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인생을 함께 오르는, 자일파티



생사를 함께 하자니, 당신 미쳤어?

내가 엉거주춤한 풍뎅이 자세로 노량진 실내 암장에 매달려 있을 때 거의 거미인간 수준으로 그 곳을 날라 다니던 여성이 있었다. 그가 바로 故 고미영 대장이다. 이야기 한 번 나눈 적 없지만 온갖 대회를 휩쓸던 그는 내가 도달하고자 했던 바로 그 ‘철녀’의 모습이었기에 내게는 늘 경외의 대상이었다. 한데,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결코 산에서 죽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그가 히말라야 기슭에서 생을 마쳤다. 히말라야와 같은 고산 등반에서는 보통 서로의 몸을 자일로 묶거나 이미 고정되어 있는 자일을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고미영 씨가 사고를 당한 칼날능선 지점은 워낙 눈사태와 낙석이 많아 자일을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고미영 씨의 소식을 들은 그 이른 아침, 히말라야의 잔인한 바람 한 점이 휘이익 내 가슴으로 불어드는 것만 같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성산악인 故 고미영 _ 히말라야 마칼루봉에서

몇 년 전, 막달레나공동체 활동가들의 파트너십교육에서 나는 누군가와 살고 죽음을 함께 해야 하는 가상체험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 프로그램을 이끄는 리더는 우리에게 딱히 같이 죽거나, 같이 살라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룹멤버들과 함께 역경의 순간에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라고 했을 뿐이었다. 한데, 우리는 너무 진지했던 나머지 자일파티를 들먹이며 험한 산에서 길을 잃고 삶의 기로에 놓일 때 서로를 묶어 공동의 운명을 기원하자고 했다. 나로부터 시작된 그 첫 발단, 분명 농담처럼 시작되었는데 토론은 진지해졌다. 급기야 눈물까지 흘려가며 만일 우리 공동체에 어려움이 닥치면 함께 위기의 산을 오르자고 했다. 그러다 떨어지면 함께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도 해 보고.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얼마나 쌩뚱 맞은 발상인가? 아니 상생하는 법을 찾아보랬지, 누가 함께 죽는 상상을 하랬나? 심지어 우리는 자일로 연결된 사람들이  다 죽으면 조직을 책임질 사람이 없으니 누구 하나는 자일을 연결하지 말고 살려 보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 그 살아남은 자가 끝까지 우리 공동체를 책임지자고. 허걱... 정말 무서운 조직이다. 그 리더는 지금껏 수많은 그룹에 이 과제를 주었지만 이토록 과하게 진지한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누구는 평생소원이던 밤낚시(남자와 단 둘이서만)의 꿈도 못 이뤘고, 일본어 공부를 십 년 넘게 해 오고 있는 누구는 아직도 일본여행을 못 떠났으며, 또 누군가는 이제 막 임신이후 모유수유의 구속(?)에서 몇 년 만에 해방되었건만. 아니, 생사를 함께 하자니, 막달레나의집, 너 미쳤어?!

영혼이 교류되는, ‘자일파티’

자일파티(seil party)는 일본에서 비롯된 등산용어이다. 독일어로는 안자일렌(anseilen), 영어로는 러닝빌레이(running belay)라는 용어가 쓰인다. 전문적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이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안다. 암벽이나 저 히말라야 같은 높은 봉우리를 오를 때 자일은 생명줄이다. 하여, 그 생명줄을 나누어 맨 파트너는 목숨을 나눈 동지인 셈이다. 그 동지와 자일을 나누어 매는 것을 자일파티라 한다. 자일파티가 언제나 서로를 살리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자신의 삶을 옭아매는 구속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극한의 상황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지만 내가 살기 위해 파트너의 줄을 끊어낼 수도, 나를 살리기 위해 파트너가 스스로 줄을 끊어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닛타지로, 『자일파티』(일빛, 1993)
_ 절판 후 『아름다운 동행』으로 재출간되었다.

