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주의·슬라브주의 논쟁사 (2)
― 벨린스키와 그의 시대 (상)


최진석 (수유너머N)

비사리온 벨린스키(Vissarion Belinsky, 1811~1848)는 중류 계급에 속했던 가난한 군의관의 아들이었다. 조선의 중인 계급이 그랬듯, 러시아에서 중간 신분의 사회적 지위는 미미한 것이었고, 벨린스키는 어린 시절 내내 가정경제의 어려움을 절감하며 성장해야 했다. 여기에 군대식 규율에 따라 통솔되던 엄격한 학교생활,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와 사회 도처에 만연했던 신분적 억압들은 그의 성격을 다소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조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뒤틀린 성장 배경과 함께 자라난 자유로운 삶에 대한 열망 및 진리에 대한 무한한 헌신에의 욕구는 벨린스키를 사회에 대한 맹목적인 반항아가 아닌, 냉철하고 타협하지 않는 투사로 키워 주었다. 물론, 이는 그의 탁월한 본성에 기인한 게 아니라, 그 자신도 믿었듯 철학적 이상주의에 의거한 ‘교육’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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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리온 벨린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_ 러시아의 대표적 문학비평가이자, 급진적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벨린스키.

러시아 최고의 대학임을 자부하는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의 창건자인 미하일 로모노소프(Mikhail Lomonosov, 1711~1765)도 원래 어부의 아들이었다가 신분을 속인 채 무작정 상경, 시(문학)와 과학에서 두드러진 재능을 보인 후 면천(免賤)되어 귀족의 지위로 올랐다. 어느 정도의 신화적 과장이 있음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근대 초기 러시아에서 대학은 신분 상승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음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상당수의 대학생들은 중간계급에서 나왔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1866)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학자금을 낼 형편이 되지 않아 중퇴한 인물로 나오는데, 소설 속 그의 친구들 대부분이 냄새 나고 초라한 단벌 신사요, 끼니조차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상태로 묘사된다. 이 ‘가난한 대학생들’은 대개 의사와 군인의 자식들로 중간계급 출신이며 수도가 아닌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이었다. 러시아 문화 지성사에서는 이들을 ‘잡계급인’(raznochintsy)이라 부르는데, 19세기 전반의 대표적 잡계급 지식인으로 꼽히는 벨린스키의 처지도 그들과 하나 다를 바 없었다.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번역 일을 제외하곤 그도 끼니를 거르는 것을 무기 삼아 경제적 빈곤에 대적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계급적·경제적 차별로 고통받던 지식인들에게 현실 문제의 근원은 비교적 명확해 보였다. 농노제과 전제정은 자유와 풍요의 계몽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철폐되어야 할 대상으로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생활고에 허덕이던 벨린스키는 장학생에 선발되어 간신히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지만, 『드미트리 칼리닌』이라는 실러풍의 비극을 지은 게 탄로나 1832년 퇴학 조치를 당한다. 퇴학의 표면적 사유는 ‘건강 문제와 학업 능력 미달’이었지만, 실제로는 농노제를 조소하고 전제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부르짖은, 다소 치기 어린 그의 작품이 대학 당국의 심기를 건드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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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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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설립된 모스크바 대학은 19세기, 러시아 문화의 중심부를 이루었고 출신계급을 망라하는 교육·연구 전통을 세웠다. 이미지는 1789년의 대학 중심 건물의 모습이다.

한편, 당시 모스크바 대학에선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이 대유행이었다. 확고부동한 자아의 의지를 강조하는 주의주의(主意主義)와 창조력이야말로 세계 형성의 진정한 원천이라고 주장한 셸링주의는 정신적 무력감에 시달리던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에게 매력적인 지적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셸링의 숭배자였던 모스크바 대학의 철학 교수 니콜라이 나데즈딘(Nikolai Nadezhdin)은 초기 벨린스키의 지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문학작품은 있어도 이렇다 할 만한 문학이론은 없던 그 시절에 셸링을 위시한 독일 철학은 벨린스키가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의 정수(精髓)로서 제시된 문학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전거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차아다예프가 「철학 서한」으로 러시아 지성계를 풍비박산 내기 2년 전, 그러니까 1834년 『망원경』에 기고했던 벨린스키의 첫번째 비평은 이런 철학적 이상주의로 무장한 젊은 지성이 당대 문학과 사회 현실에 대해 던진 최초의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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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린스키의 저작
벨린스키의 데뷔작인 「문학적 공상」은 무엇보다도 착상의 참신함과 기성 문단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주목받았다. 그것은 새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문학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요구를 천명한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근대 문학사의 대가들과 당대의 이름난 문인들을 일일이 거명해 가며, 러시아 문학이 외양상 화려하게 개화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 모두는 공허함을 면치 못하고 있노라 단언한다. 껍데기만 그럴듯하지 속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 문학이란 없다”라는, 당대 문단에 널리 유포되었던 절망적 테제의 진위 여부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문학은 없노라고 결연히 외칠 정도로 러시아의 지적 상태는 공허한 것인가? 19세기 유럽 정신사의 가장 강력한 표현 매체가 문학이었음을 상기한다면, 문학의 부재 또는 공허한 문학이란 테제는 당대 러시아 지식 사회에 대 놓고 침을 뱉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도대체 왜 그런가? 벨린스키는 말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로운 영혼이 고양된 산물이자 예술 하나만을 위해 호흡되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소거시켜 버린 미적 창작물로서 민중의 정신을 온전히 표현하고 재현하는 것이다. 로모노소프로부터 푸슈킨까지 모든 러시아의 천재들은 민중의 품으로부터 태어났고 교육받았으며, 민중의 삶에 따라 살고 호흡하였다. 창조적 작품에는 민중의 내면적 삶이 가장 내밀한 깊이에서 표현되어 있으며, 이러한 문학의 역사에는 비약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자연스런 발전의 결과이며, 러시아 문학은 동시에 프랑스 문학이나 영국, 독일의 문학이 될 수 없다.”

