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황금시대」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돈을 주제로 하는 10편의 단편을 엮은 옴니버스 영화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돈과 얽혀서 사람들이 어떤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섬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곳들에서 ‘줄’들이 뻗어 나오기 시작해, 나중에는 촘촘하게 엮인 ‘그물’로 우리의 일상과 사회를 보여 주고 있는 옴니버스 영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돈'에 대한 태피스트리, 영화 「황금시대」

여기 옴니버스가 한 편 더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주제를 다룬 10편의 글들을 모은 『일본비평』입니다. 상징천황제에서 시작해 옴진리교, 에반게리온, 원자폭탄, 노사관계를 거쳐 재일 조선인들의 민족무용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일본비평』 창간호의 글들은 ‘현대 일본’이라는 촘촘한 태피스트리를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습니다. 이 『일본비평』이라는 잡지를 만들기 위해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와 그린비출판사는 작년 8월에 처음 만났습니다. 보통의 학술지는 ‘연구소’의 성과를 출판사가 ‘받아서’ 내는 것인 반면, 『일본비평』은 처음부터 출판사의 적극적인 참여를 전제로 하여 탄생했습니다. 학술적인 성과들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연구소와 출판사는 여러 번의 편집회의와 논의를 거쳤고, 이제 1년 동안 고민한 성과물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비평』 창간호의 본격적인 편집 작업을 진행하면서, ‘전후 일본’이라는 ‘세계’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맥아더와 천황의 ‘결혼사진’을 찾아 헤매면서, 도쿄대공습(미국이 태평양전쟁 말기에 도쿄에 가한 이 공습으로 약 15만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의 참상을 기록한 글들을 읽으면서, 원폭이 떨어진 현장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린 젊은 여인의 사진이나 김일성의 사진을 걸고 낙성식을 하고 있는 재일조선인 학교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면서, 또는 천재 무용가라 칭송받던 최승희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하나하나의 장면을 구성하게 되고 어느 순간 ‘전후 일본’은 총체로서 눈앞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태피스트리의 메인 테마는 ‘현대 일본사회의 형성과 미국’입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변화가 예상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친미적인 국가를 꼽으라면 일본이 꼽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건 참 이상한 일입니다. 때로는 ‘민주주의 강대국’ 미국을 동경에 차 바라보면서 각종의 사절단을 보내 미국을 배우고 받아들이려 하기도 했지만, 결국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 치열하게 맞붙어 싸워 일본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준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도쿄대공습의 참상(좌) 그리고 맥아더와 히로히토 천황(우)

원자폭탄이라는 사상 초유의 대량살상으로 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희한하게도 일본은 친미국가로 변모합니다. 동아시아에 강력한 반공의 보루를 확보하는 대가로, 미국은 천황의 사면과 군사적 보호를 약속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생살여탈권을 쥔 미국의 보호 아래에서 경제 성장에 매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일본은 심리적으로도 친미적인 국가로 거듭납니다. 피폭 직후에 비등했던 미국에 대한 분노는 핵무기 반대와 보편적 평화 추구라는 힘없는 언설로 사그라지고 마는데, 이 과정은 일본이 적이었던 미국을 어떻게 내면화하는지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전후 일본의 준거점은 미국이었습니다.  ‘스피리추얼리티’(일본의 하토야마 신임총리의 부인이 이 ‘영성’의 사상에 심취해 있다네요^^)를 포함하는 일본의 신종교는 다분히 미국의 종교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미군정의 종교정책이 그 신종교의 기원이 된다는 점에서 ‘미국적’입니다. 또 미국의 노사관계를 배운다는 취지로 파견된 각종 ‘시찰단’과 미국의 주도하에 시행된 ‘생산성향상 운동’은 일본의 경제가 미국의 영향하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쉽게 친미를 내면화하면서 점점 더 강력해진 ‘친미국가 일본’은 굳이 아시아를 상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아시아에 있었지만, ‘탈아입구’(脫亞入歐)에서 ‘탈아입미’(脫亞入米)로 곧장 건너뛰어 버린 일본에게 아시아를 볼 여유는 없었던 겁니다. 천황이 사죄를 해야 할 대상은 ‘유일하게’ 미국뿐이었고, 아시아는 여전히 미개한 지역이자 ‘경제적 정복전쟁’의 점령지로만 인식해도 무방했습니다. 어차피 살고 죽는 문제는 미국에 달려 있었으니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본 민주당 정권
_ 2009년 8월 30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가 중의원 총선 당선자의 이름 이름 옆에 붉은 종이 장미를 달아 민주당의 승리를 나타내고 있다. 이날 일본은 5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게 됐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미국은 예전만큼의 정치적·경제적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중국은 점점 더 강력한 글로벌 파워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민주당 정권의 등장은 어쩌면 이런 국제정세의 반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 등장한 일본의 민주당 정권은 미국과는 거리를 두고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동아시아 공동체를 논의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탈미입아’(脫米入亞)하는 일본의 자세는 일면 바람직해 보입니다. 과거에 대해 성찰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고, 그런 움직임은 분명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민주당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미일동맹에 대한 재고와 맞물려 있는 ‘헌법 9조’의 개정 문제로 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를 갖지 않겠다는 ‘헌법 9조’를 개정하고,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었을 때, 동아시아의 군비경쟁에 불이 붙을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후 일본’이라는 존재는 곳곳이 역설입니다. 적이 곧 구원자이고, 정치적 종속이 곧 경제적 번영이며, 보통국가로의 도약이 곧 동아시아에 새로운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는 행위인 역설. 이런 역설은 아시아인이면서 서구인이 되고자 했던 일본, 점령당한 자이면서 점령하는 자가 되고자 했던 일본이라는 근대의 역설들이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본의 ‘역설’들은 동경의 대상이자 분노의 대상으로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이되어 있습니다. ‘비평은 자기 자신의 근거를 묻는 것’이라는 가라타니 고진(柄谷善男)의 말처럼 『일본비평』에서 살피고 있는, 역설적인 일본의 모습은 동시에 우리가 처한 역설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겪기도 했고, 전후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만을 바라봐 온 한국,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온갖 희생을 무시한 채 받아들이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순과 위험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일본비평』이라는 태피스트리를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편집3팀장 박순기
알라딘 링크
2009/10/13 11:23 2009/10/13 11:23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761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OpenID Logo 토깽엄마 2009/11/15 15:24

    흠~ 관심가는 책이네요. 창간호라 더 읽어보고 싶군요.. 잘 보고 갑니다

    • 그린비 2009/11/16 09:38

      토깽엄마님, 안녕하세요.
      『일본비평』에 대한 관심 감사합니다. 꼭 읽어봐 주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