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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든, 하나의 세계를 열기 마련입니다. 이건 꼭 ‘고상하고 있어 보이는’ 책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테크 책도, 토익 책도, 무협지나 판타지도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습니다. 10억을 버는 신묘한 테크닉이나, 토익 900점을 넘는 속성 비법까지... 아니 어떤 만화책이나 판타지는 웬만한 철학책보다도 심오한 성찰을 담고 있기도 하지요. 이렇게 각각의 책들이 품고 있는 세계가 독서라는 행위와 만나게 되면, 독자의 머릿속에 혹은 독자의 가슴속에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혹 만개하기도 하고, 초장에 시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어쨌든... 한 권의 책이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모든 책을 좋은 책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개중에는 읽는 이에게 해가 될 뿐인 허위의식을 잔뜩 불어넣는 책도 있고, 실용을 가장한 체 굴종의 정신을 설파하는 책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책들이 사회적으로 점점 더 많은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책에 구체적인 모습을 부여하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편집’이라는 장(場) 또한 치열한 쟁투의 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편집자, 책과 저자 뒤에 숨어서 오직 책으로 세상과 대화해야 한다고 여겨졌던 편집자들이 이렇게 블로그를 열고 글을 쓰는 것은 바로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책’이 더 많은 독자들의 가슴속에서 만개하기를 소망하고 그것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간 『붉은 벨벳앨범 속의 여인들』의 소개를 위해 ‘양지’로 나오는 데 대한 너무 긴 변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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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는 계집 '창'」

『붉은 벨벳앨범 속의 여인들』이 무사히 출간되어 시장에 나간 날, 임권택 감독의 「노는계집 ‘창’」을 오랜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삼순이 아빠로 등장하는 배우가 등장하더군요. 업소에서 ‘곤조’를 부리다가 여성들에게 뭇매를 맞는 역할이던데. 그 자상해 뵈던 삼순이 아빠가 저런 역할로도 나왔었다니...

하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그전에 이 영화를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마구 보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업주, 기둥, 펨푸(호객꾼), 아가씨. 이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집결지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여성들이 어떻게 빚을 지고 도망다니고 팔려다니는지. 그전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장면들이 하나하나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더군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붉은 벨벳앨범 속의 여인들』의 편집 작업을 담당하면서, 길게는 40년 넘게 집결지라는 공간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육성을 세 번이나 정독했으니 말입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까지는 아니더라도, 세 번만 읽어도 영화 속 세계를 보는 눈이 확 달라지더군요. 역시 책은 세계를 열어주는 창입니다. 『붉은 벨벳앨범 속의 여인들』이 열어주는 세계는 바로 ‘성매매집결지’라는 공간이었구요.

그간 음습한 욕망의 대상이거나, 편견의 대상일 뿐이었던 성매매집결지는 이 책에서 다르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집결지의 여성들과 함께 해온 막달레나공동체가 기획한 이 책의 인터뷰들에서 용산집결지는 여성들의 삶이 이어지는 공간으로, 한 가지 모습으로 재단할 수 없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들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피해자’ 혹은 ‘타락한 여성’과 같은 단일한 이름으로는 불릴 수 없는 복잡한 삶의 모습이 성매매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터뷰를 진행한 연구자들이 이 책을 통해 가장 중요하게 하고 싶었던 말도 바로 법과 정책 집행 과정에서 이런 다양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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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이 (신은경 분)

「노는계집 ‘창’」에서 볼 수 있었던 비극적인 정서 또한 이 책에서는 다르게 표현됩니다. 물론, 생활고와 병마로 힘겨운 여성들이 많지만, 그런 중에도 대부분의 여성들이 동료들과의 우정과 장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결지 여성 모두가 영화 속의 방울이(신은경 분)처럼 주위에 아무도 없는 고독한 말년을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붉은 벨벳앨범 속의 여인들』의 편집 작업을 진행하는 내내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바로 ‘역사’라는 문제였습니다. 성매매 공간에서 아가씨로, 펨푸로, 업주로 수십 년씩 살아온 여성들의 개인사가 모여 용산집결지의 역사를 이루고, 또 그 역사가 근대화가 숨 가쁘게 진행되던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보여줍니다. 여성들의 이야기 속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도 언급되지 않지만, 박정희부터 노무현까지의 세월을 살아온 이들의 역사는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어떤 이들이 배제되고 억압당했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아니 오히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배제되고 억압당하는 현실에서 이 책의 인터뷰들은 현재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서 삶을 꾸려나가야 했는지를 절절히 토로하는 이 책의 이야기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어떤 희망이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 편집부 박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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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벨벳앨범 속의 여인들』- 용산 성매매집결지 삶에 관한 보고서
(사)막달레나공동체 용감한여성연구소 기획 / 김애령, 원미혜 엮음|갈래 : 인문,여성

발행일 : 2007년 10월 25일 | ISBN : 978-89-7682-702-9
신국판변형 (150×220mm) | 520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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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4 13:52 2007/10/2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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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penID Logo 강이 2007/10/24 17:51

    우리가 국정원 요원인가요?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다닛..

    • OpenID Logo 그린비 2007/10/25 12:58

      은근히 음지일 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