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 비판적 지식의 세계화
라틴아메리카 석학(월터 미뇰로, 엔리케 두셀, 존 베벌리)의 행보

우석균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필자는 지난 달 스페인 타라고나에서 근대성/식민성 연구 그룹의—혹은 탈식민주의 연구(Decolonial Studies) 그룹—대표적인 학자인 월터 미뇰로를 만났다. 그는 7월 8일에서 7월 22일까지 “지식의 탈식민화: 포스트식민주의연구, 탈식민적 지평”(Decolonizing Knowledge: Postcolonial Studies, Decolonial Horizons)이라는 주제로 타라고나에서 열린 탈식민주의 하계학교에 와 있던 참이다. 이 하계학교는 라틴아메리카, 이슬람, 아프리카 연구자들이 강의를 맡아 전 지구적인 맥락에서 탈식민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강의 대상자들은 학부생 혹은 탈식민주의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이었다. 미뇰로는 하계학교 기간 내내 강의진과 학생들은 물론 그에게 혹은 하계학교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접대하면서 사실상 교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뜻밖이었다. 1년 전에 미리 초청하지 않으면 시간을 내기 힘들 정도의 저명한 학자가 학술대회나 특별초청강연이 아닌 행사를 위해 그렇게 여러 날을 할애한다는 것도 그렇고, 어디 가나 대접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학자이고 학생이고를 가리지 않고 탈식민주의를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정치인이 조직을 다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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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미뇰로

그 모습을 보면서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가 2008년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석학강좌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라틴아메리카 석학에게 듣는다>의 첫번째, 두번째 강연자인 철학자 엔리케 두셀과 라틴아메리카 하위주체 연구그룹의 대표적 학자인 존 베벌리였다. 70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자신은 밤을 새워서라도 강연에 임할 수 있으니 얼마든지 질문하라고 청중을 독촉하던 두셀이나, 연구소 교수들과 좀더 많은 토론을 하지 못한 점이 한국 방문에서 유일한 아쉬움이었다고 말하던 베벌리의 모습이 타라고나의 미뇰로의 모습과 대단히 닮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이론을 알리고 싶어 하고, 라틴아메리카 이외의 지역에서도 그 이론이 통용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야 물론 학자로서의 당연한 욕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베벌리는 연구소 석학강연 초청 대상자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뒤 월터 미뇰로를 추천했다. 추천의 변은 미뇰로가 자기 이론의 아시아 전파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타라고나 하계학교에서 엿볼 수 있었듯이 아랍권이나 아프리카권에는 이미 교두보를 마련했으니 아시아를 그 다음 목표로 정한 듯싶다. 실제로 미뇰로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학자들과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고 있으며, 특정 현안에 대한 사례 수집이 필요한 경우에는 필자에게도 심심찮게 메일을 보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베벌리나 두셀은 또 어떤가? 베벌리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하위주체의 세계적 연대가 가능하기를 간절히 바란 인물이다. 두셀은 젊었을 때부터 히브리 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나중에는 이슬람 철학과 중국으로 연구지평을 넓히더니, 2008년 여름 방한 때는 영어로 번역된 함석헌 책을 몇 권 샀다면서 대단히 기뻐했다. 이들의 행보를 되짚어 보면 라틴아메리카연구에 몸담고 있는 학자들이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지식의 세계화에 얼마나 열정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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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두셀(좌)과 존 베벌리(우)
_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 연구소에서 추진하고 있는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석학에게 듣는다> 석학강좌

그들의 세계화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여러 가지 진단이 가능하다. 학자로서의 욕심, 서구어 사용에 따른 용이함, 라틴아메리카연구가 활성화된 미국을 통한 이론 수출의 용이함, 1960~1970년대 종속이론의 세계화 경험 등등이 세계화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자극제가 되고, 또 그 의지를 무리 없이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한때의 아픈 경험과 이를 통해 얻은 새로운 현실인식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사실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종속이론의 세계화 경험은 1980년대 이래 족쇄로 작용하였다.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해방’, ‘민중’, ‘트리컨티넨탈리즘’ 등의 화두로 한때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에 호소력을 발휘하였고 서구에도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 이론이었지만, 라틴아메리카가 1980년대 미증유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극단적인 이념 갈등을 부추긴 사이코패스 혹은 서구/비서구의 이분법적 문제설정으로 서구식 발전 모델의 도입을 가로막은 척사파 취급을 받았다. 이어 베를린장벽 붕괴는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지식에게는 거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무기력 속에서 ‘세계화’라는 화두를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선점당했다.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있는데도 그 변화의 흐름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두셀, 베벌리, 미뇰로 등을 비롯한 여러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의 세계화 열망은 바로 이러한 뼈아픈 경험에 대한 반성이다. 가르시아 칸클리니 등의 문화연구가 먼저 세계화 논의에 합류하게 될 계기를 마련하자,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세계화 국면에서의 프락시스(praxis), 즉 이론적 실천을 통한 전 지구적 변혁의 모색에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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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스코 作 <상처입은 원주민>
_ 미뇰로는 두셀, 키하노와 더불어 서구의 근대성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여 자원 약탈과 노예노동 착취로 이윤을 극대화한 자본주의의 토대인 식민주의와 불가분적임을 강조하면서 근대성/식민성의 해체를 위한 공동작업에 임하고 있다.
그렇다면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지식은 ‘잃어버린 10년’과 세계화를 거치면서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 어떤 면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가령 탈식민주의는 1960~1970년대의 제3세계 민족주의 노선과 마찬가지로 서구/비서구의 대립각을 날카롭게 설정하고 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하위주체 연구그룹이 목표로 하는 하위주체의 국제적 연대란 것도 계급 이론에 입각해 전 세계적인 혁명을 꿈꾸던 과거와 근본적인 단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최근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지식이 이념이나 서구/비서구의 구태의연한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 현실이 그러니 그런 이분법이 계속 유효한 것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세계화와 함께 전 세계적인 풍요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현실은 전 지구적 식민성(global coloniality)의 시대가 아닌가? 서구/비서구의 문제설정을 경직된 이분법적 사고로 단정 짓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서구/비서구의 구분은 양자의 ‘관계’를 문제 삼기 위함이지 우월을 가리려는 ‘비교’의 관점이 결코 아니다. 또한 1960~1970년대의 일부 과격파처럼 서구와의 관계 단절이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경직된 이분법적 사고 운운하며 서구와 비서구의 불평등한 관계를 선결 과제로 삼지 않고 세계화의 달콤한 과실만을 약속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을 은폐하는 비과학적 태도일 것이다. 그래서 두셀, 베벌리, 미뇰로의 최근 관심사가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더 적극적인 방법을 공통적으로 모색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윤리학과 해방철학에서 성가를 올리던 두셀은 현실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정치철학을 생애 마지막 연구과제로 삼고 있다. 베벌리는 하위주체 연구자답게 국가를 모든 악의 근원으로 규정한 과거의 입장을 어느 정도 유보하고 차베스나 모랄레스의 실험이 사회변혁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미뇰로는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의 시대를 회고하면서 해방신학마저 서구의 기독교적 가부장주의, 즉 식민주의와 뭐가 다르겠냐고 비판하고 있다. 마치,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지식이 무기력했던 시절 혹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던 시절 자신들이 더 선명하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하는 듯한 행보이다.

2009/09/04 10:30 2009/09/0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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