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는 2008년 금융위기에 끝났다!"

Luna (중국 복단대)

중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인 왕후이의 신작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别求新声)』가 출간된 이후 <신경보(新京报)>(2009년09월05일자)에서 기획한 인터뷰를 소개한다.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는 『독서』잡지의 주간을 맡은 10여 년 간의 인터뷰를 모은 것으로 근대성 비판, 전지구화, 사상사 및 중국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전해들을 수 있다. 『뉴레프트리뷰』와의 문답(신비판정신), 페리 앤더슨(신좌익, 자유주의, 사회주의), 가라타니 고진(동아시아 공동체의 가능성), 코모리 요이치(탈정치화된 일본정치와 수사학), 레오 어우판 리(문화연구와 지역연구), 미조구치 유조(중국 없는 중국학이란 무엇인가), 벤저민 앨먼(“누구”의 사상사인가) 등 다양한 학자들과의 이 대담을 모은 이 책은 곧 한국어로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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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이,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别求新声)』, 북경대출판사, 2009년 3월


『탈정치화의 정치: 단기 20세기의 종결과 90년대』에서 밝혔듯이, 그는 "90년대"라는 말과 "1990년대"를 조금 다르게 쓰고 있다. "1990년대"가 단순한 시간개념이라면, "90년대"는 시장경제의 형성과 그로 인해 일어난 복잡한 변화를 그 특징으로 하는 가치개념을 함축한 용어이다. 그는 '"90년대"가 1989-1991년의 세계적인 거대한 변화를 거치면서 탄생했다."고 판단한다. 밖으로는 공산권의 몰락, 안으로는 천안문사건 등을 염두에 두고 이전 시기와는 다른 맥락에서 90년대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90년대”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시장 시대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새로운 특징이 국가와 사회의 면모를 바꿔 놓았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이 낯선 시대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7~2008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은 “90년대”가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는 한 시대의 끝일 뿐 아니라 한 사조의 종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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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이와의 인터뷰
_ 왕후이는 학술계에서 풍향계의 역할을 맡아온 인물이다. 특히 1996년 『독서』잡지의 주간을 맡은 이후 매번 논쟁의 초점이 되어 왔다.

그의 학술 : 학술의 변화는 우연적이면서 필연적인 것이었다

Q: 당신의 글은 제공되는 정보량이 굉장히 많고 제시되는 문제 또한 아주 복잡합니다. 일전의 『현대중국사상의 흥기』도 그렇고 새로 출간하신 인터뷰집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글을 읽고 쓰시는지요?
A: 연구하는 방식이야 다들 비슷비슷하겠죠. 먼저 기본적인 자료와 관련 연구성과를 읽은 후 문제의식이 심화됨에 따라 발견되는 새로운 자료들을 읽어 갑니다. 『현대중국사상의 흥기』는 집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죠. 언급되는 문제나 관련된 분야가 다양하여 끝없이 수정해야 했습니다. (특별한 점은 없고) 그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계속하여 독서와 사유를 계속하도록 자신을 독려하고 여러 대화상대를 찾으려 합니다.

Q: 문학평론으로 학문을 시작하셨습니다. 박사논문인 <절망에 대한 반항>은 루쉰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펼쳐 지금까지도 전범적인 작품으로 읽힙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 사회 정치 경제 비판과 역사연구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이번에 출간하신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의 인터뷰 또한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요, 원래의 학술적 배경과는 상당히 멀어진 것 같습니다.
A: 그렇습니다. 박사과정을 졸업한 뒤 루쉰 연구는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루쉰으로 박사논문을 쓰면서 그 시대의 사상과 사회적 변천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캉유웨이, 옌푸, 량치차오, 장타이옌 등은 모두 루쉰을 연구할 때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요, 지나고 보니 이제는 이들이 제 연구대상이 되어 있더군요. 중국 사상 뿐 아니라 루쉰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서구와 러시아의 사상가, 문학가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일의 니체와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 등이 대표적이죠. 제가 중국사회과학원 박사과정에 있을 때, 철학, 종교, 문학, 역사, 사회학 등 전공이 제각각인 박사반 20명 정도가 한 건물에서 살았어요. 그 중 절반 정도는 경제학과 관련된 전공이었죠. 동학들끼리 틈만 나면 서로 토론하고 배우면서 지냈어요. 당대 중국에 대한 저의 관심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격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사조 : 중국을 사유하려면 이론적 정합성도 필요하지만 실천적인 논쟁도 필요하다

