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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용산 참사를 전후한 제 이야기를 편집후기 대신 적어 볼까 합니다.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와 유럽의 현실 정치에 관한 블랑쇼의 발언을 모은 『정치평론 1953~1993』(이하 『정치평론』)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애초 의도보다 편집 기간이 길어졌는데요. 이 책은 나치를 물리쳤다는 승리감과 경제 재건이라는 슬로건 아래 유럽 사회에 부흥한 또 다른 전체주의 앞에서 정치의 본질을 되묻고 있습니다. 경제성과 효용성에 환원되지 않고 개개의 욕망과 가치에 대한 존중과 공동성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급진적인 문제제기들이 담긴 책을 편집하다 보니, 우리의 정치 현실과 겹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용산이라는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 앞에서 입장들이란 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편집후기라 하기엔 지나치게 사적인 독후감이란 생각이 들지만, 이 책의 편집자인 저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제가 분리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번엔 이렇게 여러분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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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선언의 촛불

사그라지던 촛불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눈치나 보던 지식인들은 시국선언의 들불을 놓고 있습니다. 그래 봐야 말뿐입니까? 말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비웃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세상의 이치는 그렇지 않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돈과 법과 권력과 시간과 생각과 심지어 신체와 생명까지도…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에도 빼앗을 수 없는 것, 최후에 남는 것 가운데 말이 있다는 것을 블랑쇼는 선언합니다. 그 말은 모든 효율성(형식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데서 최고의 효율성(실질 합리성)을 거부하는 말입니다.
 
단순한 말과 말 고유의 권위를 가지고, 그 말이 꼭 필요했던 순간에 예술인과 지식인들(그들 중 대다수는 정치 활동과 무관한 사람들)이 국가가 그 내부 혹은 주변에 근본적 자유를 위협하는 억압적 권력을 생성하거나 생성을 방임할 때는, 거부하고 규탄하는 것이 시민 각자의 권리임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단지 그뿐이다. 그것이 비효율적인가? 그럴 수도 있다. 이 단순한 발언에 따른 각종 정치적 후속 결과들이 이미 그렇지 않음을 웅변해 주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런 종류의 말, 즉 판단의 발언은 실질적이고 정치적인 효율성 계산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데서 그 모든 효율성을 얻는다는 한 가지 사실만은 지적하기로 하자. 어느 순간 어떤 결과가 따르든,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든 발언해야만 한다. 거기에 그 말의 진실이 있고, 거기에 그 말의 힘이 있다. 그것은 정의의 말이다.
(본문 47~48쪽)

솔직히 말하자면, 용산참사가 처음 일어난 날 저는 대단히 두려웠습니다. 어떠한 감정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출근하자마자 참사 소식을 접했고, 순간적으로 매우 화를 냈지만, 또한 돌아선 순간 잊어버렸습니다. 연말연초를 숨 가쁘게 하던 연이은 마감은 끝났지만 그날도 꽤 바빴던 것입니다. 퇴근 무렵이 되어 편집부의 누군가가 다시 말을 꺼냈을 때에야 기억해 냈습니다. ‘맞다. 오늘 우리에겐 그런 일이 있었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꿈이라도 꾸듯이. 악몽 속에서 “이건 꿈이야” 하고 되뇌면서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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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
_ "거리에서건, 공공건물(대학, 의회)에서건 그 어디에서도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공화국의 대통령이 선언한 바인데 이 문구야말로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어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적 죽음을 선포한 셈이다.(본문 148쪽)

저녁에 되어서야 홀연 꿈에서 깬 듯이, 심지어 명복을 빌 생각조차 들지 못할 만큼 화만 앞선 제 마음을 봤습니다. 그러고 나서 처음 드는 생각은 "대통령 하나 잘못 뽑은 게 이렇게까지 되는구나" 하는 책임회피. 조금 더 지나서는 그 대통령 자리 우습게 여기고, 몇 년 대통령 없는 나라에 사는 셈 치자 하면서 대선에 냉소적이었던 것에 대한 후회, 좀더 지나서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희망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차마 입에 옮기고 싶지 않은) 더 나쁜 일이 일어나야지만 반전의 계기가 생길 거라는 두려움(그 두려움은 결국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아직 냉동상태인 용산과 연이은 죽음들). 그러나 더 큰 두려움은 더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나만은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 ‘내 것만은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또 다들 모르는 척하는 상황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이 저를 또다시 주저앉히는 제 자신의 비겁함으로 나타나게 될까 더욱 두려웠습니다. 저 역시 아직 잃을(가진) 게 있는 사람이고, 상승 지향의 욕망을 가진 사회에서 형성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어쩌면 저 자신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회에 대한 두려움, 정치에 대한 두려움, 제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려 할수록 두려움에 찬 눈은 감기고, 입은 닫히며, 겨우 벌린 입에선 바람 소리만 납니다. 그 침묵 아닌 침묵 속에서 말만은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두려움에 찬 신체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몸짓이자 절규, 언어 이전의 언어를 되찾아야 했습니다. 블랑쇼의 『정치평론』은 그것이 정의의 말이 아니라 부정의 말―즉 “세상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의 말이 아니라 “이러이러할 수는 없다”―이자 거부의 말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물론 권력은 말하는 이들을 언제든 체포하고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말 그 자체는 불가침이다. 그것은 선언되었고, 그 말한 바는 변함없이 남을 것이다. 여기 「선언」이 말하고 있는 것, 그것은 단 하나의 단어, 바로 극단의 거부라는 중대한 단어이다. 인류 역사의 모든 결정적인 순간에 몇몇 이들, 간혹 많은 이들이 언제나 거부할 권리를 수호해 왔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것은 근본적인 대책이다. 그런 권리를 우리는 모두 주시해야 한다. 그것이 허투루 사용되지 않도록 재확인하고 유지하면서 ‘아니오(non)라고 말할 수 있는 최후의 대책’이라는 본래 모습을 간직하도록 지켜야 한다.
(본문 48쪽)

