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간 게임, 그 법칙들
― 무기의 가치와 가치들의 비(非)경합


염창근 (평화바닥)

무기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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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출처 : IMCOM-K)
장군,
당신의 탱크는 강력한 철갑차요.
숲을 뭉개고, 수많은 사람들을 짓이기니 말이오.
그러나 한 가지 약점이 있소.
운전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오.
                               - 베르톨트 브레히트

많은 사람들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어도 어떤 게임 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행되었습니다(아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게임은 무슨 공학마냥 딱딱 맞아떨어지는 어떤 법칙성을 지녔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철저한 인과관계를 특징으로 삼습니다. 바로 무기와 관련된 국가 간 게임이 그것입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한국의 PSI 전면 참여, 한-미 군사안보 협의(‘핵우산 제공 명시’ 따위), 북-미 등 국가 간 밀고 당기기 등등. 마치 권력층의 놀이판 같기에 게임이라고 했지만, 하필 ‘권력층’들의 놀이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이 직결되어 있어 무시무시합니다. 이 엄청난 힘의 전시(展示) 앞에 시민이 할 수 있는 건 제발 진정해 주시길 기도하는 것밖에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북한의 핵 개발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미사일의 투발체 성능은 또 어떤지, 사정거리가 얼마이고 몇 개나 가졌고 그 영향은 어느 정도인지 …… 따위를 분석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런 게임의 틀에 있는 한 우리 모두가 더더욱 무기라는 가치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무기가 제공하는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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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연평도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 연평부대 (출처 : 조인스닷컴)
_ "강력한 철갑차"인 탱크와 그 탱크를 운전하는 군인. 북한의 미사일 발사 준비에 대비 중인 한국군의 모습은 한국전쟁 당시의 사진과 흡사해 보입니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북한의 이러한 힘의 노출에 대해서조차 시민들은 그다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주 예전부터 호들갑을 떨어 왔던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런 게임에 휘말리지 않을 정도로 성숙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북한의 행동에 너그러워진 것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나름의 분석틀에 따라 추측하고 있는 것인지 속뜻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무튼 사회적 차원에서나 개인적 차원에서나 전과 달라진 점은 느껴집니다.

그러나 북한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한층 너그러워진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기 자체에 대해서 양가적 감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파괴성을 본성으로 가지는 무기는 당연히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기는 무조건 좋은 걸로 최대한 많이 가져야 한다는 관념이 그것입니다. 무기와 관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점이 이를 반증합니다. 신경 쓰지 않음의 속뜻을 들여다보면 ‘마음대로 하시오’의 의미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의를 넘어 그 이상의 수준입니다.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력과 관련해서만큼은 권리를 완전히 양도해 탄생시킨 리바이어던과도 같습니다. 그것이 궁극의 물리력인 무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무기 문제에 대한 관심 없음은 무기에 대한 의존성을 심화시킬 게 뻔합니다. 일례로 지난 정권 때 세운, 신무기 개발-도입 사업을 핵심으로 한 621조 원짜리 ‘국방개혁2020’에 대한 현 정권의 조정안이 지난달 말에 발표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습니다. 발표는 했는지 미루었는지 내용은 무엇인지 도통 관심들이 없으십니다. 무기에 대해 문제를 삼는 거라곤 기껏해야 어떤 게 더 성능(?) 좋은 무기인가를 놓고 우열을 따지는 군사주의자들의 무한 반복 주장뿐입니다.

오늘날 무기는 실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물건이자 상품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현대의 북한이 (외교력 수준이 어떠하냐를 떠나) 핵과 미사일만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지표라고 인지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이란이 개혁 정권일 때나 보수 정권일 때나 미국이 그렇게 싫다는 핵 개발을 멈추지 않는 이유도, 핵이 없었던 이라크는 당했고 핵이 있는 북한은 당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기본적으로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쩌겠냐 하면 별로 할 말은 없습니다만,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기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법칙 같은 이 게임을 그만두게 할 수도 없으며 전쟁도 폐기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평화는 요원하기만 한 이상에 계속 머물러 있겠죠.

