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라, 당신의 불행을 모두 벗어 버릴 때까지

엄상미 (막달레나공동체)

“그 돌에게 이야기하고, 이야기하고, 그러면 그 돌이 이야기를 듣고 그 말을, 비밀을 모두 빨아들이다가
어느 날인가 탁 깨지는 거야. 산산조각 나는 거야.
그렇게 되는 날, 이야기한 사람은 모든 고통에서,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거야…”
(『인내의 돌』,  118~119쪽)

오래전, 성매매 피해여성을 지원하는 필리핀의 여성단체들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당시 필리핀에는 성매매 피해여성을 지원하는 활동에 있어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진보적인 여성단체 혹은 종교단체들이 꽤 많았다. 우리는 주로 ‘제3세계 여성의 착취와 억압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조직’에 소속된 단체와 시설들을 방문하였다. 우리와 같은 처지의 방문객들이 귀찮을 법도 한데, 그곳의 사람들은 참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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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관련된 단체들을 방문할 때마다 당혹스러운 경험을 해야만 했는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환영 리셉션이 끝나면 성노예로 살았던 여성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희망적 대안을 고민해 보고자 떠났던 여행이었기에, 굳이 그런 프로그램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누누이 말해도 여성들은 괜찮다며 자신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주저 없이 말했다.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생전 처음 만나 낯선 이들 앞에서 자신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가.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우리는 평소에도 혹여 그와 같은 일로 마음 상하는 여성들이 있을까 세심하게 신경을 쓰곤 했던 터였다. 그래서 더욱 필리핀에서의 그러한 자리가 불편하고 민망스러웠다. 마치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온힘을 다해 성의껏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고통스럽지만 끝내 입 밖으로 자신의 아픔을 끄집어내는 그들을 보며 우리가 오히려 그 여성의 고통에서 헤어져 나오지 못했다.

나는 참 궁금했다. 왜 그렇게 낯선 이들 앞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지 말이다. 그게 손님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에 연출되는 일련의 과정이라면 그것처럼 잔인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런 마음이 전달이라도 되었는지 그런 시간을 유독 불편해하는 우리들에게 그곳의 여성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을 대접하기 위한 게 아니야.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말하는 거야. 내 입으로 내가 겪은 일을 말하다 보면, 우리는 조금씩 더 치유가 될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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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험은 필리핀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성구매 행위를 하다 단속에 걸린 남성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의 재범방지 교육프로그램인 ‘John school'에는 이른바 'Female A', 'Female B', 'Female C' 등으로 명명되는 성판매 여성들이 등장하여 강의를 한다. 성매매 관계에서 그 여성들이 겪은 착취적인 경험들(「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 등장하는 세라가 익명의 공간에서 불분명한 집단의 남성들에게 당했던 그러한 폭력의 경험처럼…), 그 경험 속에 무방비로 놓였던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낱낱이 이야기 한다. 자신들에게 그러한 고통을 안겨 준 바로 그 남성들 앞에서.

말함으로써 마음에 쌓인 상처는 더욱 가벼워질 것이고, 이런 과정을 통해 결국 여성들은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다. 피해의 유무와 경중을 떠나 자신이 겪은 고단한 삶, 특히 고통과 불행스러웠던 경험을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겪어 본 이들은 알 것이다. 그것은 묻어 두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고, 잊을 만했는데 헤집어 내며, 견딜 만했는데 또 다시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다.

그렇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외면하고 밀쳐 두었던 것을 과감히 끌어당겨 고통스러운 기억 혹은 고통스러운 현실과 당당히 맞서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상처나 피해라고 믿었던 것들을 비로소 직시하며, 보이지 않았던 힘겨운 짐을 덜어 내는 행위는 더 나은 삶에 희망의 토대가 된다. 그러니 고통의 경험을 지닌 혹은 고통에 놓인 사람들의 말하는 행위는 분노와 공격이 그 끝이 아닌 돌아보고 성장하기 위한 치열한 의례인 것이다.

