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진정성, 치유로서의 철학

곽소현 (연구공간 수유+너머)

오류의 역사는 가라!

번뜩이는 천재성을 과시하며 건설과 해체의 갈림길을 걸었던 수많은 철학자들 중에서도 유달리 나는 해체와 치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사랑한다. 그에게 철학이란 체계적인 이론 쌓기가 아니라 활동이고 치유였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비트겐슈타인의 사유 방식을 따라간다는 것은 특정한 질문에 대해서 자기만의 이론적 체계를 건설해 답해가는 작업이 아니라 제기된 질문의 타당성을 되물음으로써 잘못 제기된 물음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그들의 사유 체계를 전달해주는 지식 전달자의 역할이었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네 고민 자체가 제대로 된 고민이냐?’ 혹은 ‘지금 네가 던지는 질문이 제대로 된 거냐?’를 끊임없이 되묻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란 체계적인 지식 쌓기가 아니라 일종의 활동이며, 그릇된 문제를 해소하는 치유 작업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동안의 철학사적 작업들이 항상 그릇된 물음을 던지고 그것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헛된 시도였거나 그러한 오류로 점철된 역사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오류고 무슨 질문이 잘못 던져졌다는 걸까?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논리-철학 논고』
_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단 한권의 저작.
『논리-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언어 철학은 근대적 표상 체계를 언어적 관점에서 완성하는 일이었다. 그에게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논리-철학 논고』, 49쪽)이고,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이며, 교설이 아니라 활동이다(같은 책, 48쪽). 이러한 생각에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세계 대응 이론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와 세계는 일대일 대응 관계에 놓여있다. 여기서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면 언어를 분석하면 될 거라고 보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이것이 『논리-철학 논고』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명제들로 구성된 총체다. 이 명제들은 복합 명제와 요소 명제들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요소 명제는 더 작은 단위의 이름들로 나뉜다. 비트겐슈타인은 각각의 요소 명제와 이름들에 대응하는 세계 사실들이 있다고 보았고 이것들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통해서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로서 기능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세계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명제들의 참과 거짓을 구분하고, 그러한 구분에 따라서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는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작업에 성공한다면 그동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왔던 오래된 철학사적 오류는 종결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명제의 진리 값을 분석하고 그것에 따라 명제들의 참과 거짓을 구분한다.

이러한 작업을 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언어로 말해지는 것은 세계 사실로도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책상’이라는 단어에 대응하는 실제 ‘책상’이 있어야 ‘책상’이 포함된 문장에 대한 참과 거짓의 분석 작업을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천사나 악마, 신, 선이나 이데아, 진리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단어들은 그것에 대응하는 세계 사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분석하는 작업을 실행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이 되며, 언어적 오류로 뛰어드는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처럼 신이나 진리, 선이나 아름다움 등 말할 수 없고 단지 보일 수만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보았다. 보일 수만 있고 말할 수는 없는 것들을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잘못된 질문에 그릇된 답을 찾는 오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다. 따라서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 문장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같은 책, 117쪽)로 끝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트겐슈타인(좌)와 칸트(우)
_
이성의 제약적 사용을 이야기한 칸트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을 이야기한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경험세계에 대한 관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비판'을 철학적 방법으로 삼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지금까지의 철학사가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 말하려고, 혹은 답을 내보려고 헛되이 노력해 온 역사라고 본다.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혼동의 역사,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묻고 말해서 잘못 제기된 물음과 답들로 가득 찬 역사가 철학사이며 따라서 철학사는 오류사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선언을 담은 『논리-철학 논고』를 내놓은 후 더 이상 철학에서 자신이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해 철학적 담론의 장을 유유히 떠난다. 하지만 그의 뒷덜미를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있는 그대로 보라

철학적 물음들은 정말로 모두 해결되었는가? 세계 사실을 담는 거울, 언어적 의미들은 정말로 명확해졌는가? 세계와 언어 간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통해 언어의 참된 의미가 밝혀진다고 보았던 그. 말할 수 없는 것을 침묵하게 만듦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은 더욱 명료히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대는 헛소리는 이제 그만두라는 당당한 선언을 남기고 떠났던 비트겐슈타인. 그가 다시 철학적 담론의 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 오류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자신이 가르쳤던 초등학생들에게서다.

