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사회적 죄의식의 기원 (1)
― 서구로부터의 충격과 러시아의 반응, 표트르 차아다예프의 「철학 서한」



흔히 한 사회의 주요한 식자층, 또는 지식인 계급을 일컫는 데 사용되는 용어가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다. 물론 러시아 말이다. 개인으로서의 지식인 하나하나를 일컫는 ‘인텔리겐트’(intelligent)란 말이 있긴 하지만, 대개 고등교육과 교양을 쌓은 무리를 집합적으로 가리키기 위해 인텔리겐치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단어가 전문화된 문화적 소양을 쌓은 식자층과 구별되어 사용될 때 갖는 함의는 사뭇 다르다. 인텔리겐치아는 그들이 속한 사회와 역사에 대한 지적 복무 이상의 사명, 곧 정의와 책임, 희생 등의 윤리적 소명 의식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앎과 행동의 일치에 있다. 지난했던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반향을 얻은 ‘행동하는 지성’에 대한 호소가 적절한 예가 될 수 있겠다. 무릇 한 사회에서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사회의 배우지 못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동정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배운 사람’에 불과한 단어를 굳이 러시아어에서 음차해 사용하는 이유에는, 이 용어가 생겨난 러시아의 역사적·문화적 기원을 돌아보라는 촉구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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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 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_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단순히 엘리트 출신, 지식인의 의미보다는 혁명가에 더욱 가깝다. 이 그림은 러시아 혁명 인텔리겐치아에게 헌정된 그림으로, 혁명 속에서 집으로 살아 돌아왔지만 가족들의 당혹스러움에 망연한 인텔리겐치아의 모습을 담았다.

지적 능력, 또는 지성에 대한 강조가 휴머니즘에의 호소와 겹쳐 있음을 볼 때, 인텔리겐치아가 지극히 근대적 관념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에 러시아라는 특수한 맥락을 덧붙여 본다면 인텔리겐치아라는 단어의 의미역이 보다 명확해질 듯하다.

서구적 의미에서 르네상스를 근대(Modernity)의 시발점으로 생각한다면, 러시아는 상당히 예외적인 사례를 구성한다. 지리적으로도 유럽의 동쪽 끝에 자리한 데다가 14~16세기의 몽골 지배를 겪으면서 서구와는 판연히 다른 역사적 행로를 밟아 왔던 탓이다. 굴종과 타협, 점진적인 저항을 거쳐 16세기 ‘타타르의 굴레’를 벗어났을 무렵의 러시아는 당대 서구인들이 보기에 동양적인 관습과 사고방식에 푹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근 2세기에 이르는 공백은 서구적 르네상스의 부재를 뜻했고, 이는 러시아와 유럽의 격차와 차이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몽골 지배 이후 ‘차르’(황제) 한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절대적 정치 구조가 세워지면서 러시아는 유럽 공통의 역사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자족하는 미개의 땅, 혹은 ‘아시아적 가신국가(家臣國家)’ 정도로 치부되어 버렸다. 물론 여기서 ‘아시아적’이란 레테르가 ‘야만적인 아시아’라는 당시 유럽인들의 상상적 이미지의 산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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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대제
_ 1697년, 러시아 군주로서 최초로 서유럽 각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귀국 후 러시아의 모든 관습·풍속에 대한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저 유명한 표트르 대제(1672~1725)의 개혁이 있기 전까지 러시아가 유럽과 구별되는 역사의 자장에 속해야 했던 문화적 원인은 무엇보다도 종교의 차이에 있다. 988년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인 이래 동방 정교는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근거였으며, 이러한 종교적 마인드는 몽골 통치기에도 파괴되지 않은 채 면면히 이어져 나갈 수 있었다. 더구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 제국에 의해 정복됨으로써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되자 “제1, 제2의 로마는 사라지고, 제3의 로마인 모스크바는 영원하리니……”라는 계시적 사명감으로 가득 찬 러시아인들은 자신들과 서구의 차이를 마치 성서적 은총과 같은 것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조차 했던 것이다. 이렇듯 문화(종교)와 지리의 격차는 러시아를 역사 ‘저편’에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으며, 전 지구적 보편사, 곧 근대 세계사가 시작되기까지 러시아인들은 ‘역사의 방학’ 속에 숙면을 취한 채 잠들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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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루보 作 <보로디노 전투의 파노라마>
_ 1812년 보로디노까지 쳐들어온 나폴레옹군을, 러시아군이 처음으로 반격하여 나폴레옹군 5만 8000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전투.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쳐들어왔던 사건은 그 숙면을 깨뜨린 최초의 일격이었다. 잘 무장된 프랑스 군대의 진격을 막을 수 없던 러시아는 초토화 작전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잘 묘사되었듯 끝내 수도 모스크바를 스스로 불태워버리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방어전(?)을 폈지만, 결국 혁명 프랑스의 군대를 물리친 것은 북방의 혹독한 추위였다. 이렇게 사정은 역전하여, 러시아군은 패주하는 프랑스군을 뒤쫓아 1814년 3월엔 파리까지 입성하게 된다. 그럼 ‘북방의 곰’ 러시아가 ‘유럽의 중심’ 파리에서 목격했던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든 빨리빨리 내놓으라고 ‘비스트로!’(bystro!)를 연발하는 러시아 병사들에게 프랑스인들이 허겁지겁 먹을거리(bistro)를 꺼내 놓아야 했다는 우스개가 있지만, 수 세기 동안 무관심과 공상으로 일관하던 러시아인들이 프랑스에서 보았던 것은 호화로운 서구의 외관, 현대성 자체에 다름 아니었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 이후 문화와 풍습에서 어느 정도 유럽의 외양을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러시아가 어색하게 서구를 흉내 내는 동안 서구는 벌써 저만치 몇 걸음 더 나아가 있었다. 승전국으로 의기양양하게 입장한 러시아인들이 파리에서 보았던 것은 역사의 부단한 진보인 동시에 러시아의 역사적 지체였으며, 유럽과 러시아의 커다란 차이, 과거엔 자부심을 안고 긍정하던 차이였지만 이번엔 열등감에 낯을 붉히며 서둘러 부정해야 하는 차이에 다름 아니었다.