용산이라는 사건 앞에서 제가 느낀 분노는,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가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매일 성실히 일하고,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살림을 꾸리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자기가 좋다 생각하는 일을 힘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에 서로 감동하고 칭찬하면서... 그렇게 자기 삶을 충실히 꾸리는 것에 주로 관심을 가지려 할 때 적어도 이런 꼴을 보지 않고 살 권리 정도는 갖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관계들을 유용성의 잣대로 재지 않고, 각자의 욕망과 가치가 다 인정받는 사회를 꿈꿀 권리 말입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잘못한 건 그쪽이라는 소리나 들으려고, 정부가 지배하는 대로만 하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약속만 믿고 우리가 열심히 사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두려움에 움츠러든 사람이 열심히 살 수나 있겠습니까?
 
권위 없는 권위주의 정권, 단일성의 허울을 쓰고 극심하게 분열된 정권, 행동하는 힘이라는 외양 아래서 결단불능·선택불능인 정권, 개인적 책임과 소명을 앞세우지만 한 사람의 이름을 방패로 무책임한 행동들을 수없이 은폐하고, 비인칭적 경제 권력의 패권을 비호하는 정권. 이상한 정권에 심각한 역사, 단지 심각할 뿐 아니라 곤혹스러운 역사, (…) 가끔은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일 만큼 기이하다고 결론 내리고 싶을 정도이다. 비현실성은 불행하게도 흔히 역사 종말의 조짐이다.
(본문 34쪽)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지금-여기의 삶이 아니라 앞날의 부로 지금의 힘겨움을 보상받으려 합니다. 어쨌든 나중엔 더 나아질 거니까, 지금보다 부자가 될 테니까 지금 좀 힘들어도 가진 걸 유지하려고 합니다. 더 값이 올라갈 테니까. 더 큰 부자가 될 테니까.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그런 비현실적인 판타지 속에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고, 남의 것을 탐내고, 빼앗고, 내 것을 지키고 하는 사이…… 우리는 늙어 갑니다. 아니 지금 이미 늙은 채입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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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_ 도리언 그레이는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혼과 맞바꿔, 늙고 타락한 영혼의 흔적은 오직 초상화에만 그려집니다.

우리는 탈이념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에겐 이념(理念)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에게 바로 ‘이념’(利念, 이익에 관한 생각)이, 즉 가장 큰 이해관계가 존재합니다. 그 이해관계는 오직 경제 문제 하나만을 확실하게 해결하겠다는 이유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저는 더 잘 먹고 잘살려고 촛불을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직 잘 먹고 잘살기만 하면 되는 동물적인 삶을 거부하기 위해서, 남들 사는 만큼은 나도 살아봐야겠다(남들보다 잘살면 더 좋고)는, 제 것이 아닌 욕망을 거부하기 위해 촛불을 살라 왔습니다. 제 모든 일상이 그렇지는 못하다 해도, 적어도 촛불을 드는 그 순간만큼은 그랬습니다. 유월입니다. 다시 거부의 말을 되찾을 때입니다.
 
우리가 거부하는 대상은 가치가 없는 것도 중요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거부가 필수적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여기, 나름의 논거가 있지만 우리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허울 좋은 지혜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혐오감을 줄 뿐이고, 합의와 타협의 제안이 있지만 그것을 우리는 더 이상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단절이 발생하였다. 더 이상의 묵인이 불가능한 지점까지 우리는 밀려 왔다.
우리가 거부할 때 우리는 오만함이나 도취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대한 익명의 움직임에 의해서 거부한다. 왜냐하면 거부의 참된 힘은 우리들에 의해, 우리들만의 이름으로 완수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에게 속한 매우 빈약한 시작에서 출발하여 완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거부하기란 쉬운 일이며 그 힘의 행사에 따르는 위험부담도 거의 없다고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거부하기란 결코 쉽지 않으며, 우리는 거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이제 우리들의 주장 하나하나가 엄정한 사유와 겸허한 표현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이 거부의 힘을 온전히 지켜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 20~21쪽)

- 편집부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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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10:48 2009/06/1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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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다림 2009/06/18 13:21

    드디어 하나씩 나오는군요. 좋은 책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 그린비 2009/06/18 14:21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