그렇지만, 난감하기만 한 이 문제에 대해 해답까지는 아니어도 그 실마리를 주는 책이 이미 12년 전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랍게 합니다. 무기 문제를 아주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서 당시의 국내에서는 너무나 선도적이었을 테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군수산업의 사회학』이란 책에서 저자 김형균은, “근대적 이성의 진보적 표현은 이성의 현상물인 생산적 과학의 발전으로 나타나며, 그 대립물은 파괴적 과학의 증대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적 생산성의 문제가 대중적으로 너무 많이 알려진 것에 비해, 그 대립적 모습인 파괴성의 문제는 은폐되거나 왜곡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흔히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전쟁은 감정이나 비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이성의 산물이다. 마찬가지로 근대적 군수산업은 인간의 호전성이나 침략적 야욕의 발로라기보다는 근대적 합리성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근대 이성의 ‘발전’과 또한 그 ‘위기’ 증대의 과정을, 이러한 전쟁구조를 항상화하는 군수산업의 발전 과정을 살펴봄으로서 그 일단(一端)을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군수산업의 사회학』, 17쪽)

전쟁은 “근대주의(modernism)”의 산물이고, 따라서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류가 만든 가장 비싼 생산물인 무기를 다루는 군수산업(혹은 군산복합체)을 파헤쳐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무기는 근대적 상품임을 새삼 공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억압성 증대에 상응하여 과학과 기술의 도구화ㆍ수단화의 증대가 산업적으로 정형화되는 메커니즘이 바로 군수산업”이며, “이러한 군수산업은 단순한 인간의 공격적 욕구의 발로나 부문 산업적 특징이 아니라, 근대주의(modernism)의 억압성을 근대국가 속에서 재생산하는 주요한 메커니즘이 된다”는 점을 성찰하게 합니다. 그리고 “단위 민족국가에서 발전된 군수산업은 필연적으로 국제적 팽창 구조를 유지하게 되며, 이를 위한 무기 이전의 증대는 ‘이념적(ideological)’ 갈등이라는 체제 대립의 문제를 자국의 군수산업 발전이라는 현실적 '이해관계(interest)'로 전환시키는 현실적 매개물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문제를 온갖 자료를 인용하며 역사적으로 자세하게 분석해 갑니다.

가치들의 비(非)경합

그럼에도 무기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여전히 난감한데,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전혀 가치들이 경합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김형균 역시 『군수산업의 사회학』의 첫 문장을 “사회학에서 이런 것도 다룹니까?”라는 외부의 시선에서 글을 시작하고 있듯, “참혹한 전쟁과 장기간의 군사 통치를 겪은 나라치고는 특이하게 군사적인 것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미미”하고 “단일산업 분야로는 …… 역사상 최대 규모를 나타내는 군수산업이라는 중요한 분야에 대한 학문적 축적이 얕은 이유 중의 하나가 어쩌면 사고의 금기영역에 대한 학문적 자기검열 때문은 아닐까?”라고 반문하는 건 자연스럽기까지 합니다.

무기의 가치는 너무나 중요하다거나 당연하다거나 시민(혹은 국민)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라며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보는 바로 그 점을 의심하며 정말 무기의 가치가 그러한가를 반문하자고 한다면, 핵무기를 가진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주변국들이 죄다 군사 강대국인 한국에서는 가당키나 하냐는 질타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해외에서는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평화운동이 무기 반대 운동이고, 유엔 차원에서도 군축국 회의가 활발한데 이 나라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봉쇄되어 있습니다. 내전의 참혹함을 겪은 후 온 국민이 장기간에 걸쳐 토론한 끝에 무기 비(非)보유 원칙을 정하고 이 원칙을 지금까지 60년 동안 유지하고 있는 나라도 있으며 세계에 군대가 없는 나라가 20여 개나 있다는 사실을 말해도 대번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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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최신무기들
_ (왼쪽부터) ATACMS 사정거리 140km급 지대지 미사일로 한 번 발사시 축구장 3~4개 크기 지역 초토화, GBU-28 '벙커버스터'라 불리는 레이저 유도 폭탄, 글로벌 호크 고고도 무인 정찰기로 약 40시간 비행하며 상대의 무기체계 및 병력이동 감시. 이처럼 성능 좋은 최신무기들을 자랑하며 북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을 과시하기에 급급합니다.

반대로 한국은 세계 11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이고, 세계 5위의 무기 수입 국가이고, 세계 17위의 무기 수출 국가라는 정보(SIPRI, "Transfers Database updated with 2007 figures 2008-03-31", SIPRI YEARBOOK 2007)를 제공하면,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강력한 군사 국가’라는 생각보다 아직 멀었다는 이야기부터 합니다(얼마 전 통계에서는 세계 3위의 무기 수입국에 랭킹되었습니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수출국 순위를 더 높여 2010년까지 10위권에 이르는 것이 목표라고 말합니다. 한국의 군수업체가 생산하고 한국 정부가 판매하는 무기가 다른 나라의 분쟁에 사용되고 있는데도 무감하기 그지없습니다.

