤에는 적의 잔해와 켜켜이 먼지 쌓인 일상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또 하나, 복수가 즐겁기 위해서는 외로운 복수의 길 위에서 동료를 만나야 한다. 일본에서 자이니치로 사는 두 사람, 조선인 위안부 송신도 할머니와 시인 김시종.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즐거운 복수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단서를 공유하는 동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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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도 할머니(좌)와 김시종 시인(우)
_ 위안부 송신도 할머니와 자이니치 문학가 김시종 시인의 삶은 (객관적을 봤을 때) 전혀 즐겁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복수가 즐겁고 활기차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입부의 시 아닌 시는 조선인 ‘위안부’ 송신도 할머니의 즉흥 노래로, 얼마 전 개봉한 영화「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한 장면을 가져온 것이다. 영화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사죄를 내건 송신도 할머니와 그녀를 지원하는 모임의 소송을 다룬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송에서 할머니와 연대모임 측은 결국 청구 시한이 지났다는 일본고등법원의 말과 함께 패소한다. 일본 정부에 맞서 자그마치 10년의 세월을 함께 싸워온 지원자들은 기자회견장에서 저마다 억울함과 슬픔을 호소한다. 그때 할머니는 마이크를 잡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여러분들도 일본의 수치라 생각하지 말고 이 ‘빌어먹을 전쟁’ 다시는 하지 말라고 당당히 말하라.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일본을 호통치다, 일본을 감동시키다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정부가 그간 숨겨왔던 전쟁 당시의 과오를 낱낱이 밝혔다. 재판으로, 집회로, 증언의 형태로 할머니는 피해자로서 가해국 일본 정부를 향해 복수한 셈이다. 실제로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에서 조선인이기에, 여성이기에 성노예 생활 중의 폭행으로 청각장애와 각종 병을 앓는 노인이기에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가 가질 수 있는 포지션을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회는 이들을 자주 보호와 연민의 대상으로 대한다. 하지만 송신도 할머니는 이를 한사코 거부하며 호통으로 화답한다. 피해자답지 않은 분노와 웃음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일본 각지를 순회하는 증언 모임에서 때로는 퇴역 군인을 만나고 때로는 고등학생을 만나며 접속의 폭을 넓히고, ‘적’의 언어인 법정용어를 공부하며 싸움을 함께 준비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품었던 원한의 감정을 활기찬 투쟁으로, 일본인과 연대하는 복수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할머니와 연대모임의 투쟁은 적을 향한 긍정적 의미에서의 복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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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송신도 할머니의 연대
_ 어느 막장드라마의 복수극이 막장을 치달을 즈음, 복수의 화신인 주인공이 말했다. "당신은 알량한 돈을 잃었지만 나는 인생을 잃었다. 복수를 하고도 속이 시원하지 않다. 오히려 미안하다." 그녀의 복수는, 자신을 삶을 송두리째 버리고 외롭게 싸워 이겼지만 결국 자신의 삶도 적의 삶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에 반해 송신도 할머니의 복수는 긍정성을 촉발시키고 적마저 연대하게 만드는, 졌음에도 지지 않은 즐거운 복수였다.

『소수성의 정치학 - 부커진 R 1호』에 따르면 소수자는 “새로운 삶을 촉발할 수 있는 존재”이다. “‘다수자’(MAJORITY)에게 그들이 잊고 있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게 촉발하는 존재……그들이 무력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능력을 갖고 있는 존재, 자기 아닌 타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R1호, 244쪽)가 바로 소수자인 것이다. 원한에서 시작하지만, 원한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적과 마주하되 그 적마저도 변화시키는 삶.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함께 웃고 또 힘을 얻어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 방향으로 흐르는 복수가 아닌 힘이 되는 복수, 활기를 불어넣는 복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는 이렇듯 즐거운 복수를 수행할 수 있는 자인 것이다.

김시종, 자이니치-하다

여기 시인 김시종도 즐거운 복수, 원한도 용서도 없는 ‘자이니치’의 복수를 보여주는 한 사람이다.  

