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주의·슬라브주의 논쟁사 (1)
― 헤겔과 러시아


최진석 (연구공간 수유+너머)

러시아의 근대는 커다란 균열로 시작되었다. 전무후무한 열정으로 러시아를 밑바닥부터 뒤바꿔 놓으려 했던 표트르 대제의 개혁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의 모든 면에서 급진적인 서구화를 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외래 문물의 급속한 쇄도와 외국 문화에의 동화였다. 황제 개인의 독단적인 취향과 의지에 따라 실행된 서구화는 주로 제도적ㆍ행정적 차원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개혁의 실제적 모양새는 무비판적이고 무반성적인 일방적 수입에 가까웠다. 몽골에 의해 200여 년을 지배받고, 그 갑절의 세월을 서구로부터 유리되어 있던 러시아가 세계사의 대열에 동참하는 유일한 길은 서구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이란 믿음이 이 정책의 근저에 깔려 있었다. 러시아의 근대를 이식 문화론이라는 악명 높은 테제로써 설명하는 주된 근거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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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보야르'(boyar)
_ 표트르 대제는 오랜 기간 러시아 귀족 계급이었던 보야르의 신분과 칭호를 폐지하고 국가에 공헌한 사람만이 관료 계급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게 했다.

서구화의 목표이자 원동력이었던 근대성(Modernity)은, 중세적 스타일의 봉건 국가였던 루시(Rus')가 러시아(Russia)라는 근대적 사회 구성체로 탈바꿈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표트르 대제는 ‘보야르’(boyar')라 불리던 특권적 세습 귀족으로 하여금 14개의 계급으로 짜여진 관등표에 따라 국가를 위해 복무하도록 강요했고, 공직 취임 시 황제 개인에 대해 했던 충성 맹세를 국가에 대한 서약으로 바꾸도록 명령했다. 자물쇠로부터 전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 한 황제의 열정은 러시아라는 국가를 완성하는 데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제도와 문물, 관습 등 서구적인 모든 것은 선양과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일상의 모든 것이 즉각적인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가령 ‘아시아적’ 분위기가 난다는 이유로 관리들에게 턱수염을 몽땅 밀어 버리도록 압박했으며, 무도회를 열어 귀족들에게 서구식 야회복을 입히고 ‘우아하게’ 춤추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물론, 표트르의 개혁이 러시아를 곧장 서구적 스타일의 근대 국가로 바꿔버릴 수는 없었다. 근대화란 독자적인 국가체로서 러시아가 자립해야 하는 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구 제국으로부터 러시아가 그 일원임을 인정받아야 하는 일이기도 했던 까닭이다.

표트르의 ‘근대의 기획’은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1762~1796)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예컨대, 무소불위의 강권적 통치자를 뜻하던 전래의 ‘차르’(Tsar')라는 칭호 대신, 서구 제국의 예를 따라 ‘황제’(imperator)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서구적 계몽군주를 자처하던 예카테리나는 각종 법령을 정비하는 한편으로 귀족과 농민, 변방 소수민족들을 포함한 전국 대표 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그녀는 볼테르를 직접 페테르부르크로 초빙하기도 했으며, 이 위대한 프랑스 계몽사상가와의 서신 교환을 제왕의 지적 명민함과 호방함의 증거로 즐겨 내세우곤 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모방한 예카테리나의 통치는 잠깐 동안의 허영스런 너스레에 지나지 않았음이 곧 드러난다. 농노 출신인 푸가초프의 반란(1773~1774)과 프랑스대혁명(1789)을 겪으면서 그녀는 모든 개혁 조치들을 취소하거나 무효화했으며, 러시아의 황제는 전통적인 차르로서의 강권과 위압에 다시금 의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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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대제(좌)와 예카테리나 2세(우)