유럽으로부터 받은 충격. 이에 러시아의 지성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세기 초엽 유럽의 한쪽 끝에 자리한 러시아에서 지식인이라야 한 줌에 불과한 숫자였지만, 주로 군 장교들로 구성된, 직·간접적으로 서구를 경험한 청년 엘리트들은 영국식 입헌 군주정을 목표로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에 맞춰 쿠데타를 결행하기로 약속한다. 1825년 12월 14일의 ‘데카브리스트’(12월당)의 반란이 그것이다. 하지만 비장했던 젊은 혁명가들의 행동은 그들의 의지만큼 민첩하고 과단성 있지 못했다. 아무런 구체적인 계획도 내놓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반나절을 머뭇거린 혁명당은 마침내 정세를 장악한 니콜라이 1세에 의해 순식간에 진압되고 말았다. 경사스런 즉위식 날 하마터면 폐위당할 뻔한 새 황제가 혁명 도당을 곱게 용서했을 턱이 없다. 무자비하고 가혹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신성한 제국에 근엄하게 즉위하고 싶어 했던 니콜라이 1세는 ‘몽둥이 차르’라는 무서운(!) 별명을 얻게 된다. 혁명의 원인을 서구의 자유사상에서 찾았던 니콜라이는 서구로부터 유입된 것은 무엇이든 해롭고 사악한 것으로 간주하여 금지하거나 순치시켜 받아들이도록 했다. 대학에서 헌법과 철학 과목의 교수는 금지되었고 해외 유학생들에겐 전원 귀국령을 내려 어떻게든 서구와의 교통로를 차단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이후 소비에트 시대에까지 이어지는 검열과 금지, 철의 장막의 기원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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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차아다예프
_ "차아다예프의 「철학 서한」은 암흑을 꿰뚫는 한 발의 총성이다."

아마도 그냥저냥 살 만했는지도 모른다. 계몽사상, 자유주의 등이라야 소수의 귀족 지식인들만이 접할 수 있던 지적 사치에 가까웠고, 또 그들 대부분은 가문의 세습 농노들에 의해 ‘부양’되고 있던 참이었다. 18세기의 반동 전제군주였던 예카테리나 2세가 볼테르와 교분하며 자신의 계몽주의를 치장했듯이, 19세기 지식 귀족들 역시 지적 허영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무지와 숙면의 어둠은 여전히, 어쩌면 영원히 지속되는 듯했다.

1836년 『망원경』지에 발표된 표트르 차아다예프(Pyotr Chaadaev, 1794~1856)의 「철학 서한」은, 후일 러시아 혁명사상의 대부 알렉산드르 게르첸(Aleksandr Herzen)의 표현을 빌면 “암흑을 꿰뚫는 한 발의 총성”과 같은 것이었다. 정교와 전제주의, (관제) 민중성이 국시로 선포되어 있던 시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차아다예프의 글은, 비록 그게 어느 귀족 부인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국체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동방 정교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수호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신비로운 가교, 유럽의 퇴폐와 아시아의 야만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땅, 위대한 아버지 군주로부터 무지렁이 농노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묶인 신성한 정교 공동체 러시아가 사실은 지독히 후진적이며 무지몽매한 나라이며, 역사의 변경에 고아처럼 떨어져 나와 자신이 가난하고 어리석은지도 모른 채 방황하고 있다니! 자신의 조국을 모욕하고 조소하는 차아다예프는 예언자인가, 아니면 정신병자인가?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인가?

2009/07/17 11:33 2009/07/1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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