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 잡지 『진달래의 진달래는 붉다
— 일본에서 마을 만들기1
 신지영 (연구공간 수유+너머)

무장, 혹은 활기를 위한 마스크

일본 간사이 지역에 일주일 간 휴교령이 내렸고 마스크가 동이 났다는 기사가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돼지 인플루엔자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바로 그때 오사카에 가야했다. 심포지엄 「지금 진달래, 카리옹을 어떻게 읽을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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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잡지 『진달래』
최근 일본에서는 전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1950년대에 걸쳐 진행되었던 서클 운동을 조망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정치와 문화, 도시와 지방을 연결시키며 활동했던 이름 없는 자들의 서클 운동을 통해 전후를 다시 읽으려는 시도이다. 후지(不二)출판은 이에 발 맞춰 1950년대 서클 잡지 복간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엔 1950년대 오사카를 중심으로 했던 재일조선인 문화활동잡지『진달래』(ヂンダレ, 1953~1958),『카리옹』(カリオン, 몸이 희고 갈기가 검은 제주도말, 1959~1963)이 복간되었다. 1~2년 전부터 도쿄와 간사이 양쪽에서 『진달래』를 읽는 연구모임이 만들어져 교류해 오고 있다. 나는 도쿄에서『진달래』연구회에 참여하고 있었고 이번 심포지엄은 그 「진달래 연구회」가 주축이 되어 그간의 공부성과를 나누고 교류하는 장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돼지 인플루엔자도 심하다는데 갈까 말까? 마스크를 사가야 하나? 너무 요란떠는 게 아닐까? 동경에서 작은 도시로 갈 때의 묘한 우월의식 아닐까?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은 일주일 전 한국에 갔을 때, 한국공항에서 본 일본인 아줌마들이었다. 일본 아줌마들은 한국에 내리자마자 요란을 떨며 마스크를 썼다. 나는 '너무 오바하는 거 아냐? 미개국가에라도 왔나? 저 극성에 인플루엔자는 벌써 도망갔겠다'고 생각했다. 민족주의와 진보주의를 비판하고 싶었던 나 역시, 그런 순간엔 민족적인 저항감에 휩싸이고 마는 것이다. 내가 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마스크를 쓴다면 그 아줌마들처럼 보이지 않을까? 병에 걸리기 싫다는 단순한 생각이 마스크를 한 구체적인 내 모습과 만났을 때, 내 눈앞에는 다양한 종류의 지역적 민족적 위계들이 펼쳐졌고, 우월감과 열등감을 갈팡질팡하면서 그 위계적 회로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솔직히 마스크를 한 일본인 아줌마들의 수다를 보면서, 어떤 활기를 느꼈음을 고백해야만 한다. 살기 위해 자신을 무장한 마스크의 활기는 괜한 민족주의적 반성에 비해 얼마나 경쾌한가? 마스크를 둘러싼 복잡한 망설임이야말로 늘 옳은 자리에 있고 싶은 지식인의 비겁한 무장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돼지 인플루엔자 마스크를 둘러싼 망설임이『진달래』연구회에 참여할 때 느끼는 묘한 망설임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일조선인이란 정체성과 만났을 때면, 내가 어떤 마스크(얼굴 표정)를 써야 할지, 아니 마스크를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달래』, 재일조선인의 원점, 혹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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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문인 김시종(좌), 양석일(우)