내가 자일파티라는 말을 선명하게 가슴에 새기게 된 것은 산을 오르는 두 여성의 삶을 다룬 닛타지로의 『자일파티』를 만나게 되고부터였다. 표지디자인의 촌스러움으로 치자면 내가 갖고 있는 책 중에 가히 ‘베스트3’에 들을만하다. (2등은 그린비에서 펴낸 『쉼터이야기』, 1등은 막달레나공동체에서 펴낸 『막달레나, 막 달래나?』 되겠습니다.) 내가 이 책을 집어 들었던 배경에는 조금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신영복 선생님의 추천글이 한몫했다. 당시 구속된 이래로 단 한 번도 산을 보지 못했던 신영복 선생님은 이 책(당시에는 원서로)이 감금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자신에게 “엄청난 세계”를 열어 주었노라고 이야기한다. 책을 다 읽고서야 그 “엄청난 세계”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책의 주인공인 도시코와 미사코는 산에 대한 열정적인 여정을 통틀어 가장 신뢰하는 여성 자일파티를 이룬다. 둘의 자일파티는 선등과 후등을 수시로 교차하며 동등한 파트너십으로 마터호른 북벽을 오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고산등반에서 흔히 등장하는 ‘정복’이랄지 ‘공격’ 따위의 전투적 개념은 애초에 없다. 소위 잘 나가는 여성산악인으로서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내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들에게 산은 ‘산이 거기 있으므로’ 오르는 경외의 대상도 아니며 다만 산은 그저 일상이며 삶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신영복 선생님이 언급했듯 이 책 어디에도 그들의 산에 관한 멋들어진 함의는 단 한 문장도 찾아볼 수가 없다. 흔히 선등자와 후등자, 남자와 여자, 숙련자와 비숙련자, 잘하는 이와 못하는 이로 양분되는 기존의 통념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교류되는 자일파티’를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의 편견어린 관심으로 서로의 자일을 거둬들이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그 둘, 같은 날 각각의 또 다른 파트너들과 함께 산에서 죽고, 또한 산에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 결국 산은 그들에게 살고 죽음을 다 주었으며, 오롯이 인생을 다 걸게 했다.

히말라야에서 중얼거림: “너도 살고, 나도 살았구나……”

이 두 여성처럼 나에게도 자일파티에 얽힌 추억이 여럿 있다. 그 중, 파릇파릇하던 시절 처음 만난 사람들과 팀을 이뤄 나섰던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경험은 두고두고 내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기후가 좋지 않아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하산했고, 우리도 트레킹을 계속할 지 결정을 해야 했다. 같은 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산을 결정했는데, 팀의 이끔이였던 한 남자는 자기는 살고 죽는 것에 관심 없다며 결연히 길을 나섰고, 한 여자는 안 가면 후회할 것 같다며 그 남자를 따라 나섰다. 나는 내 평생 첫 해외여행에 지불한 노잣돈 생각에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구르릉구르릉, 여기저기서 들리는 눈사태 소리는 흡사 전쟁터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처럼 온 산을 뒤덮었다. 남자는 눈사태가 나거나 말거나 뒤도 안 돌아보고 계속 걸었으며, 유난히 덩치가 큰 여자는 산에 익숙지 않은 듯 헉헉 거리며 계속 뒤처졌다. 나는 남자와 여자의 중간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남자와 속도를 맞추다가도 여자가 신경 쓰여 한참을 기다리는 상황을 되풀이했다. 그러던 중, 어느 눈사태 더미를 헤치며 걷는데, 여자가 그만 중심을 잃고 경사가 가파른 눈더미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아찔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손재식 作 <자일파티>
_ ‘동료 사이를 관류(貫流)하는 믿음과 사랑의 끈’ 이것이 바로 자일의 실체다.
(출처 : 산악매거진 『MOUNTAIN』)