Q: 선생님의 연구 중 상당 부분이 20세기 중국사상사에 대한 것입니다. 각종 이론들 간의 긴장관계를 파고들며 20세기에 대한 사유를 진행하고 계신데요, 그간 어떠한 소득이 있으셨는지요?
A:  시대마다 그 시대의 사회 사조가 있습니다. 단, 이론과 실천이 맺고 있는 관계는 해당 시대 자체에 가장 풍부하고 깊이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사” 시기의 백화문 토론이나 동서문명 논쟁, 사회주의 논쟁 등에서 30년대의 중국사회사 논쟁 및 뒤따라 전개된 역사연구와 이론 논쟁 등 거의 모든 이론과 논쟁이 사회적 실천의 와중에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한 반향이 새로운 이론적 토론으로 발전해 갔구요. 이런 식의 흐름이 칠팔 십년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Q: 80년대 이후 어떠한 변화가 있었나요?
A: 80년대 중반부터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론적인 논쟁이 갈수록 약화되었죠.  80년대 중후반 이후에 사회주의 역사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면서 사회범주 내부의 이론 논쟁과 정치 사회의 변화가 맺고 있던 관계가 변경되었던 듯 합니다. 이론적 논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80년대 중반 이후 대규모로 이루어진 서양이론의 번역과 그로 인해 수입된 관련 사조는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 시기의 이론 논쟁과 비교해 볼 때 이론성이 상당히 약화되었고 사상이 변화하는 방식도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Q: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A: 20세기의 이론 논쟁은 특정한 정치 과정 속에서 전개되어 왔는데, 많은 부분에서 전환이 일어난 오늘날은 사상 논쟁이 정당과 국가의 테두리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상 논쟁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사회형태의 전환 과정에서 이미 발생한 정치적 전환을 홀시할 수 없습니다. 90년대의 사상 논쟁은 이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그런 논쟁과는 완전히 양상을 달리합니다. 그렇다고 이데올로기의 강도가 약해진 것도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은폐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데올로기가 “허구적 의식”이라는 걸 누구나 안다면 진정한 이데올로기가 아닐 테니까요.

사조의 종결 : 두 차례의 위기가 사조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Q: 당신 또한 90년대 이후 이데올로기 논쟁에 개입했습니다. 1997년  <오늘날 중국의 사상 동향과 근대성 문제>가 발표된 후 많은 토론과 논쟁을 일으킨 바 있는데요, 지금 되돌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A: 그 글에서 저는 계몽주의, 민족주의, 신유가, 포스트모더니즘 등 중국 사상계의 모든 유파를 분석했습니다. 주된 논지는 외면상 굉장히 다르고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각각의 사상이 공유하고 있는 전제, 특히 그들이 근대화 이데올로기와 맺고 있는 관계를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관련 때문에 당대 중국사상이 당대 문제를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합니다. 당대 중국은 이미 전지구화의 과정 내부에 들어와 있습니다. 따라서 시각을 새롭게 조정해야만 현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논문이 전지구화와 근대성 이데올로기에 대해 견지한 비판적 태도는 당대 문제를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열어 주었습니다. 반발은 예상했지만 그토록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Q: <오늘날 중국의 사상 동향과 근대성 문제>는 많은 논란과 비판을 받았는데, 1997년 동남아 금융위기와 관련이 있습니까?
A: 90년대 중반, 전지구화가 중국 지식계의 화두로 막 떠오를 때 금융위기가 닥쳤습니다. 당시 저는 황핑(黄平)과 함께 『독서』잡지를 편찬하면서 관련된 논의를 발굴하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국내 학술계에서는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듯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외국과 홍콩의 몇몇 학자들에게 글을 부탁하여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최소한 당시에는 중국 지식계에서 제대로 된 분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 글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면 아마도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금융위기가 지나자 마자 1999년 코소보 사태가 일어나고, 2001년 “9•11”사건과 그에 뒤따른 아프간 전쟁 및 이라크 전쟁이 발발합니다. 2008년의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90년대의 사조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2008년이 90년대 사조가 끝난 해라고 생각합니다.