『진달래』는 1952년 2월 16일부터 1958년 10월 20일까지 오사카에서 활동했던 조선 시인 집단에 의해 발간된 잡지다. 특히 김시종, 양석일, 정인과 같은 대표적인 재일조선인 문인, 문화인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재일조선인 사상과 문학의 원점으로 평가된다. 따라서『진달래』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저력을 품고 있다. 내 느낌이지만 일본에서 재일조선인 활동, 위치, 문학을 둘러싼 해석은 꽤 단단한 몇 개의 이미지, 즉 마스크들로 존재하는 듯하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가해자 일본인과 피해자 재일조선인이라는 구도다. 이 구도로부터 피식민자에 대한 식민자의 사죄와 책임론이 성립한다. 그러나 나는 책임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책임지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당당한 주체의 자리는 가해자에게만 가능한가? 그 논리 속에서라면 피해자는 평생 고통스런 표정의 피해자로서만 살아가야 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느낀다. 주체의 입장에 서고 싶다는 게 아니다. 가해자가 책임을 논할 수 있도록 피해자의 슬픈 표정을 계속 지어야 하는 운명이 지닌 중력감, 그 중력에 빨려들어가 피해자 안의 차이와 가능성들을 드러낼 수 없는 숨막힘, 자신의 슬픔을 보느라 또 다른 타자와 연대할 수 없게 되는 시야의 축소. 그것이 문제다. 한국 유학생인 나는 이 구조 속에서 식민통치의 피해자로 분류되기 때문에 곤혹스럽기도 하지만, 반면 잘 모르는 재일조선인과 만나면 어떤 통과의례나 신앙고백을 거쳐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안절부절하기도 한다. 한편 남북의 분단은 재일조선인에게도 민단과 총련의 분열로 이어져 있고, 실상 민단보다는 북한과 연결된 총련이 재일조선인들의 삶에 훨씬 도움이 되었다는 데 대한 어떤 죄책감도 느낀다. 별로 한국인이란 정체성도 없는 내가 말이다. 재일조선인 안에서도 식민지 시기(특히 1939년 이후 도항저지제 폐지 후), 부산과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연결되던 배를 타고 반강제로 거주지를 옮겼던 사람, 제주도 4.3사건이 계기가 되어 온 사람, 뉴커머, 유학생 등 다양한 분열이 있다. 이 구분은 재일 1세, 2세, 3세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가족의 역사와 관련된다. 이러한 민족적, 국가적, 가족적 정체성의 물음 속에서 통과의례와 신앙고백은 끝없이 이어지고, 마스크의 제작 연도, 색깔, 크기와 기능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나는 이 마스크 변신술이 지닌 노하우는 오히려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잠재적 힘이지 않을까 멋대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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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문화학교의 김시종 시인

망설임 속에 도착한 곳은 오사카 문학학교였다. 이곳은 1954년 오사카 사회주의 청년동맹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는데 재일조선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현재 김시종 시인이 특별고문으로 있다.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심포지엄은 만원이었으나 교실은 낡고 좁았고 덥고, 그러나 정감 있었다! 더구나 그 누구도 마스크를 하고 있지 않았다. 대체 어찌된 일이었을까? 간사이에서는 우노다 쇼우야(宇野田尚哉)와 정장(丁章), 도쿄에서는 최진석(崔真碩)이 발표를 했다. 우노다는 『진달래』에 나타난 전후 일본에서 조선인 청년들의 경험을 일본인의 경험과 연관시킴으로써 동아시아 현대사를 새롭게 파악하자고 요청했다. 최진석은 도쿄의『진달래』연구회에 대해 보고했다. 도쿄연구회는 잡지 전체를 함께 낭독하면서 이뤄지는데 사가미코(相模湖)에서 열린다. 그곳은 1937~45년 사이 약 360만 명이 댐 건설에 참여하다 죽은 곳이다. 이때 조선인 사망자는 수에 포함되지 못했다. 도쿄 모임참여자 중 절반은 배우로『진달래』의 시들은 연극「아큐의 전생(阿Qの前生)」에 대사로 등장했다. 최진석은 낭독과 연극처럼 『진달래』의 활동을 현재화하고 침묵하는 하층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모색하자고 했다. 동아시아를 둘러싼 일본 전후, 그리고 침묵하는 하층. 이 두 방향은 현재적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동아시아라는 말도 침묵하는 하층이란 이미지도 벗어 버려야 할 또 하나의 마스크일지 모른다. 적어도 이번 심포지엄과 『진달래』의 풍부함은 재일조선인을 둘러싼 고정된 사고회로를 바꿀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게 했다.

