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맨, 고양이를 막아선 남자

Luna(중국 복단대학)

굴곡 많은 근현대사를 경험한 중국은 추모해야 할 굵직굵직한 십주년만 거론해도 해마다 반복된다. 2009년에 돌아봐야할 역사적 순간은 단연 오사운동 90주년(1919.05.0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1949.10.01), 그리고 톈안먼 사건 20주년(1989.06.04)라고 할 수 있다. 오사운동에 대한 새로운 책과 관련 학술대회는 풍성했으며(물론 오사운동의 정신을 본받아 비판정신을 분출하는 것은 최대한 억제시키고 학술제도 내에서의 회고만 가능하게 했다), 가을이 되면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기획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사 톈안먼 사건"은 중국 어디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홍콩에서 매년 열리는 추모 촛불집회에는 사상 최대인원인 15만명이 운집했으며, 언제나처럼 미국 등 서방국가는 재평가를 요구하는 성명을 내고 중국 외교부는 그에 대한 강한 불만의 목소리로 응수하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통과의례화 되어가고 있다. (톈안먼 광장의 검문 강화 및 유투브, 트위터, 플리커 등의 차단이 있었지만) 육사 20주년은 너무나 조용히 지나갔다.

한국의 여러 매체에서도 6월 4일을 전후하여 톈안먼 사건을 다루는 기사를 내보냈지만 단편적인 뉴스에 그쳤고, 20년이 경과한 사건 자체의 의미에 대한 특집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해외의 경우 BBC, RFI 등의 중국어 사이트에서 팡리즈, 왕단 등 핵심 관계자, 사건 당시 취재 기자, 관련 학자 등의 인터뷰와 글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20주년을 조명하고 있으며, 해외 중화권 뉴스 사이트인 dwnews(多维新闻网), "縱覽中國; China in Perspective" 등에서도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러나 이러한 재검토나 회고조차 필요 없다. 이 사건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들출 필요도 없이 그저 개설서에서 나오는 사건 개요를 그대로 옮겨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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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후야오방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학생들은 민주의 기치를 내걸고 천안문으로 모여들었다. "민주-우리 공동의 이상"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신임을 잃은 뒤에도 여전히 중앙정치국에서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89년 4월 15일 중앙정치국 회의에 참석했다가 (격론을 벌이던 중)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정치적으로 기민한 학생들은 민주적 성향의 후야오방에 대한 자신들의 진심어린 존경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 마침내 정치적 기회가 왔음을 인식했다. 고위 공직자가 죽었을 때 정부가 잠시 정치적 반대의견을 용인한다는 사실, 즉 “살아 있는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죽은 자를 애도하는”전통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 행진과 시위의 규모는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으며 … 집회와 언론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서를 발표하고, 관료들의 부패와 족벌주의를 비난했다.

…… 그러나 덩샤오핑은 1989년의 학생활동가들을 문화대혁명 시기의 반란자들과 비교하면서 둘 다 ‘천하동란’을 일으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에서 그는) 학생시위가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된 음모”이며 이는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사회주의 체제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불법적인 집회와 허가받지 않은 시위는 엄금해야 하며 학생들이 노동자, 농민 그리고 타교 학생들과 연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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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학생들 뿐 아니라 노동자, 교사, 의사, 급기야는 당 기관지라 할 수 있는 인민일보 기자들까지 합세하였다.

(이에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으며) 일부 시민은 학생들의 행진대열에 가담했고 어떤 사람들은 음식과 돈을 주는 등 자발적이고 인정 넘치는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 그것은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시위였으며, 목격자들은 시위 참가자들의 비상한 자제력과 학생들의 조직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이들은 익명의 시위집단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는 신원이 확실한 집단들이었다.” (이 운동의 규율 잡힌 행동과 흥겨운 모습, 반전통적인 카니발 같은 환경은 ‘중국의 우드스탁’이라 불릴 정도로 대항문화의 축제인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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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그들은 춤을 추고 가요를 불렀으며 인기 있는 통기타 가수와 록 스타들이 합류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에도 인민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고 시위군중과 금방 친해졌다. 그러자 노련한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부대로 변경된다.) 6월 9일 덩샤오핑은 텔레비전에 나와 그가 ‘반혁명 폭란’이라고 부른 것을 섬멸한 군대와 경찰의 노고를 치하하고 시위대와의 싸움과정에서 사망한 수십 명의 병사들의 가족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사회의 쓰레기’라고 비난하면서 어떤 유감도 표시하지 않았다. …… 이들은 젊은 시위자들을 처벌하고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겁을 주기로 결정한 이후 이 위기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무력진압에 이어 곧바로 체포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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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인민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시민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최루탄과 물대포만으로 진압이 가능했을 그 곳에서, 어느 누구도 정말로 "진짜" 총알을 사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 길게 인용한 위 글은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중 “1989년의 민주화운동”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떤가? 중국공산당, 덩샤오핑, 인민해방군 등이 1989년의 중국 베이징에서 일으킨 일로만 보이는가? 노골적으로 딴나라당, 박쥐, 전투경찰로 치환시켜서 읽어보라고 알려줄 필요도 없이 최근 2년 사이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과 겹쳐져 그저 망연자실해질 따름이다. 의도적으로 6월 3일 밤에서 4일 새벽에 걸친 학살 부분에 대한 인용은 생략했는데, 문제는 학살 이후이기 때문이다.