세계 순위에서도 바로 확인할 수 있듯,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이미 너무 많은 무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시 작전권(전작권) 반환 문제에서도 희극적으로 폭로된 바 있습니다. 미국, 그것도 부시 행정부에서조차 ‘한국은 너희가 알아서 방어할 수 있을 만큼 군사력이 막강하니 그만 전작권도 가져가라’고 인정(?)했습니다(안 된다며 제발 전작권을 반환하지 말아 달라고 시위까지 하는 한국에 역으로 미국이 설득하는 꼴이었습니다). 군사력 증강이라는 획일적 가치만 드높은 군사주의 국가에서 다른 가치들은 싹조차 돋아나게 하기도 어렵기만 합니다.

가치들과 담론들이 경합되지 않는 사회에서의 가치들과 담론들은 의미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가치와 담론이 기존의 것과 다르다 해도 현재의 빡빡한 시스템 속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윤활제 역할밖에 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비경합의 견고한 구조를 깰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 알 수 없지만, 어디선가 분명 금이 가고 결국 깨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마나한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활동과 결합하는 담론이 필요합니다.

이미 반핵 운동, 대인지뢰 금지운동, F-15K 도입 사업 반대운동 등 다양한 대중운동이 일어난 바 있습니다. 또한 이 작은 나라에 적정 군사력이란 무엇인지를 제기하는 군내 소장파와 군사전문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젊은 평화활동가들이 모여 무기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국민이 권력의 움직임을 들여다볼 수 있는 권리 자체가 없는 나라이긴 합니다만, 활동이 일어난다면 가치들이 경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군사력 혹은 무기라는 무력은 현대 사회에서는 최정점 권력층만이 다룰 수 있는 권한이고 게다가 전쟁을 통한 무기 발전사가 편리한 현대 문명을 이룬 토대가 되었다는 주장이 일반론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이런 역사 결정론이 비경합의 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현대 무기라는 최악ㆍ최고의 물리력을 인정하는 틀 안에서는 오늘날 사회 변화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무기는 입찰 경쟁하는 상품이 되었고 따라서 돈만 있으면 사는 것이며, 무기를 팔려는 국가와 기업들은 넘쳐납니다. 그 무기의 질 역시 아주 뛰어나 지구 생명들을 완전 멸절시킬 수 있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둘 사이의 개념이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이른바 국가나 가족) 보호 논리로 무기 증강의 이유를 포장하는 군사주의 담론은 가장 먼저 깨 가야 할 대상이 됩니다. 그렇기에 이를 문제 삼는 새로운 탈-국가주의, 탈-군사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공동체주의 등은 경합하는 가치가 되기 위한 실천적 담론으로 더 확산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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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대신 평화를! (출처 : 전쟁없는 세상)

브레히트가 시에서 하나의 통찰을 전하고 있듯, 시작의 가능성은 우리 자신에게 이미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열린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 행사에 참석한 이스라엘 여성운동가이자 병역거부자인 알렉스 파루신이 ‘안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고방식과 싸우는 일은 사회적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내용이 조금 투박하긴 하지만 병역거부자들의 에세이에 한홍구ㆍ박노자 교수가 글을 보탠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은 한국식 버전으로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 저에게는 진정 꿈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꿈을 향해 걸어갈 것입니다.
지구 상에 전쟁과 가난의 고통이 사라지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총 든 군인이 아닌 자원봉사자로 만나
인류의 꿈과 희망에 대해 / 지구의 생명과 평화에 대해
웃으며 어깨동무할 수 있는 그날까지 말입니다.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39~40쪽)
알라딘 링크
2009/06/03 10:10 2009/06/0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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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공포로 만들어진 평화 :「NARUTO - 나루토」 47권을 중심으로

    Tracked from 세상을 보는 검은 눈, Skyjet 2009/10/12 02:28  삭제

    PROJECT 나루토 ~ 말은 프로젝트인데 실상은, 「나루토」 기사를 썼다가 언럭키즈 님의 지적으로 상당히 다뤄야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나서 리뷰/평론/소품 등의 형식으로 작품 전체를 분석하는, 그냥 글 모음집입니다 ~ ▶ 편견을 떨치고 제 모습을 보라 - 2009년 10월 7일 (기사는 10월 5일 발행) ▶ 전쟁 비즈니스 : 「NARUTO - 나루토 -」- 2009년 10월 8일 각종 매체에서 평화란 인류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상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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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길리안 2009/06/04 01:20

    "안보"라는 개념(고정관념)이 핵심 중에 하나인 듯 한데, 저자는 안보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에 내재된 "폭력성"? 과 개체(등)가 아닌 집단(들)이 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속성은 어떤 영향을? 무기가 그런 다양한 원인들에 대한 최종 상징이라고 보면 될까요?