Q: 십여 년간 지속된 그 논쟁에서 매체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A: 기본적으로 매체는 주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문에서 벌어진 사상 논쟁은 특정 논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사회문제를 그들의 틀 안으로 구겨 넣어 논의를 진행하곤 하는데, 이 또한 신문에서 벌어진 “사상”논쟁이 “사건”과 어긋나는 원인의 하나입니다.

사상 논쟁 : 논쟁이 공공정책의 재조정을 촉진시키다

Q: 그 사상 논쟁이 십여 년 간 지속되면서 지식계에 어떠한 공헌을 하였습니까?
A: 90년대 중국 지식계에 논쟁이 지속되면서 일련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정말로 제대로 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비판적인 지식인들입니다. 제가 “비판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주류의 위치에서가 아닌 “다른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전지구화에서 제국주의 전쟁까지, 삼농위기(농촌, 농업, 농민), 의료체제 개혁의 위기에서 생태위기 및 발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이 일련의 문제는 우리 시대의 중심적 화두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지식인들이 이런 문제를 제기했을까요? 과거 십여 년의 사상 논쟁을 돌아볼 때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어떤 논쟁이 아쉽다고 생각됩니까?
A: 두 가지 정도를 들어 보겠습니다. 국영기업 개혁 문제는 2005년 전후에 화두로 떠오른 문제인데, 그 즈음에 큰 틀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일찍이 90년대 중반에 추이즈위안이 러시아의 자발적 사유화를 예로 들어 사유화 과정이 러시아에서 이미 조성되었고 중국에도 곧 닥칠 문제임을 분석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식계에서 주로 떠받들던 방식이 러시아 모델(얼마 후 체코나 폴란드 같은 동구 모델로 변했습니다만)이어서 그런 식의 분석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생태위기의 중시와 발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당시 제가 존경하던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독서』에서 그런 글을 발표할 필요가 없다.그런 건 선진국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 년도 지나기 전에 생태위기의 심각성은 누구나 동의하는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Q: 지식계의 일방향적인 여론이 개혁의 복잡성을 가중시켰다고 보십니까?
A: 과거 십여 년간 삼농문제, 의료체제, 생태위기, 국영기업 개혁 등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은 공공여론의 화제를 변화시켰습니다. 시간단위를 조금 확장시켜서 살펴 보면 이러한 논쟁은 공공정책의 재조정을 촉진시켰습니다. 공공 여론과 정책의 재조정 사이에서 나타난 이런 상호적 관계는 중국 사회에 잠재하고 있는 민주적 가능성과 함께 어떤 불안정한 메커니즘이 존속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2년 전 제가 『독서』잡지를 떠날 때, 삼련서점의 전임 고위간부가 그러더군요. 『독서』가 유발한 논쟁이 너무 많아, 그건 좋은 일이 아냐! 라고 말입니다. 그건 아마도 대부분의 간부들이 품고 있는 생각일 겁니다. 논쟁을 걱정하죠. 그런데 만약 논쟁이 없었다면 공공정책의 제정은 일부 이익집단에 의해 주도되었을 겁니다.