민중적 정신의 최고 표현 형태로서 문학은 당대 민중의 생활과 생생한 연관을 획득해야 한다. 독일 문학이 그토록 사변적이며 영국 문학이 그렇게나 실천적이고 이탈리아 문학이 그처럼 우미한 까닭은 그들 각각의 문학이 그 민중적 삶과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추어 러시아 문학은 어떤 상황인가? 예로부터 도대체 남들에게 내세울 문학이란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으며, 푸슈킨에 이르러 민족적 삶의 중요한 계기가 가장 아름다운 표현 형식을 얻었다고 이야기하지만(1799년생인 푸슈킨은 1837년 결투로 뜻하지 않게 사망한다), 그는 아직 서구를 모방하는 단계에서 멀리 벗어난 게 아니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이 그렇듯 러시아의 모든 문화적인 삶은 서구를 무작정 본받는 데서 시작했으며(‘비약’), 그 바탕이 되는 민중의 삶에 어느 하나도 단단히 뿌리를 박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벨린스키가 러시아엔 ‘아직’ 문학이 존재하지 않노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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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러시아의 민중적 삶

표트르 이래의 러시아가 외형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기형적 분열을 겪었다는 사실, 즉 민중적 토양과 귀족적 교양으로 이원화되었다는 사실에의 인식은 벨린스키가 차아다예프를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과 공통의 문제의식을 나누었음을 입증한다. 러시아 근대 문학, 아니 차라리 러시아의 근대는 단지 개명된 소수의 식자층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였고 민중 전체의 삶과는 거의 무관한 일이었다. 로모노소프 같은 예외적인 개인들만이 그 ‘근본적인 토양’에 접근할 수 있었을 뿐(그가 ‘어부’ 출신임을 기억하자), 대다수 귀족 지식인들의 허영에 찬 서구 문화 숭배는 러시아에 아직 근대(Modernity)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반증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문학, 그 본래의 정의에 부합하는 참다운 문학에 대한 요구는 곧 계몽에 대한 요구, 그러니까 더욱 가열찬 근대화에 대한 요구인 동시에 낯선 외래 형식의 분별없는 이식이 아닌 토착화에 대한 요청이 된다. 벨린스키는 거듭 역설한다. “앎(계몽)은 빛이요, 무지는 어둠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도 앎이요, 둘째도 앎, 셋째도 앎이다!”

서구를 무작정 추종하다가 그 패러디 꼴이 되었다는 벨린스키의 조롱은 서구화를 거부해야 한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서구)의 정수를 ‘우리’(러시아)의 본질로 삼자는 것, 서구(계몽)를 내면화하자는 가장 급진적 주장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것을 ‘여기’ ‘이 자리에’ 세워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극단의 보편주의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왜냐면 그가 내세운 ‘진정한 러시아’는 보편적 ‘이념’(근대성)과 러시아 ‘현실’이라는 특수성이 맞닿는 미래의 지평에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 당장으로서는 그 어떤 것도 계몽에 굶주린 벨린스키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의 이상은 ‘지금 여기’의 현재 시제가 아닌, ‘미래’의 어느 곳에 존재하는 탓이다. 더 많은 계몽과 더 커다란 개혁을 요구한 벨린스키의 열정이 한편으로 시의적절해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쉽게 좌초해 버릴 허상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까닭이 여기 있다. 아니나 다를까, 급진 개혁파를 자임하던 벨린스키는 어느 순간 체제 옹호의 극단적 이론가 자리로 옮겨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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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3 11:42 2009/10/2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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