톈안먼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의 운명은 다했으며, 중국의 개혁개방은 끝났다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90년대 이후 더욱 열정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을 거듭하여, 사건의 강력한 진압이 경제발전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시간적인 선후관계는 너무 쉽게 원인과 결과의 서사로 변해 버린다. 중국 정부는 모든 사람이 이 사건을 잊어주기를 바랄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이다. 사건 자체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그러나 정부에 반대하는 순간 개인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분명하게 기억하기를 바라며, 그 기억을 통해 두려워하기를 바란다. 잔인한 진압과 뒤따른 체포, 언론 출판 등 사상검열을 통해 그들은 인민들의 두려움이 내면화되고 일상적인 자기검열을 지속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학제간 구별 없이 토론을 즐기던 비판적 지식인들은 자기 세계에 갇힌 전문 학자로 바뀌었다. 학생들의 관심은 취업준비를 위한 스펙 쌓기에 집중되고 있다. 사회는 너무나도 빨리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오직 "돈"이면 최고인 시대로 변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안정"과 "질서"를 염원한 덩샤오핑의 발포 명령에 뒤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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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베이징 시내로 진입하는 탱크를 막아서는 한 시민을 모습을 찍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 사진은 가볍게 비틀어진다. 앗! 그런데 고양이가?

경제의 발전으로 최소한 밥 굶는 사람은 없어지지 않았느냐? 대답은 대부분이 평등하게 적게 먹는 사회에서 누구는 배터지게 먹다 남기고 누구는 매 끼니 걱정하는 사회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각종 통계지표와 대도시의 고층빌딩이 제시하는 상징은 그러나 발전과 진보이다. 예전보다는 낫지 않느냐. 효율성 떨어지게 어느 세월에 합의와 조정이나 하고 있냐. 그러다가 치고받고 싸움이나 하고 시간 다 보내지 않느냐. 그것보다는 강력한 정부를 믿어라. 지금은 일부가 '쬐끔' 힘들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는 대로 믿고 따라오면 다수가 행복해진다니깐. 아이 참, 하여튼 기다려 보라니깐, 말들이 많네.. 퍽!!

어디서 많이 보는 풍경이다. 쥐 한마리를 탓할 수 없는 우리의 욕망이 사실은 그 속에 끼어 있다. 흔히 한국과 중국의 격차는 20년 정도라고 말해져 왔다. 격차는 한꺼번에 뒤집힌다. 어떤 면에서 이미 중국의 현재는 한국의 미래이다. 탱크가 동원되지 않은 천안문사건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 능력이 허락된다면 "톈안먼사건 20주년 비공개 세미나"에서 발표된 첸리췬의 「미완성의 임무」와 China Perspectives 2월호에 발표된 페리 링크의 「6월 4일: 기억과 윤리」를 다음에 간단하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지출처
<사진 1~8> China: a Century of Revolution, Part3, "Born under the Red Flag 1976-1997 (DVD 자료에서 캡처 이미지)
<사진9> 플리커(http://www.flickr.com/photos/22949366@N07/3591541517)

2009/07/03 10:59 2009/07/0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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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9/07/03 14:14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그린비 2009/07/03 14:17

      네, 감사합니다. ^^

  2. 세운 2009/07/06 21:45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좀 더 알고 싶어지네요. "톈안먼사건 20주년 비공개 세미나" 자료도 기대하고 있을께요^^

    • 그린비 2009/07/07 13:35

      세운님 안녕하세요. ^^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인문학 해외통신' 많이 기대해 주세요!

  3. 늑대 2009/07/07 20:07

    잘 읽었습니다-

    • 그린비 2009/07/08 09:30

      늑대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