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하나

대학을 다니던 시절 책읽기를 참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대부분을 컴퓨터 게임에 빠져 지낸 탓도 있고 어릴 적부터 워낙 사람 만나고 술 먹고 노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시대상황 탓에, 비록 무언가(?)의 끝물이긴 했지만 이런저런 세미나가 자주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미나가 될려면 우선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주제가 되는 책을 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서로 토론도 하고 주장도 하면서 배우게 되는거지요. 하지만 저는 세미나를 배움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숙제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말이죠! 그래서 반칙도 많이 했습니다. 제목만 읽고 세미나에 참석하기, 책 안 읽은 날은 당구장으로 도망가기, 분위기 흐려서 세미나를 아예 막장으로 치닫게 하기. (참고로 전 공대생이었습니다 ;;;)

당시에 포스트 모더니즘이 한창 유행이었습니다. 물론 저한테는 먼나라 이야기였습니다. 모더니즘도 뭔지 모르는데 포스트 모더니즘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 그렇게 잘 지내다가 갑자기 포스트 모더니즘이 저에게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온 일이 생겼습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 녀석이 『광기의 역사』라는 책을 들고 나타난 것입니다. 아, 놀라운 일이었죠. 그런데 그 녀석이 책을 들고 나타난 이유가 참 가관이었습니다. 어디선가 '푸코'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봤는데 때마침 자기 이름에 들어있는 글자인 '광'자가 들어가 있는 책이 있어서 집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웃긴 일이죠. 하지만 당시에는 이 사건이 전혀 웃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저에겐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저 놈이 저런 책을 본단 말인가? 어려워 보이는데?"

당장 따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급하게 실행에 옮겼습니다. 제가 고른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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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인가 봅니다. 표지가 바뀌었네요. ^^;

『포스트 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제목만 들어도 왠지 멋져 보이지 않나요? 저도 그냥 제목 보고 골랐습니다. 그리고 읽었습니다. 당연히,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른 채로 살고 있습니다.


# 이야기 둘

역시 그 시절, 학교에 있던 영화동아리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덕분에 '감각의 제국'이라는 명작을 비디오 불법복제판으로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죠. 작품에 담긴 감독의 의도나 사회문화적 의미를 이해하면서 그 영화를 본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소문으로만 들리던 "실제 정사 장면"과 일본에서도 "외설물 배포 혐의로 감독이 고발당한 영화"라는 것에 끌려서 본 것이니까요. 그냥 '야하다'고 하니까 본 거였습니다. 실제로 영화는 화질도 엉망이었고 '영어자막'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귀한(?) 작품을 보고 나니까 또 그런 게 없나 찾게 되더군요. 그래서 보게 된 작품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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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남(鐵男)

츠카모토 감독의 '철남', 완전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였죠. 진짜 '아스트랄'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 담긴 수많은 메시지를 읽어내기에는 제가 많이 부족했었던 것 같습니다. 감독의 의도도 이해하지 못하고, 영화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내지도 못 했지만, 이 영화들을 보고 나서 저에게 크게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친구들에게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거죠.

"야, 너 그 영화 봤어? 그 영화가 말이야...."


# 이야기 셋

역시나 그 때, 어디선가 줏어들은 이름이 있었습니다. 핑크 플로이드, 'The wall'이라는 앨범이 엄청난 수작이다. 왠지 놓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살 수 있던 핑크 플로이드 앨범(카세트 테이프!)을 모두 사서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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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에 빠져들지는 못 했습니다. 일단 가사가 영어라서.... ;;;
'노래는 가사가 70%야!'라고 믿고 있던 때라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세계보다 당시의 조잡했던 민중가요가 훨씬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 때 핑크 플로이드를 들었던 경험을 나중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 핑크 플로이드 말이지? 그거 나도 예전에 들어봤는데...."


*         *          *

사람은 누구나 남들과 구별되고 싶어 합니다. 이 구별짓기의 욕망은 여러가지 방식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옷 입는 방식, 머리 모양, 말투, 습관, 문화 취향. 그리고 이 구별짓기의 욕망은 자주 우월감의 표현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앞에 제가 말씀드렸던 것은 문화적 우월감을 통해서 남들과 구별짓기를 하려는 모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지나간 이야기라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여전히 부끄러운 기억들입니다.

하지만 그 시절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지금, 저도 변했고 사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특히 90년대 후반을 통과하면서 사회의 구조적인 부분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제 남들이 안 읽은 책을 많이 읽었다고 잘난 체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인정을 안 해주거든요. 요즘에 잘난 체 좀 하려면 바로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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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문화'라는 포장을 씌우지 않고, 직접 물건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명품'이라는 보통명사가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명품'의 시대는 예전에 비해 훨씬 직설적입니다. 상품의 가격이 얼마인지가 아주 중요한 항목이자 덕목인 것이죠.

'명품'의 시대에 사라진 것은 개인의 '경험'에 대한 존중입니다. 문화 상품으로 잘난 체를 하기 위해선 그것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책을 읽어야 하고 영화를 봐야 하고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 제 경험으로 겪기 전에는 아무리 잘난 체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문화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잘난 체가 통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 경험에 대한 존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물건을 통해서 잘난 체 하는 세상에 개인의 경험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경험에 대한 존중이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명품'을 통해서 제 우월함을 드러내는 풍토가 가지는 가장 큰 위험요소는 '따라하기'를 할 수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문화적 경험이야 나도 그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서 상대방의 잘난 체를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이해의 수준에서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비교적 쉽게 그 경험을 따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열려있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지가 아무리 잘난 척 해봤자 거기서 거기란 얘기지요. 그러나 '명품'을 통해서 잘난 체 하는 것을 따라하기는 힘듭니다. 어떤 때는 내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있냐 없냐에 따라서 애초에 결정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돈'의 크기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결국에는 사람을 따질 때도 '명품'인가 아닌가를 먼저 보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 '명품' 가졌나 안 가졌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자체를 '명품'이냐 아니냐의 기준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명품 인간'의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들은 당연히 '돈'의 크기에 관계된 것들이 될 것입니다. 어디에 사는가? 어떤 학교를 다니는가?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는가?

내 경험의 고유함이나 사람의 됨됨이와 상관없이 내 가치가 결정되는 사회, 게다가 그 기준이 '돈'인 사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희망적인 얘기로 마무리할 자신이 없습니다. 왜냐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미 그렇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미래에는 이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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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기획팀
이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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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4 15:12 2007/10/0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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