남자는 이미 보이지 않을 만큼 앞서 있었고, 설령 가까이 있다 해도 자기 삶에도 관심 없다는 자가 남의 살고 죽는 것에 관심을 보일까 싶기도 했다. 여자는 그 와중에도 엎어진 채로 헉헉거리며 자기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던 길을 가라며 개미소리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 거린다. 당신, 무슨 영화 찍나? 나는 배낭을 집어 던지고 등산화 앞부분으로 쿡쿡 굳어 버린 눈을 찍어 가며 암벽등반 자세로 여자가 있는 아래로 내려갔다. 여자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는 길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다행히 여자는 다친 데 없이 무사했다. 나는 여자가 발 디딜 곳을 만들어 주며 결국 무사히 끝까지 올랐다. 급조된 등반이었으므로 우리에게 아이젠이나 자일, 하다못해 등반용 스틱 같은 장비조차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아쉬운 대로 긴 막대기를 주워 여자에게 내밀었다. 그는 군말 없이 막대기를 잡고 내가 이끄는 데로 함께 걸었다. 나는 앞뒤로 두 명분의 배낭을 짊어지고 그를 끌고 결국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4130m) 까지 갔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몇몇 외국인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풀린 다리를 가까스로 지탱하며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어기적 따라오는 여자를 보면서 너도 살고, 나도 살았구나... 중얼거렸다.

그 일을 함께 겪은 우리는 생사를 나눈 사이라며 서로를 잊지 못한다. 전문 산악인들이 보기에는 ‘장난하냐?’ 싶겠지만, 고산등반이 처음이었던 우리에게는 생사의 기로를 경험하게 했던 기억이다. 그 뒤로 나는 살면서 어려운 순간이면 그 친구와 눈사태더미를 빠져 나오던 날을 떠올리며 힘을 추스르곤 했다. 쉽사리 사람들의 도전을 허용치 않는 험준한 고산도 이렇듯 생사를 함께하는 자일파티가 있기 때문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자일로 연결된 파트너와 함께 어려운 상황을 감당하며 조금만 지나면 더 나은 순간이 올 거라는 말없는 믿음으로 서로를 의지한다. 하여, 누군가는 ‘자일파티는 불가능한 꿈을 이뤄낸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도처에 널린 크레바스, 생존시대를 살며

막달레나공동체와 인연을 맺었던 여성들과 수많은 자일파티를 해오고 있다. 누군가와는 살면서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추억할 수 있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서로의 눈물과 아픔을 오롯이 다 지켜보았던 누군가와는 ‘동료’가 되어 함께 일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꽤나 튼실한 파트너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엮은 인연들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것도 사람의 일이라(물론 사람의 일이라 믿기 어려운 일도 늘 겪는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씁쓸한 기억만 남겨주고 홀연히 떠나기도 하고,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그닥 좋은 추억을 안겨주지 못한 채 헤어지기도 한다. 개중에는 떠나고 싶지 않음에도 미련 때문에, 미안함으로, 용기가 없음으로 마음속으로만 이별을 고하고 휭 하니 떠나는 순간도 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더러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막달레나의 집 사진전
_ "도시코는 울지 않는 아이였고, 미사코는 눈물이 많았다. 그런데 왜 암벽에서는 마음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걸까?" (『자일파티』상권, 198쪽)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떠나도 떠난 게 아니고, 헤어져도 헤어진 게 아닌, 인연이란 그런 건가 보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떠난 사람들이 잊고 지낼 만하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해 온다. 물론 그들 중에는 그동안 결혼해서 애를 낳았다거나,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거나, 취직을 해서 재밌게 일하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자신의 근황을 전해오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면 오랜만에 마주한 그네들이 그저 반갑고 사는 게 신난다. 그런데 가끔은 경찰서, 교도소, 병원에서 우리를 찾는 연락이 온다. 경찰서로 와서 벌금을 내달라거나, 응급실로 치료비 갖고 오라거나, 교도소로 책 좀 넣어 달라거나, 폐쇄병동으로 면회 좀 와 주면 안 되겠냐고. 그 순간 우리는 확인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이들과 함께 했던 자일파티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부여잡고 살아야 하는 시대, 도처에 널려 있는 크레바스들.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근황을 묻는 것에도 용기를 내어야 하는 요즘, 낡고 해진 줄이라도 기꺼이 함께 동여매고 살아야 한다. 성매매로부터, 가난으로부터, 이 정권의 폭압으로부터…. 심본호흡을 크게 해다. 저 무식한 막달레나공동체처럼 죽자고 매지 말고 살자고 매자.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며 실낱같은 믿음이라도 의지하며 우리 동행할 수 있다면. 아, 내게 메어져 있는 자일들의 소중함이 새삼스럽다.
알라딘 링크
2009/07/15 12:07 2009/07/15 12:07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670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