기다란 쇠막대로 야구를 하면 그것은 야구방망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때리면 무기가 되고 못을 박으면 망치가 된다. 그러면 그 쇠막대는 야구방망이인가, 무기인가, 망치인가? 아이들은 하나의 도구를 이처럼 자기의 쓸모에 맞게 변형해 사용한다. 그렇다면 그 도구에 고정된 의미라는 게 있는가? 또한 아이들은 끊임없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그릇된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러한 실수의 과정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나 의미의 용법들을 하나씩 익혀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체스
_ 『논리-철학 논고』에서 언어가 세계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그림'과도 같다고 보았던 비트겐슈타인은 후기로 가면 생각이 바뀐다.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쓰이는 맥락에서 나오는 '놀이'이자 활동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아이들의 행동과 언어 사용 방식을 관찰하면서 깨달은 것은 이러한 점이었다. 즉 고정된 하나의 의미나 세계 사실, 사물이란 없다는 것. 어떤 도구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쓰이는 관계적 장이나 맥락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의 일상적 쓰임이나 용도를 통해서 그것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이론은 언어 게임 이론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장기 놀이의 말들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그 물리적 성질들을 기술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놀이 규칙들을 진술함에 의해서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이야기해야 한다.’(『철학적 탐구』, 95쪽) 비슷한 장기 말들이지만 그것이 졸인지 왕인지는 그것의 역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사물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그것의 활동이고 쓰임이다.

여기서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참과 거짓을 가르는 작업이 의미를 밝혀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의미가 드러나는 곳은 인간이 활동하는 삶의 장이다. 고정된 하나의 의미와 그것에 따르는 고정된 대상이 있다는 비트겐슈타인 전기의 사유는 이처럼 자신의 후기 논리에 의해 반박된다. 철학사에 들이댄 비판의 칼날을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신의 사유를 깨는데 사용했다. 이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는 다양한 맥락에서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활동하고 움직임으로써 그것에 따르는 다양한 의미를 생산할 수 있다. 사물의 참된 의미를 밝히고 싶다면 그것이 쓰이는 용법의 장을 ‘있는 그대로 보라.’ 이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는 것이다.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트겐슈타인 선집
_ 비트겐슈타인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단 한권의 저작을 남겼을 뿐이다. 나머지는 그의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 발간되었다. 이 선집의 역자 이영철 교수는 말한다. 그가 태어난 19C 말은 언어와 실제 세계 사이에 커다란 틈이 벌어진 혼란기-말이 말이 되지 않는 시대였다고. 바로 그 점에서 그는 지금의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처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접했을 때 ‘나는 천재가 아니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황당한 선언이나 철학사를 한 마디로 ‘오류의 역사’로 규정해 버린 그의 지적 오만함에 무척 불편했고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사회나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침묵했던 그의 태도에 딴지를 걸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미워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철학적 고민을 그대로 투영시켜 살아간 비트겐슈타인의 삶 때문이었다. 세계 대전에 참전해 생사를 건 전쟁터에서 가슴 깊숙한 곳에 소중히 품고 한줄 한줄 써 내려간 「논고」의 진정성. 말하기와 글쓰기에서 보여준 신중한 사유 태도. 앎에 대한 열정과 생각의 자유를 사회적 지위나 명예, 삶의 안정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기. 그리고 자신의 오류를 옹호하고 합리화하기보다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박하면서 또 다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자유롭고 거침없는 지적 행보.  

비트겐슈타인이 다시 대학 강단에 섰을 때 그는 철학에 소질이 없는 학생들에게 정비사가 되든, 의사가 되든, 정원사가 되든 뭐든 간에 자신이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가라고 독려했다. 그 말에 따라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는 활동을 찾아 떠났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친구의 집에서 가진 것 없이 조용히 숨을 거둔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삶이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거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너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그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해서 일관되게 노력하며 평생을 보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러한 진정성 때문이다. 20대 후반을 지배했던 그의 영향력 때문에 지금도 난 발화에 대한 결벽증으로 말을 잘 못하고, 날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적 결벽으로 삶이 유연하지 못하다. 삶을 유연하게 흐르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내면적 아상을 넘어서는 것이 이제는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는 내가 넘어서야 할 한계가 되고 있다. 그러나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그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일상과 더불어 숨 쉬고 있다.
2009/03/25 11:07 2009/03/25 11:07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566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ego2sm 2009/03/25 15:35

    프린트해서 읽었어요^^
    그린비 글들은 웹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는^^
    전 언어학 배우면서 비트겐슈타인의 매력에 푹! 빠졌었는데 특히 언어를 고정된 것이 아니라(구조주의자들처럼) 흐르는 것으로 보는 유연성이 좋았어요^^
    그리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그 당당함!
    '누군가'는 반드시 읽어야 할 철학자같아요.

    • 그린비 2009/03/25 21:14

      ego2sm님, 안녕하세요.
      '누군가'는 반드시 읽어야 할 철학자라, 의미심장하군요.

      저도 포스팅하기 전에 프린트해서 읽어 보곤 한답니다. ^^;
      그래서! 마침!! 그린비 블로그 잡지!!가 오늘(?) 탄생했습니다. 이름하야 gBlog! 곧 gBlog의 정체에 대해 알려드릴게요. 손가락이 간질간질하네요.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