여기 마치 필리핀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던 그 여성들처럼 말함으로써 결국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믿으며 상처와 비밀을 토해 내는 한 여성이 있다. 여자의 남편은 성전을 위해 지하드에 참여하던 중 의식불명이 되었고, 여자는 매일 같이 총소리가 들리는 마을 한 복판에서 그 남편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여자는 사명처럼 알라에게 기도했다. 하지만 나직이 읊조리던 기도소리는 어느새 남편을 향한, 세상을 향한 분노로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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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상처를 가슴속에 묻고, 쌓아 두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처음에는 가슴속에 쌓아 두었던 이야기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스스로 귀신들린 행위, 코란에 위배되는 추악한 행위라고 여기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자신이 쏟아 내는 분노가 거세질수록 여성은 누워만 있는 남편이 결국은 자신의 생게 사브르, 즉 ‘인내의 돌’이라고 믿게 된다. 인내의 돌이란 ‘말 못할 비밀을 털어놓은 사람을 해방시켜 준다’는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검은 돌이다.

모든 고통과 비밀을 빨아들여 나중에는 폭발하여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돌. 역설적이게도 여자는 긴 세월 자신의 몸을 더러운 존재로 무시하며 단지 고깃덩어리로 취급하던 남편을, 그러나 지금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 죽어 있으나 살아 있는, 살아 있으나 죽어 있는 바로 그 남편을 인내의 돌이라 믿는 것이다. 그리곤 결심한다. 자신의 고통과 불행을 모두 벗어 버릴 때까지 당신에게 모든 걸 다 말하겠다고, 그리곤 결국 해방 될 것이라고.

여자는 이야기 한다. 단 한 번도 남편에게서 성적 즐거움이나 인간적인 존중을 느낄 수 없었으며, 몸에 귀 기울이지 않고 공허한 분노에만 충실하고, 그것이 곧 신의 뜻인 양 변명하는 겁 많은 남자들의 모습에서 역겨움을 느꼈노라고. 긴 세월 시아버지의 노리개로 살다 그의 ‘골통’을 깨부순 뒤 ‘유곽’에서의 삶을 택한 여자의 고모는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전쟁을 벌이는 거라며 조롱한다. 마침내 여자는 그동안 간직하고 있던 비밀마저도 다 털어 낸다. 그렇다면, 그 여성의 인내의 돌은 드디어 폭발했는가, 하여 해방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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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作 <부서진 기둥>
_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은 그녀의 "절규와도 같은 고백" 같다. 그녀에게는 그림이 처절한 상처와 고통을 고백하는 '생게 사브르'가 아니었을까?

자유를 갈망하는 “절규와도 같은 고백”은 아름답지만 언제나 아리다. 그 처절한 고통 뒤에 찾아오는 해방이 때로는 참혹할 수도 있다면... 불행스럽게도 그것은 여전한 현실이다. 그래서 더욱 아리다. 하지만 나는 말함으로써 삶을 성찰하고 결국 스스로를 해방시킨 숱한 여성들을 만났으니, 분명 그것이 절실한 살림의 행위임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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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카니스탄의 어느 곳 아니면 다른 곳에서’라고 했듯 필리핀이건 샌프란시스코이건 한국이건 아프리카이건 그 어떤 땅에서건 여성들은 오늘도 자신만의 ‘인내의 돌’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갈망한다. 저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말들, 수천 년 틀어막아 놓았던 이야기가 터져 나오기를. 길을 걷다 혹은 누군가와 사랑을 속삭이다 그와 같은 소리가 들리거든 온 마음을 다해 다만 함께 들어라. 그리고 나지막하던 이야기가 끝내 함성이 되고 절규가 되어도 귀를 막지 마시라. 혹시 당신이 생게 사브르, 그 인내의 돌일지도 모르니.  

“거리로 가라! 가서 네 비밀을 그 돌에게 다 털어놓으렴. 그 돌이 부서질 때까지... 네가 고통에서 벗어날 때까지…”
(『인내의 돌』,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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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3 10:52 2009/09/2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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