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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때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에 갔다가 처음 만난 1년 후배 S는 유년기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후 양쪽으로 목발을 짚고 다니는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에, 써놓고 나니 역시나 어색하네요. 저는 그 친구가 ‘지체장애인’이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살았으니까요. 물론 그 친구가 자기 나름대로 일상의 일들을 처리하는 방법에 많이 숙달되어 있었고(처음 저녁 먹을 때 목발 짚고 식판 받는 걸 보고 당황하여 용기를 내서 괜찮다는 걸 억지로 식판을 들어 줬는데, 나중에 보니까 정말 혼자 너무 잘하더라니까. 술은 나보다 더 잘 먹었... 아, 이건 아닌가?), 그 녀석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도 한몫했겠지만, 어쨌건 우리 과의 친구들은 그 친구의 존재로 인해 장애와 장애인에 관한 이런저런 선입견을 많이 지워 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딱히 다르게 볼 필요 없잖아? 응, 뭐 혹시라도 조금 불편한 게 있으면 배려해 주면 되는 거고 말이야. 아, 물론 사회적 시선이라는 게 아직 좀 그렇긴 하지만 차차 나아질 거야. 제도나 정책 같은 것도 함께 나아지겠지. 유남생(Do you know what I am saying)? 암쏘쿨! 데헷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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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동권연대 집회
_ 2003년 장애인이동권과 관련하여 광화문역 선로점거 혐의로 구속되었던 김도현 선생님의 석방과 장애인이동권 쟁취를 위한 집회입니다. 지금은 지하철마다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고 저상버스도 눈에 많이 띄는 편이지요. 이 모든 것들이 장애인 분들의 엄청난 투쟁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서울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더러 요즘엔 예산이 삭감되어 이마저도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헐거운’ 인식만으로는 이 사회가 한 치도 진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라고 왜 몰랐겠습니까. 다만 제가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외면 혹은 회피해 왔던 것이지요. 그리고 저는 저 같은 쉬크가이(네, 갈수록 태산입니다?ㅋ)의 우둔함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몸소 등장하신 이 책 『장애학 함께 읽기』를 편집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메시지는 ‘장애란 사회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자 선생님께서 단지 그 사실만을 밝히기 위해 이렇게 한 권의 책을 쓰시지는 않았을 테지요. 이 책에는 그렇게 ‘장애를 양산해 내는 사회’의 변혁을 위해 그것을 자기 문제로 받아 안고 끊임없이 고민해 나가는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차차 나아질 거야’라는 ‘쉽게 뱉는 말’이 가능했던 건 이러한 분들의 고민과 노력이 있(어 왔)기 때문이라는 점을, 그동안 제가 얼마나 자주 잊어 왔는지 반성하게 되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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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선생님
초교가 끝날 즈음, 선생님과 간단히(과, 과연 간단했을까?;;) 술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상 깊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장애운동을 하시는 데 요즘 제일 힘드신 게 뭔가요?”라는 질문에 되돌아온 대답이었습니다. 뭐라고 대답하셨을 것 같나요? 사람들의 편견? 좀처럼 변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나 정책? 조직 역량의 약화? 혹은 관성화되어 가는 스스로가 두렵다거나 뭐 그런 버라이어티한 답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근데 말입니다. 정답(?)은 이겁니다. “벌금이요.”

소위 ‘불법 폭력 시위단체’에 대한 형사고발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은 다들 들어 보셨을 겁니다. 선생님께서 활동하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http://sadd.or.kr)는 그 성격상 피치 못하게 점거농성이나 기습시위 등 현행법의 범위를 초큼 벗어나는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타격이 크다고 합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선고받은 벌금이 숫자 일곱 개도 아니고 숫자 여덟 개로 이루어져 있더라고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기본이 선고유예, 옵션이 집행유예였는데, 요즘에는 저런 단계들을 약물 먹은 우사인 볼트마냥 냅다 달려 버리고 다이렉트로 벌금이 선고된다고 합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들조차 무시하는 어쩌고저쩌고……” 하는 수사와는 또 다르게, 간장 묻힌 마른 김을 묵묵히 삼키시며 다이렉트로 말씀하시는 “벌금이요”를 들으니 뭐랄까, 지배층의 전략이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뿐 아니라 현실의 차원에서도 ‘지대로’ 먹혀들고 있다, 아아, 진짜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덜컥 숨이 막혀 왔다고나 할까요.

그 다음날부터 저는 당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후원금을 내기 시작, 한 건 아니고요, 사실 이 책을 검토하고 담당하게 되면서부터 내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처음 후원을 신청할 때에는 이 책을 편집하게 된 편집자로서 저자에게 갖추는 예의라는 측면이 강했고, ‘뭐 좋은 일이니까’ 하는 식으로 편하게 생각한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편집을 진행하며 점점 이 책의 이야기들이 마음속과 머릿속에 쌓여 가는 동안, 제 마음속에서는 그 얼마 안 되는 후원금이 저로부터 사회로, 진보로, 연대로 뻗어나가는 가느다란 실 같다는 느낌이 강해졌습니다. 이 분들께서 하시는 운동이 단순히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한 것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진보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말이지요.

진보라는 것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는, 그저 객관적인 눈보다는 내딛는 발, 내미는 손이 중요하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그리고 빠져나가는 CMS도 무지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편집하면서 새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자유로워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 편집부 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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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4 14:31 2009/09/2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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