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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어디까지 알고 있니?


대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가장 많이 봤던 대자보는 미국과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90년대 끄트머리에 대학에 입학한 저는 아직 ‘반미구국’의 시대를 살고 있었죠. 미군기지 철수 집회가 아직 주되게 벌어지고 있었고, 반미자주를 내건 ‘한총련’이 마지막 힘을 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학생운동과 별 상관없이 지내던 제게도 반미라는 단어가 그다지 낯설지 않았고 나름 동의도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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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Korean Air)

올해 제가 TV를 보며 재미있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라고 묻는 대한항공 광고였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을 배경으로 한 광고가 뉴욕 등의 대도시에서 찍어 온 것이었다면 이 광고는 우리가 그동안 생각조차 못했던 미국의 구석구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죠.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 사람들이 이 광고 이전에는 와메고 대농장과 한니발과 같은 소도시를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요?

미국, ‘왠지 익숙한데 잘 모르는 나라’ 순위를 매기면 언제나 1위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미국에 대해 배운 적이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시간 때 배운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유럽의 역사에 비해 미국의 역사는 참 간단하게 다뤄져 있습니다. 근대 이전의 역사가 없어 더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미국이 세계 곳곳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걸 감안해 본다면, 별다른 정보가 없는 교과서의 구성은 참 이상합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은 ‘아메리칸 드림’, ‘자유와 이민의 나라’, ‘강대국’ 같은 애매모호한 단어들입니다. “누구누구가 이민 가서 성공했다더라.” “미국 민주주의는 이렇다 하더라” 등등. 사실 우리에게 미국은 하나의 이미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반미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미국의 최고다”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사람들도 모두 이미지가 아닌 미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제가 미국의 역사를 좀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은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읽고 난 후였습니다. 20세기 미국의 패권주의 정책은 건국 초기의 인디언 학살과 영토 확장의 야욕의 역사에서 기원합니다. 현대 미국 정치의 잘못 알고 있던 내용도, 미국 민중운동의 이야기도 그리고 미국을 떠올리면 왠지 기분이 나빠졌던 이유도 알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만들어 내는 많은 문화 상품들 속에 숨겨진 기호의 ‘정확한’ 의미와 기원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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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메고 평원
_ 캔자스의 한적한 농촌에 위치한 작은 도시, 와메고(Wamego)에는 캔자스를 배경으로 한 『오즈의 마법사』의 <오즈 박물관>이 있다. 지은이 프랭크 바움은 평생 캔자스에 온 적도 없지만, 오즈의 마법사는 캔자스를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다. 도로시를 허공으로 말아 올린 토네이도는 중서부 대평원을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어느 곳보다 대평원, 캔자스가 딱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달리는 미국』 캔자스 편 참고)

유재현 선생님의 『거꾸로 달리는 미국』은 미국의 역사와 제3세계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미국을 연결합니다. 미국을 일주하면서 유재현 선생님이 바라본 미국은 그래서 좀 특이합니다. 이 책을 편집할 때 대한항공의 광고가 한참 방송을 탔습니다. 그래서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교정지 속에서 수십 번째 여행하고 있는 미국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광고에서 예쁜 화면으로 나오는 와메고 평원과 한니발을 보면서 편집하면서 알게 된 사실과 어긋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재현 선생님의 책에는 광고에 나오지 않는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한니발은 광고에서처럼 마크 트웨인의 고향이고 트웨인의 박물관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 박물관의 연표에는 트웨인 인생 마지막 10년의 기록이 빠져 있습니다. 마지막 10년 동안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첨예하게 비판했던 트웨인을 미국은 아직 인정하지 못하는 걸 보여 줍니다. 와메고의 대평원에 우뚝 서 있는 다국적 곡물 유통 기업인 카길의 곡물창고를 보면서, 식량을 이윤의 도구로 삼는 자본의 횡포를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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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긴 연표
_ 한니발의 <마크 트웨인 박물관>의 연표는 19세기를 마지막으로 종점을 찍고 있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은 20세기의 첫 10년을 목격했으며 이 시기는 그가 어느 때보다도 왕성하게 활동한 때였다.(『거꾸로 달리는 미국』, 168쪽)

이처럼 광고에 나오는 예쁜 풍경들 속 미국은 구석구석 침략의 역사와 자본의 논리를 감추고 있습니다. 영화 「메멘토」에서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기는 가이 피어스처럼 미국은 제3세계에서 벌이는 학살과 만행을 자신의 몸 곳곳에 새겨 넣고 있습니다. 저는 편집자가 아닌 독자로서, 유재현 선생님의 『거꾸로 달리는 미국』이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유재현 선생님과 함께 미국을 일주하면서 미국의 역사와 오늘의 모습을 둘러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항공의 예쁜 광고를 향해 묻고 싶어집니다. “미국, 어디까지 알고 있니?”라고요.

- 편집부 진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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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6 16:22 2009/05/26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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