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참 흉악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깨끗한’ 옷과 먹을거리, ‘안락한’ 주거공간, ‘안정적’인 직장. 이 모든 것들이 전부인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죠. 생채기 하나 없이 말끔한 농약 과일, 깔끔하게 도배된 채 아토피 피부염을 일으키는 벽, 사회적으로 인정받지만 언제 잘릴지 모르는 직장, 어느 것 하나 멀쩡한 게 없습니다. 거대한 풍요 위에 세워진 우리의 생활은 사실 아주 끔찍한 속을 감춘 당의정에 불과했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 자리에서 주변을 둘러보면서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 생각해 보면, 우리 문명이 가진 추악함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했을 향기로운 아프리카산 커피, 파키스탄 어린이들은 단 한 번도 차보지 못했을 매끈한 축구공, 지구의 몸에 상처를 내고 얻어낸 무수한 상품들이 그것이겠죠. 그래서 이 세계에 대한 현대인들의 감정을 하나로 압축하자면 의식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인 ‘죄책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_ 하얗게 칠해진 깨끗한 세상,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흉악한 세상과 죄책감.
며칠 전에 박찬욱 감독이 만든 「박쥐」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천주교 신부인 상현(송강호)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뭔가 도움이 되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며 바이러스 연구의 실험대상으로 자원합니다. 그는 실험을 당하고, 죽었다가 살아납니다. 단, 인간으로 살아나는 게 아니라, 뱀파이어로 살아나죠. 그런데, 귀환한 사제는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눌러온 욕망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그는 예전과 같으면서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옵니다. 뱀파이어가 아닌 사람들처럼 뭔가(피)를 먹어야 살 수 있고, 좀 다른 시간에 자지만 어쨌거나 자긴 자야 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상현과 생활양식만 달라졌을 뿐 같은 사람입니다. 더불어 ‘기억의 지속’이라는 측면에서 자아의 동일성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섹스를 하고 싶다는 감정을 드러내거나, 도박을 하고 싶어 한다거나, 피를 먹고 싶어 하는 ‘식욕’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현대인에게 성욕, 물욕, 식욕을 빼고 남는 욕망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상현의 욕망은 딱 우리 자신의 욕망과 같습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도 ‘사회’가 사라지는 시점에서 간헐적으로 드러내죠.

죄책감이란 결국 욕망의 존재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욕망이 있고, 그것에 대한 위장이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불러오죠. 그런데, 욕망이 죄책감으로 전환되는 프로세스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도덕’이 그것입니다. 근거는 잘 모르겠지만, 지켜야 한다고 생각되는 믿음이나 신념이 도덕의 본 모습이죠. 이를테면 영화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피를 마시는 태주를 제지하는 상현에게 태주가 하는 말이 도덕의 본질을 적절하게 드러내 줍니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납니다만, “여우가 짐승 잡아먹는 게 죄냐?”라는 요지의 말이었죠. 피를 먹어야만 사는 뱀파이어가 사람 피를 먹고 사는 것이 인간에게 안 좋은 일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도덕적인 ‘죄’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문제는 그 욕망이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파괴하는 욕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자기 존재를 파괴는 하는 데까지 나아가죠.
예전에 스피노자의 생애에 관해 쓴 글(바로가기)에서 어떤 사회(신체)의 능력은 이질적인 것들을 담아내는 그릇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맥락의 말을 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희망은 상현이 뱀파이어가 된 사실을 노신부(박인환)에게 알리는 장면, 노신부가 자신의 피를 상현에게 주는 장면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계도 결국 상현이 노신부를 살해하는 것으로 끝이 나긴 하지만, 자신의 피를 내어줌으로써 공존을 도모하는 관계는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적 희생이나, 대의적인 투신과는 다른 차원의 관계죠. 영화는 다른 결말로 향해 가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와 같은 관계의 확대가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질적인 욕망들이 공존할 수 있는 연대의 관계가 확대되는 그런 것 말입니다.

_ 낮과 밤, 선과 악, 배경과 사물이 함께 공존하는 이율배반적 공간. 이질적 존재들로 가득 채워진 이 공간처럼 다양한 욕망들이 공존할 수 있는 연대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봅니다.
영화 속의 상현과 태주는 말끔하게 정리된 문명세계의 심층에 자리한 욕망들,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기에는 추악하기 그지없는 욕망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도덕적 자기 판단의 작동과 함께 나타나는 죄책감의 작동방식까지 보여 줍니다. 좀더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자신의 욕망과 행동에 간격이 없는 태주와 어떻게든 공존의 길을 찾아보려는 상현의 노력 사이에 박찬욱이 끈질기게 묻고 있는 ‘구원’의 해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약하자면, ‘욕망을 거세하지 않는 연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의 유명한 명제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모든 행동은 ‘살기 위해’하는 행동이라는 점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각각의 실재는 자신의 존재 역량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스피노자, 『윤리학』3부 정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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