“내가 눌러앉아버린 자리는
백년이 고스란히 생각을 멈춘 곳
백년을 살아도 생각에 잠기는 날은 아직
어제 그대로 저물어 가는 곳
고국에 머얼리 타향에 머얼리
그렇다고 그토록 동떨어지지도 않은
늘상 되돌아오는 지금 있는 곳
여기보다 멀리 보다 바로 여기에 가까이”
(『경계의 시』,「여기보다 멀리」중에서)

김시종은 한국어를 모어로 두었지만 일본에서 일본어로 활동한 ‘자이니치’ 문학가이다. 그는 어린 시절 강도 높은 ‘황국신민’ 교육을 받으며 ‘민족어’로서의 한국어로부터 일찌감치 멀어진다. 남한에서의 좌익 활동 중 맞았던 제주도 4.3 사건 이후 그는 한국 정부의 억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일본어로 운동과 문필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의 일본어 사용은 어쩔 수 없는 방편이 아니었다. 그는 재일(在日)하는 동안 대한민국, 북한, 일본 정부 어느 곳에도 자신의 언어와 정체성을 환원시키지 않으며 일본 안에서 일종의 비-일본인 되기를 실험한다. ‘고국’도 ‘타향’도 아닌, ‘지금 있는 곳’ 즉 자신이 발 디딘 땅에 적극적 의미를 실었던 시인 김시종은, 재일(在日) 곧 자이니치를 동사형으로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저항의 방법을 창안해냈다. “자이니치 한다”는 것은 한국 정부로도 일본 정부로도 포섭되지 않는 자이니치의 시간을 살아감을 뜻한다. 그는 일본어로 시를 쓰되 일본 시가 가졌던 고전적 규칙들을 파괴하였고, 그의 말처럼 “시작부터 독자를 버겁게 만드는 꺼끌꺼끌한 일본어”로 일본어 자체를 낯설게 만들었다. 김시종은 스스로, 일본어를 통한 글쓰기야말로 일본을 향해 복수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복수는 일본어에 균열을 냄과 동시에 그 가능성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김시종 또한 사회적 약자로서의 소수자가 아니라 활기찬 복수를 수행한 소수자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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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시』 일본어판과 한국어판
_ 김시종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족교육은 우리 언어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 뭣합니까. 그 언어가 동족융합이 아니라 상대방을 찌르는 비수로 작용해왔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런 이유로, 한국에도 일본에도 포섭될 수 없는 그만의 언어를 복수의 도구로 삼아 활기찬 복수를 감행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방황했을 혹은 번역을 기다리는 말들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의 시집 『경계의 시』(유숙자 역)의 시들은 여타 일본 문학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어에 쉬이 동화될 수 없는 낯선 언어를 구사하지만, 일본어로 된 원작시조차 일본인들에게는 낯설다. 그의 시는 자신의 모어로 구사되어도 여전히 중역(重譯)된 글로 남는 셈이다. 그래서『경계의 시』에 묶인 시들은 일본어로 읽든 조선어로 읽든 남한의 표준어로 읽든 중역이 될 운명을 가진다. 일본, 일본어를 향한 김시종의 복수는 이처럼 어느 언어망에도 포섭되지 않는 비밀의 영역을 만들었다.
 
“원래의 ‘조국’과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일본’(혹은 다른 나라)과의 사이, 그 틈새에서 ‘재일’을 살며 어디로도 회부될 수 없는 고유한 삶의 방식을 창안하려 한다면, 상이한 삶이 섞이는 혼성의 지대를 창안하고자 한다면,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해 일본인이라는 다수자의 삶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주고자 한다면, 그 존재가 ‘자이니치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살려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의 ‘조국’, 그의 ‘국적’이 무엇이든, 마찬가지로 ‘자이니치를 사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존재들이 만나고 혼성되며 연대하는 긍정적 창조의 지대, 그것이 바로 ‘자이니치’라고 선언하고 있는 게 아닐까?”
(R1호, 257쪽)

즐거운 복수, 송신도 할머니와 시인 김시종. 이 두 ‘자이니치’의 시간은 재일조선인만 공유되는 것이 아니다. 소수자의 시선은 다수자가 되지 못한 자의 시선이 아니라, 다른 소수자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 하나의 공통감각을 만드는 시선이다. 이 감각에 의해 만물이 소수자임을 느낄 수 있게 될 때, 소수자성은 즐거운 복수를 위한 일종의 무기가 될 것이다. 우리 안을 가로지르는 즐거운 복수. 원한도 복수도 없는 복수. 오랜만에 펼쳐든 시집, 오랜만에 찾아간 영화관에서 즐거운 복수를 위한 여러 팁들이 쏟아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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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10:25 2009/03/1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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