    • 그린비 2009/06/04 09:54

      길리안님, 안녕하세요.
      이 글의 필자인 염창근님은 평화바닥(http://www.withoutwar.org)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으로 저희가 원고를 청탁해서 올린 것이랍니다. 바로 답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만, 질문 잘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염창근 2009/06/04 14:22

      간단하게 답하기는 어려운 물음이네요. 두서없이 답변드릴게요.
      안보는 ‘안전 보장’의 줄임말인데, 저는 이 개념은 근대(국가)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사회 지배층이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전쟁은 일어났지만 오늘날 쓰는 개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오늘날 쓰는 안보 개념은 ‘국가나 가족을 지킨다’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근대 이전에는 그런 뜻이 없었거든요. 아무튼 저는 근대적 개념인 ‘안보’ 개념은, ‘국가(공동체)가 먼저 있으니 이를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저는, 국가(공동체)의 지배층이 먼저 있었고 자기들이 사회를 지배-통치해야 하기 때문에 국가(공동체) 혹은 ‘우리’라는 개념과 함께 ‘적’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애매모호하고 제멋대로의 개념인 ‘적’이라는 언어는 과도한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데, 이를 통해 지배층은 ‘나라와 가족과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획득하며 계속 사회를 지배-통치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적’이 진짜 있든 없든 상관없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어야만 하는 존재이죠.
      요즘은 ‘인간 안보’라는 개념이 한국에서도 많이 사용됩니다. 안보가 ‘군사 안보’만을 의미할 수 없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된 안보 개념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생활하면서 마주하는 건 해외에 있는 ‘적’보다 주변에서의 위협입니다. 예를 들어 ‘의료’ 문제 따위를 말합니다. 작년에 광우병 관련 이슈도 ‘먹거리 안전’에서 연유했습니다. ‘인간 안보’ 개념이 문제가 없는 건 아니나 그래도 ‘군사 안보’보다는 진일보한 개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무기 같은 군사력 보위로는 저들이 말하는 ‘안보’조차 결코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갈등과 충돌만 키우는 원인이 되고, 더군다나 그 정도도 심대합니다. 집에 총을 구비해 놓는 일이 주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반대가 성립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사물을 다 조정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사물에 종속되고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게다가 무기는 엄청난 물신성을 보유한 사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안보’의 개념은 ‘이데올로기’라고 봅니다(다른 언어를 대신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시민 안보’나 ‘사회 안보’나 ‘평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이도 어차피 견강부회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돌봄 같은 말은 어떨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쓰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지네요. 인간의 폭력성과의 연관, 집단화되었을 때와의 연관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든 무엇이든 모든 생명들은 보통 폭력과 비폭력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는데, 상황이나 관계나 심리 상태나 등등 이런 것들에 따라 폭력과 비폭력의 발현 정도가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집단화되었을 때도 그렇다고 봅니다. 문제는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그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자동으로 생겨난다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무카이 코오의 《폭력론 노트》나 《폭력의 철학》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기를 상징이면서도 현실입니다.

  2. 어리석은 자여 2009/06/10 22:39

    힘이 없는 평화는 불가능 하다는 것을 모르시는가 보군요.
    만약 아무 군사력없이 다른 나라에게 평화를 원하니 그대들도 우리와 같이 평화롭게 지냅시다 하면 얼씨구나 하고 당장 우리 조국을 잡아먹을텐데... 당신같은 몽환가때문에 우리 조국이 위태로워지는 않을런지...뭐 당신같은 한 개인이 목소리를 내보았자 별로 신경쓸게 아니지만요

    • 피쓰 2009/06/10 23:56

      뭐 당신같은 사람이 댓글을 달아봤자 별로 신경쓸게 아니지만요, 가서 총싸움이나 하세요.

    • 그린비 2009/06/11 09:35

      안타깝네요.

    • 염창근 2009/06/13 21:09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힘 없는 평화가 당연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곳이 있기도 하고요. 님의 말씀에 따른다면, 오늘날 200여 개 나라 중 3/4, 즉 150개 나라는 이미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지요.
      또한, 완전히 전쟁의 관점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현대전이라는 게 지난 세기와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공멸이거나, 아니면 오늘날 분쟁 지역의 모습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 절대적 힘의 우위 속에서도 완전 승리라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초강대국 미국조차 완전 승리를 하지 못하고 있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안쓰럽기까지할 정도로 전전긍긍합니다. 무수히 죽어가면서요. 왜 그런 것일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니, 제 생각엔 아예 접근을 완전히 달리해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다른 가능성은 분명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