마을과 만난, 혹은 마을을 만드는 이야기

연구회에 계속 참여한 이유도 『진달래』와 그것을 읽는 친구들이 지닌 이 풍부함에 있다. 『진달래』창간선언은 "시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 뒤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날것 그대로인 핏덩어리 같은 분노, 정말로 굶주린 <밥>이란 한마디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걸맞는 진정한 노래를 부르고 싶다."『진달래』는 나약하고 슬픈 피해자의 마스크를 하고 있지 않다. 창간 선언에서 보이듯, 전력을 다해 구체적이면서도 독특한 또 하나의 세계를 발명하기 위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진달래』는 김시종이라는 개인의 잡지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김시종도 개인이 아니다. 1950년대 오사카 서클 활동의 열기 속에 구성된 문화적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심포지엄의 발표 후 김시종씨와 정인씨가 들려주었던 『진달래』의 활동 분위기—정인씨 집에서 이뤄졌던 문학회, 연구회, 일상적인 모임—가 이를 입증한다. 잘 알려진 시인 외에도 권동택(권경택으로 이름 바뀜), 임일호 등 훌륭한 재일조선인 시인과 만날 수 있다. 특히『진달래』는 재일조선인의 문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 조선 전쟁에 대한 반대는 전체적으로 깔려 있는 정서이거니와, 4호에 실린 김시종의 시「마음속」(ふところ)에는 재일조선인의 슬픔과 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북한에서 이뤄진 임화, 이승엽의 숙청에 동조하는 등 섬세한 분석을 필요로 하는 부분도 있지만, 재일조선인 청년들이 조선학교를 만들면서 적극적으로 삶을 구성하고 정치활동을 벌이는 모습이 흥미롭다. 이후 토론에서는 1950년대 다른 지역의 서클 활동과 『진달래』의 활동을 연관 짓는 해석이 나왔다. 또한 "저는 김시종 선생님보다 함께 활동했던 여성들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어쩐지 묻는 게 무섭다"라는 발언도 나왔다. 이것들은『진달래』를 현재화하는 여러 개의 회로가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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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진달래

김시종 시인의 기억 속 진달래는 분홍이 아닌 붉은색이다. 실제로 제주도의 진달래에는 한국 남쪽 진달래보다 붉은 종류가 있다. 잡지『진달래』는 '한'의 정서로 점철된 김소월식 분홍 진달래에 붉은 진달래를 덧씌운다. 재일조선인의 진달래가 한국의 진달래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재일조선인의 진달래에 어떤 색을 칠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의 마스크를 벗기고 새로운 마스크를 만들면서 만날 수는 없을까? 마스크를 씀으로써 기존의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우리'가 되어 새로운 '역사'를 살았던 사파티스타들처럼. 어차피 돌아가야 할 얼굴이란 없으므로. 그리고 나는 신앙고백 없이 그 마을에 들어갈 수 있을까?

뒷풀이에서 만난 아줌마는 자신의 어머니가 오사카에 정착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곳에 정착한 이유는 먹을 것을 키울 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봐, 산이 있지? 여기라면 굶어죽지 않아". 심포지엄 장소에서 그닥 멀지 않은 곳에 가마가사키(釜ケ崎)라는 빈민부락이 있다. 그곳은 ‘요세바’(寄せ場:인력시장)와 ‘도야’(ドヤ:쪽방)가 모여 있는 곳이다. 나의 첫 오사카 경험은 가마가사키였다. 그곳에서 한국말을 하며 걷자니 지나가던 노숙인이 말을 붙였다. 자신은 한국인인데 7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하면서 그곳엔 가난한 타국인이 많이 있다고 했다. 나에게 재일조선인 잡지『진달래』는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잡지로 보인다. 한 50년쯤 뒤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와 나는, 아니 우리들은 어떤 마스크를 쓰고 있을까? 또 하나의 마을로 태어날 수 있을까? 앞으로 연재할 것은 이런 마을에 대한 것이다. 아직 이름 없는 마을과 만난 이야기이다. 그리고 마을을 만드는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2009/06/19 11:03 2009/06/1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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