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살아 있기를 선택하는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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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그것이 인간으로 사는 과정에서 겪는 당연한 감정 중의 하나라면 인생은 그런 대로 운치 있다. 묘한 선율의 글루미 선데이를 배경으로 우울한 일상을 관조하는 것은 나름 ‘멜랑꼬리’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울증은? 가만, 이것 역시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당연한 감정 중의 하나라고 하기에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만일 우울증이 가벼운 외상처럼 언제고 걸려들 수 있는 일상의 증세라면, 단언하건대 나는 두말 않고 ‘인생은 고苦’라는 ‘진리’에 한 표를 던질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이 내 삶에 쳐들어오는 것을 정중히 사양하리라. 내가 아는 우울증은 참혹한 고통이므로 우울증을 겪는다는 것은 삶이 어긋나도록 하는 함정 내지는 농간에 걸려 든 것이며 웰빙(!)의 최대 난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이 책, 『한낮의 우울』을 만나기 전까지는.

인생이 비로소 질서를 찾고 절망의 구실들이 모두 소진된 시점에서 우울증은 작은 고양이 발로 살금살금 다가와 모든 것을 망쳐 놓았고, 나는 그 상황에서 우울증의 이유를 찾을 수 없음을 통감했다.
(본문 60쪽)

내가 우울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막달레나의집에서 만나는 여러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낄낄거리며 유쾌한 공모를 주저하지 않던 내 가까운 몇몇 지인들의 마음앓이와 무엇보다도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수련의 세월을 겪는 동안 우울이라는 감정에 종종 휘말리던 나의 경험은(이 때의 우울은 가을이면 길가에 뒹구는 낙엽조차 불쌍해하며 가슴이 시려지는 증상과는 사뭇 대별됨) 어느덧 우울증을 나와 상당히 관련 있는 이슈로 연결해 주었다.

나는 한동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에는 그것을 잘 모른 체 지나쳐 왔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그러니까 성매매에서 피해를 경험한 여성들의 이른바 ‘자활’을 위한 의료비가 어느 정도 확대되면서 우리는 우후죽순처럼 여성들의 우울증 진단과 만나게 되었다. 의사들이 짜기라도 한 걸까? 왜 다 우울증이야. 하물며 어떤 여성은 다른 식구들(함께 막달레나의집에 사는)과 싸우기는 좀 해도 밥도 (과하게) 잘 먹고, 잠도 (심하게) 잘 자는데. 누군가는 우울증 소견을 듣고 와서는 거 보라고, 자기가 병 있는 거 맞지 않느냐 궁시렁궁시렁 거리며 처방받은 알약을 털어 놓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 우울증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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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리 끝에 서 있는 여인
우울증이란 것이 대개는 우리를 벼랑 끝 너머로 보내는 것이라기보다는(그러면 곧 죽게 될 것이다.) 벼랑 끝으로 바싹 끌어당겨서 너무 멀리 갔다는 생각에 공포에 젖어 현기증으로 균형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문 43쪽)

우울증, 혹은 우울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우울은 그야말로 슬프고 불행한 감정이다. 우울증은 그러한 감정이 지속되며 일상생활을 잘 이어나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한데 여기 이 정의를 뛰어 넘는 ‘혹’하는 문장 하나가 있으니,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갑자기 간담이 서늘해진다. 뭔가를 훔쳐본 듯싶고, 뭔가 들킨 듯도 싶다. 책의 첫머리로 시작되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내가 알던 여자들의 얼굴들이 내 뇌리에 와 확 박힌다.

WHO는 우울증을 생명을 위협하는 주요 3대 질병 중의 하나이며 우울증을 겪는 환자의 15%가 결국에 죽음을 택한다고 보고한다. 우울증은 전쟁, 암, 에이즈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오랜 세월을 빼앗는다고 한다. 이쯤 되니 묘한 선율의 글루미 선데이 어쩌고 하던 말들이 어느새 쏙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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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홍글씨」 속 이은주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건만, 특히 사람은 사랑이 영원할 수 없음에 절망한다. 하지만 후에 더 찐한 사랑을 얻는 거름이 되지 않던가. 고로 인간은 쇼펜하우어 아저씨가 말했던 것처럼 절망할 줄 알아야 더 큰 가치를 얻을 수 있는가 보다. 이것이 바로 우울증의 저 깊은 바닥에 깔린 기제인 것이다. 비록 우울증이 안겨주는 그 심연의 공포는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지만 “왜 나인가?”, “내 인생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절규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는 동안 사람은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갖고, 이를 통해 삶의 이유에 답을 구하고자 고통의 강을 건넌다.

역경은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역경을 통해 교훈을 얻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고난은 유쾌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편안한 삶을 열망하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커다란 대가를 치를 용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인생(우울증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에서도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본문 645~646쪽)

삶은 어떻게든 살아지지 않던가. 환경이 고되거나 말거나 유전력이 있거나 말거나, 뇌에 세라토닌이 줄거나 말거나 어쨌거나 생명이 있는 한 삶도 면면을 이어간다. 우울증을 안고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우울증으로부터 다시 살아가야 할 힘을 얻고, 그 이유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극한의 고통과 매일매일의 결단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지 못했었다.

