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사랑? 이상적 삶? 망상을 깨고 새롭게 사랑하며 살기!

그린비 <개념어총서 WHAT>을 준비하면서, 개념어 별로 해당 책을 쓰신 선생님들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벌써 인터뷰 동영상도 마지막 편입니다. 이번 인터뷰는『재현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채운 선생님의 인터뷰입니다. 본 인터뷰는 축약본으로 인터뷰 전문은 <개념어총서 WHAT> 1차분(11.9 출간예정)과 함께 출간될 『개념어총서 WHAT 가이드북』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개념어총서 WHAT 가이드북 받으러 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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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란 무엇인가』 저자 채운

1970년 서울 출생.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시작한 공부는 미술사. 미술사라면 미술뿐 아니라 역사, 문화, 문학, 철학 등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뭐든 죽기살기로 하지 않으면 ‘일이관지’할 수 없음을 공부하면서 알게 됐지만). 그 시절의 각오는 “나는 예술가가 아니지만, 예술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되자!”였다. 조금은, 능력이 생긴 것 같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공부를 통해 만난 무수한 인연들은 내가 얻고자 했던 것 이상을 주고, 내가 가지고 있던 건강하지 못한 나쁜 습속들을 바꿔주었다. 예술은 삶의 선물이란 걸, 아니 세상에 선물이 되는 그런 존재들의 삶이야말로 예술이란 걸 기쁘게 배워가는 중이다. 내 배움과 내 비전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 그게 내 공부의 목표이자, 내가 꿈꾸는 삶-예술이다. 지은 책으로 『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2002, 공저), 『한국미술 100년』 1권(2006, 공저)이 있다.


들뢰즈, 플라톤, 불교 선사들, 여러 화가 등 동·서양 사상에 능통하신 느낌입니다. 어떤 공부를 해오셨나요?
미술사를 전공하는데, 지금까지 내가 공부한 걸 생각해 보면 직선으로 온 적이 없는 것 같다. 돌아서 오고, 와 보면 내가 와야 될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공부란 게 선으로 치면 직선이 아니고 나선을 그리면서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미술사) 공부를 했을 때, 답답했던 게… 순전히 양식사였다는 거다. 난 미술을 통해서 세계를 보고 싶었는데, 미술만 보게 하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대학원 1년 다니다가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철학을 공부하러, 그 당시에 ‘서사연’(서울 사회과학 연구소)이란 곳에 갔다. 거기서 처음 만난 게 들뢰즈였다. 꾸역꾸역 그 세미나를 따라가면서 들뢰즈가 언급한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D. H. 로렌스, 헨리 밀러, 카프카……, 아무튼 들뢰즈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사람을 소개받은 거다. 그러다가 고미숙 선생님이 계신 수유 연구실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근대’와 접속하게 되었다. 재미있었다. 내가 공부하는 들뢰즈나 푸코나 근대적인 사유를 비판하는 거니까. 그러면서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미술과 조금씩 만났던 것 같다. 그래서 미술사 공부를 이제 조금씩 해야겠다고 돌아와서 보니까, 내가 미술로부터 굉장히 멀어진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와 있더라. 그렇게 공부 시작하고 한 7~8년쯤 됐을 때, 근대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힘을 못 갖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판하고 난 다음에 뭔가 새로운 비전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는데, 나 스스로가 그런 비전을 찾지 못하니까 답답했던 때였다. 그때 연구실에서 ‘고전’ 공부와 접속하게 되었다. 옛날에 내게 안 보이던 사유들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아, 내가 근대 공부(비판)하다가 탈근대적인 사유만으로 설명이 안 되던 것이, 고전하고 접속이 되면 얘기가 많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재현’ 개념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재현’이라는 말 자체는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권력 같은 말은 개념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많이 쓰는데, ‘재현’은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굉장히 개념적이고, 어려워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알고 보면 삶 속에 뿌리깊이 이 사유가 있다. 내가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들뢰즈와 푸코를 공부하면서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네들이 선언하기를, 플라톤주의를 뒤집는 게 현대철학이다. 근데 플라톤주의가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살고 있는 현실 너머에 뭐가 있다는 걸 생각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우리가 아주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유라는 말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아프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아주 좋기도 하고, 사랑의 결이 갖는 여러 가지 스펙트럼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는데) 더 완전한 사랑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다. 이게 우리가 갖는 재현적인 사유 방식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것 말고 더 완전한 무엇. 지금 여기서 사는 삶 말고, 진짜 완전한 삶. 이런 나 말고 정말 완벽하고 이상적인 나. 이게 현실의 지평으로부터 계속 떠나가는 거다. 이게 다 재현이다.
이게 미술과 연결이 되면… 우리가 보통 예술을 접할 때, 뭘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걸 동원해서 그 그림을 본다는 거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 대해 전혀 몰라도, 처음 본 사람한테 휘청거릴 정도로 매력을 느낄 때가 있고, 아무것도 몰라도 싫을 때가 있다. 그게 현장에서 느껴지는 어펙션(affection)이고, 기운의 장(場)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을 볼 때는 우리가 뭘 알고 있는 대로 보려고 하거나, 알고 있어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에서는 재현이라는 게 작품과 나 사이의 거리를 아주 떨어뜨려 놓고 생각을 하는 거다. 창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예술 작품을 창작할 때 예술가가 표현하는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진짜로 현장 속에서 미술, 음악이 나하고 만났을 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유하는 게 아니라, ‘저게 뭔가’를 사유하게 된다. 그래서 계속 멀어진다. 예술이라는 것이.

그런 재현적 사고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이 대답에서 “이건 아니야, 이런 세상이 있어.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재현적 사고와 결국 똑같다. (웃음^^) 나는 어떤 유토피아도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들뢰즈에 휘청거렸던 이유는 ‘그래서 어떻게 해라’라는 말이 없다는 거다. ‘그래 알겠어, 근대가 이러저러해,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해. 그래서 어떻게…?’라고 하는 것을 들뢰즈가 얘기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걸 얘기하는 순간 또 그게 모델이 되니까. 찾고 발굴해야 하는 문제라는 걸, 우리에게 준 거다. 뭔가를 공부했으면 ‘이게 아니다’라는 걸 알았으면 ‘아니다’라는 걸 안 자리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지를 물어봐라, 나는 이게 들뢰즈의 사유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그게 뭔지 너무 답답했을 때, 그때 고전을 만난 거다. 고전의 사유는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떤 것들이 있었다. 깨달은 사람의 세계도 따로 없는데, 그래도 깨닫기 전과 후의 삶은 전혀 다르다는 거다. 그런데 깨달은 후의 삶이 어떤가는 아무도 얘기해 줄 수 없다, 깨달은 사람도 얘기할 수 없다. 비재현적인 사유라는 건 뭐냐, 재현적인 사유를 넘어선다는 게 뭐냐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을 새롭게 구성하는 모든 것이다.
비재현적인 사유를 하고, 비재현적인 삶을 산다는 게 생뚱맞은 것 같은데,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온갖 모델과 망상들을 깨는 거다. ‘아, 이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걸 문득문득 깨달아 가면서 배우는 것. 그게 비재현적인 삶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


2009/11/03 16:29 2009/11/03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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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9/11/04 20:08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그린비 2009/11/05 10:14

      문의하신 도서는 오늘 중, 그린비 홈페이지(http://greenbee.co.kr)에 등록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