요점은 따로 있다. 중요한 것은, 표트르에 의해 설립된 제도적ㆍ법적 체계의 근대성이 예카테리나 시기의 계몽주의적 세계관으로 내면화되었으며, 이로부터 19세기 러시아는 그것을 내적으로 소화하며 자신의 입장을 도출해 낼 만한 지적 성숙기를 맞이하였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차아다예프의 「철학 서한」(관련글 보러가기)이 웅변하듯, 그것은 역사의 향방에 대한 고심 어린 성찰과 예견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로부터, 대략 1840년대를 기점으로 러시아 지성계를 양분했던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의 이념적 대립은 주목할 만하다. 이 논쟁은 단순히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문물들에 대한 수용이냐 거부냐의 이분법을 넘어서, 러시아가 서구라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비춰 보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타진하는 최초의 자기 반성적 투쟁의 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논쟁은 표트르의 업적에 대한 평가에서 개시되었다.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당대 러시아 사회란 표트르가 벌인 개혁의 총체적 산물로 비쳐진 탓이다. 그들이 자기 시대를 평가하고 새로이 미래를 예견ㆍ설계해 보기 위해서는 표트르가 남겨 놓은 러시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결산 보고서를 작성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엔 일종의 문화적ㆍ이념적 질문이 전제될 수밖에 없는데, 서구의 역사적 행로를 뒤따른 근대 러시아는 그저 이식 문화의 산물이어서 ‘몸에 맞지 않는 옷’마냥 부자연스럽고 어색해 보이지만, 이 옷을 벗어던지고 과연 ‘근대’라는 역사의 흐름을 추구할 수 있을까? 서구의 존재를 눈감아 버린 채 러시아만이 자족적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까? 지난 세기, 우리도 충분히 던져 봤던 이런 물음들에는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즉, 그것은 역사는 보편적이며 단일한 과정으로서 어느 민족이든 그 길을 벗어나 외따로 살아갈 수 없다는 가정이다. 이 자체가 이미 다분히 19세기 유럽적인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은 이런 가정 없이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물음은 이렇게 역사철학적 수준에서 자리 매김된다. 표트르 대제에 대한 평가가 곧 러시아의 근대성(“세계사에서 러시아의 위치는 어디인가?”)에 관한 물음으로 직결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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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_ 헤겔주의는
러시아의 정치적·문화적 문제들과 관련해 문학비평가 비사리온 베린스키, 혁명적 작가 알렉산드르 게르첸,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혁명가 마하일 바쿠닌 등에 의해 수용되었다.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에 대한 고찰은 헤겔의 사상을 수용함으로써 더욱 첨예화된다. 특히 1830~1840년대에 걸쳐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논의된 서구 철학자들 가운데 헤겔은 단연 최고의 개가를 올렸다. 헤겔 철학은 이후 러시아 철학의 전개상에서 반헤겔주의(슬라브주의)와 친헤겔주의(서구주의)로 양분될 지경에 처하게 되었으나, 이 두 가지 사조의 발생과 전개에 공통의 원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러시아 근대 사상의 진정한 수원(水源)이라 부를 만하다. 1840년대 ‘헤겔에 대한 탐닉’을 회고하며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이렇게 진술한 바 있다.

“헤겔의 책들은 끊임없는 토론거리였다. 『논리학』 3부작이나 『미학』, 『엔치클로페디아』 등 그 어떤 책이라도 며칠 밤이고 계속되는 격렬한 토론의 훌륭한 주제가 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절대정신’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절친하던 이들이 몇 주간이고 서로를 피해 다녔으며, ‘절대적 인격성과 본질 그 자체’에 대한 의견이 비판당하면 그것을 개인적 모욕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베를린 혹은 어느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에서 발간된 책일지라도 독일 철학책이라면 모조리 주문해서 낡아 떨어질 때까지 탐독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곤 했다. 더구나 책 속에 헤겔의 이름이 언급되기라도 할라치면 그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헤겔에 대한 열광이 아무런 근거 없이 불쑥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헤겔 이전에도 서구의 다양한 사상과 이론이 1820년대부터 러시아에 이입되기 시작했으며, 그 중에서 셸링과 낭만주의는 이미 러시아 사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이후 온통 마비되었던 정신적 삶에 서구의 철학이 일종의 보상적 기능을 담당한 게 사실이며, 러시아인들의 내면으로부터 참된 삶, 진정한 현실에 대한 동경과 욕망이 발생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마도 그런 추구들조차 다만 서구화의 산물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1830년대 초반 러시아에서 철학적 인식은 자유로운 삶과 직결된다고 생각되었으며, ‘스탄케비치 서클’로 알려진 일군의 대학생들은 그런 철학이 최고로 발전된 형식으로서 헤겔주의를 열렬히 받아들였다. 자유로운 삶을 위한 철학으로 헤겔이 유일한 것도 아니었으며, 니콜라이 스탄케비치의 무리들이 유독 두드러진 것도 아니었으나, 헤겔이 불러일으킨 철학에의 관심이 다른 어떤 서구의 사상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음은 분명하다. 헤겔을 찬양하든 혹은 지독히 증오하든 러시아의 근대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헤겔과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헤겔과 맞서 싸우지 않고서는 근대를 사유할 수조차 없었다. 곧 헤겔주의는 이 시대의 러시아인들에게 서구의 표상, 또는 말 그대로 근대성 자체였던 셈이다. 이 점에서 비사리온 벨린스키도 전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2009/09/18 11:37 2009/09/1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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