막달레나의집에 오는 여성들의 인생을 들춰보노라면 고난과 역경이라는 단어의 적합성에 완전한 몰표를 던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한데도, 그들은 자주 유쾌하게 웃고, 떠들고, 싸우며 지지고 볶는 일상을 살아 낸다. (그녀들 중 누구누구, 우울증에 걸린 사람 맞아?) 전 날에는 인생이 비참하네 어쩌네 했으면서도 다음 날이면 프로의 정신(?)으로 손님을 낚고, 나는 배우고 연습해도 결국에는 다큐가 되고야 마는 유머의 멘트를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술술 풀어내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한번쯤 화내면 그뿐일 사소한 일에도 사력을 다해 악머구리를 해댄다.

얄팍하게 치장된 내 상식의 선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을 수시로 일삼는 그들과의 일상에서 웃겨서 웃다보면 울게 되고, 슬퍼서 울다보면 웃고 있는 묘한 리듬이 생겼다. (헉, 이것은 조울증? --;) 녹록치 않은 성매매 현장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우울증에 무방비로 노출된 환경일 수 있건만, 그들은 그처럼 일, 유머, 몰입 등 자신들이 살아갈 힘을 만들고 발휘했던 것 같다.(이것은 사회복지 용어로 탄력성Resiliency이라는 --;)

나는 지옥을 체험하고 살아남았기에 다시 지옥에 가게 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임을 안다. (…)
그것으로도 우울증은 거의 가치를 지닌다. 나는 다시는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이 터지거나 내가 탄 비행기가 사막에 추락한다 해도 쉽게 목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본문 651~652쪽)

몇 년 동안이나 연락이 끊겼던 최고의 우울모드를 지닌, 인연이 참 질기기도 질긴 한 여성이 있었다. 이미 여덟 살 때 극도의 외로움과 무상을 알아버린 그는 자기 몸을 도화지 삼아 자해를 일삼곤 했다. 그의 몸부림은 막달레나의집에 사는 다른 여성들에게 “딱 저렇게만 안 살면 OK"라는 교훈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뭐 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를 처음 알았을 때 나 역시도 그의 몸에 남은 흔적에서 절망이 뚝뚝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와 나누는 일상이 해를 거듭할수록 나는 그의 살고 싶은 의지가 몸에 남긴 난도질의 횟수에 제곱으로 비례한다는 것을 알았다. 긋고 또 그어도 손상되지 않는 그 질긴 삶의 힘에 나는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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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作 <프리드리히 니체>
_ "너희들은 말한다. '삶은 견뎌내기 힘들다'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너희들은 어찌하여 오전에 긍지를 갖다가도 저녁에 이르러서는 체념하는가? 삶은 견뎌내기 힘들다. 그러나 그토록 연약한 언동은 삼가라! 우리 모두는 짐깨나 질 수 있는 귀여운 암수 나귀가 아닌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몇 번의 마음감기를 앓는 것쯤으로야 깊은 우울증의 고통을 어찌 다 알까만, 우울한 일상을 살아가거나, 우울증 때문에 도무지 ‘자활’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도 내 주변에 존재하는 것은 앤드류 솔로몬이 그랬듯 오늘도 살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에게 간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을 조금은 알 듯도 싶다. 고난과 역경의 길에서 과감히 삶을 선택하는 그 위대함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살아 있기를 선택했던 그 위대함. 자원 없고, 빽 없고, 사랑의 추억이라곤 없는(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보듬고 이처럼 삶을 지속하고 있는 이 존재들의 그토록 진지한 성찰을 어찌 위대하다 하지 않을까.

“이 고통에 이른 것을 환영하노라. 그대는 이것으로부터 배움을 얻으리니.” (오비디우스, 책에서 인용)

뱀꼬리

『한낮의 우울』과 <막달레나공동체>에 대해서


알라딘 링크
2009/06/24 11:55 2009/06/24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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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go2sm 2009/06/24 17:27

    저도 이 두꺼운 책을
    무슨 약 복용하듯이(?) 한 꼭지씩 읽었는데
    그 고통은 충분히 아름다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이 글을 읽고 나니, 다시 이 책을 펴들고 싶네요.
    한낮에 우울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비참했으면
    죽을 생각했을까요, 저도..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안 '죽을' 자신이
    생겼어요.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 그린비 2009/06/25 10:03

      에고. 에고이즘님도 우울의 시간을 겪으셨군요.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진실을 더 날카롭게 직시한다고 하지요. 우울을 데리고 살되 우울의 늪에 빠지지는 말 것.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

  2. 사십대 2009/06/25 15:05

    이 책을 당장 구입해서 읽고 싶어졌습니다.
    우울증, 그 심연의 공포.... 뼈아픈 성찰의 시간.... 다시 살아가기....
    잘 읽었습니다.

    • 그린비 2009/06/25 15:35

      우울의 시간들을 잘 살아내시길 바랍니다.. 책도 꼭 읽어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