Q: 전지구화, 시장화에 대한 90년대 지식인의 낙관적 견해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여러 방면에 관련된 문제이겠지만, 두 가지 점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첫째, 그렇게 맹목적인 낙관이 중국이 마주하고 있는 도전과 위기를 감춰 줍니다. 둘째, 모든 문제, 특히 초창기 30년에 벌어졌던 일들을 “과거”로 귀결시킵니다. 이는 중국이 20세기에 펼쳤던 실험을 전혀 사고할 수 없게 만들며, 또한 중국이 개혁개방의 와중에서 얻게 된 성취를 해석할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역사에서 벌어진 각종 비극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사유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의 역사과정을 간단히 부정해 버린다면 기본적인 역사적 평가에 혼란만 가중될 것입니다. 지식계의 논쟁 중 식민주의에 대한 변호, 제국주의 전쟁을 부추기는 듯한 논조가 생겨난 것도 거의 모두 이런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금융위기 : 위기가 제공한 새로운 사고와 선택

Q: 이번 금융위기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A: 전세계 사람들이 금융위기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쪽 방면으로는 제 친구들이 저보다 더 깊이 있고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관찰하고 있을 겁니다. 금융위기는 금융의 위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주로 시장 구제, 성장, 수출, 외화 보유고, 증시, 부동산 문제 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번 위기가 다른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정치적 사유와 방향성을 선택하게 할 수 있을까요?
위기를 수치와 시장 문제로 단순화시키고 위기의 구조적 특징을 간과한다면 그것은 시장의 논리를 철저하게 합리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너지 문제, 생태 위기, 토지 문제, 노동권의 침해, 교육의 불평등,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에 의해 야기된 민족 모순 및 글로벌 경제 관계의 변화 등등, 이 모든 문제는 경제 위기가 단순히 경제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의미합니다. 위기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일부 경제전문가들의 대책성 해법에 국한되지 않고 금융위기를 둘러싼 더 다양한 논의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위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문제 : 중국의 성취와 어려움을 동태적으로 이해하자

Q: 당신은 논쟁 중에 맹목적으로 외국의 경험을 복제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 세계가 연계된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해 왔습니다. 간단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A: 중국사회는 다양한 사회적 힘과 역사적 전통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변화를 관찰하려면 이렇게 상이한 사회적 힘과 역사적 전통이 주고받는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개혁개방 초기에는 국가가 개별적인 이권들을 초월하여 효과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이른바 중성화된 국가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요? 그것은 사회주의 역사, 조금도 중성화되지 않은 역사에서 탄생한 겁니다. 그러한 역사적 토대 없이 생겨난 국가와 독립적 국민경제 체제는 개혁의 전제가 없습니다. 금융위기를 맞아 중국은 많은 도전과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사정은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편입니다. 제때에 대처를 잘 했고 또 위기 전에 이미 몇몇 부분에서 조정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삼농문제, 의료체제 문제, 금융체제 부분의 개혁은 모두 위기가 폭발하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조정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논쟁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혹은 상이한 힘, 상이한 역사적 전통이 힘을 겨룬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성취와 실패는 불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태적인 관계에서 중국의 성취와 어려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Q: 『현대중국사상의 흥기』는 당나라 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대에 걸쳐 있는데요, 이 또한 역사에서 중국문제를 해결할 자원을 찾으려는 노력인 건가요?
A: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는 서양에 의한 동양의 재구성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지식 영역에서 서양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사이드도 지적한 것처럼, 만약 비서방세계가 새로운 지식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항상 식민주의 지식의 틀 안에서 세계와 우리 자신을 관찰할 수밖에 없고 진보도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역사연구, 문화연구 및 다른 지식 영역에서도 기존의 틀 안에서 중국의 역사와 사회를 정리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연구와 대화를 통해 중국과 관련된 지식이 세계와 중국을 관찰하는 살아 있는 방법,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는 낡은 지식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른바 중국과 관련된 지식이 고립적인 것은 아니며, 중국/세계의 틀에 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국은 지금껏 역사의 변동 과정에서 상이한 장력으로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작업은 아주 제한적인 것이겠지만 탐색하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2009/10/16 16:34 2009/10/1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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